부인, 오늘도 돈 많이 벌어 오겠습니다 - 송영 저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원하는 목차로 커서를 옮겨 를 누르십시오. ----- 차 례 ----- 작가 소개 1. 꽃과 빌딩 2. 달리는 집 3. 사람의 바보 4. 종달새와 포수 5. 추억을 찾아서 6. 옷걸이 7. 설렁탕과 피아노 8. 숨바꼭질 9. 특별시민 10. 이종 사촌 조카의 결혼식 11. 고독을 위한 휴가 12. 허풍장이 13. 종착역 14. 동창생 15. 타인의 시간 16. 직업 17. 전문가 18. 외딴 초가집 19. 밤에 만난 노인 20. 너무 훌륭한 남편 21. 아들 22. 금연 연습 23. 아내의 생일 24. 아내는 멋장이 25. 아침의 행사 26. 엘리베이터 27. 피서지에서 생긴 일 28. 외판원 29. 앞집 남자 30. 피아노 31. 종교의 자유 32. 아내의 취미 33. 가엾은 남편들 34. 아내의 친구 35. 연탄과 사과(1) 36. 연탄과 사과(2) 37. 연탄과 사과(3) 38. 연탄과 사과(4) 39. 연탄과 사과(5) 40. 연탄과 사과(6) 41. 연탄과 사과(7) 42. 연탄과 사과(8) 43. 연탄과 사과(9) 44. 연탄과 사과(10) 45. 연탄과 사과(11) 46. 연탄과 사과(12) 47. 결혼 작전(1) 48. 결혼 작전(2) 49. 결혼 작전(3) 50. 백마를 탄 기사 51. 맞선 52. 노총각 이야기 53. 노처녀 책 뒤에 작가 소개 -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 -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 - 1990년 중편소설 <벽 속의 새>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나왔다. - 1982년 1월부터 '여원' '가정조선' 등의 잡지사에서 11년 7개월 동안 기자 생활을 했다. - 1992년 장편소설 <황제수염>을 발표,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 1994년 <세 발 자전거를 타는 아이>로 장편동화 부문 '삼성문예상'을 수상. - 1993년 8월 전업작가 선언, 지금은 창작에만 전념하고 있다. 1. 꽃과 빌딩 고향 친구 박무생은 고등학교 수학 선생인데 이 친구 역시 나처럼 다른 도락이란 모르고 오직 바둑 두는 걸 유일한 낙으로 삼고 있다. 하기야 그의 호주머니 사정상 다른 도락을 즐기고 싶어도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빤한 일이다. 학교에서 퇴근하면 박무생은 내가 기다리는 기원으로 달려오는데 한두 판 바둑이 끝나면 우리는 근처 포장마차로 가서 한잔 술을 들면서 된소리 안 된소리를 섞어 잡담을 늘어놓곤 했다. 이것 또한 우리의 낙이라면 낙이랄 수 있는 것이다. "이봐! 자네에게 당장 일억이나 이억 원쯤 생긴다면 자넨 뭣부터 살거야?" 이런 싱거운 소리는 대개 박무생이 즐기는데 나도 그다지 싫어하는 쪽은 아니다. 박무생이나 나처럼 백 년 가봐야 그런 돈을 만져보긴 고사하고 구경할 기회조차 얻기 힘든 백면서생의 처지에서는 이런 공상이나 흰소리도 정신건강상 해롭지만은 않은 것이다. "이봐! 이왕 돈이 생기면 십억쯤 생길 것이지, 째째하게 일억이 뭔가? 일억을 가지고 요즘 세상에 뭘 사겠다는 거야? 엿이나 사먹을 돈을 가지고." "그래. 내가 실수했어. 그럼 십억으로 정정하지. 십억이 자네에게 생긴다면 자넨 그 돈으로 뭘 살 건가? 뭐부터 하겠느냐 이거야." "으흠." 돈이 십억쯤 되면 나도 간단하게 대답할 일이 아닌 것이다. 비록 공상이지만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난 우선 내가 사는 열다섯 평짜리 아파트에서 마흔 평쯤 되는 곳으로 이사를 하겠어. 아내도 거기엔 전적으로 동감일걸. 그런 뒤 차를 한 대 사고 그 다음엔 나는 유우럽으로 여행을 떠날 거야. 스페인, 희랍, 스위스, 프랑스 등 나는 그런 곳에 여행하는 게 꿈이니까." "좋았어. 언젠가 자넨 그 꿈이 실현되길 바라네. 아니, 꼭 실현 될 거야. 실현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아?" "그야 그렇겠지. 나도 꿈을 버리지는 않고 있다구. 그러나 갑자기 그런 돈이 생긴다는건 불가능한 일이지. 도둑질을 한다면 모를까? 그건 그렇고 자넨 십억이 생기면 뭘 사지." 이 질문을 하면서 나는 문득 박무생의 구차한 살림 형편과 가난에 찌들은 그의 아내 얼굴을 떠올렸다. 박무생 역시 나처럼 열다섯 평 아파트에 웅크리고 살고 있는데 나는 그나마 아들 하나 뿐이지만 이 친구는 결혼을 일찍해서 공주가 자그만치 다섯이나 있는 것이다. 그 애들을 모두 입히고 먹이고 그리고 학교에 보내자니 박무생과 그의 아내는 언제나 생활에 지쳐 있는 것이다. 이 친구는 교사면서도 양복 한벌 제대로 된 게 없었다. 그의 아내는 또 어떤가? 얼마 전 박의 집엘 갔는데 그녀는 재봉틀을 열심히 돌리고 있었다. 내가 뭘 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시장에서 헌옷 수선을 맡아다가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미장원에 출입했던 일이 먼 옛날의 추억이 되었다고 내게 말한 일도 있었다. 공주 다섯을 거느리기가 어디 그렇게 수월하겠는가? 박무생은 노랗게 뜬 얼굴로 갑자기 생긴 십억 원을 쓸 궁리를 한참 하더니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아파트가 싫어. 크건 작건 아파트에선 우선 떠날거야. 마당이 있는 자그마한 집으로 옮기고 딸년들에게 제각기 방 하나씩 주는게 우선 급선무야. 나는 마당에다 작은 정원을 만들고 내가 좋아하는 꽃을 가꾸겠어. 아내도 꽃을 좋아하지. 그래서 돈이 있으면 꽃가게를 하고 싶다는 거야. 아내에게 꽃가게 하날 마련해주지. 그뿐이야. 나는. 물론 공주님들 가르치고 시집 잘 보내는 건 당연한 일일 거고." "아니, 십억씩이나 가지고 고작해서 계획이 그뿐이란 말인가? 사람도 참 싱겁군 그래. 그러니까 자네에게 돈이 안 붙는 거야. 좀 꿈을 크게 가져봐." 내 핀잔에 박무생은 씁쓸하게 웃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박무생의 꿈이 비록 공상에 그치기는 해도 나보다 한결 순수하고 건전하다고 생각했다. 이 친구에게 제발 호화주택은 아니더라도 삼간초옥이라도 생겨서 공주들에게 방 한간씩 차례가 돌아가면 오죽이나 좋을까?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그렇지만 공상은 어디까지나 공상에서 그쳐야 몸에 해롭지 않다. 세상에는 공상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해서 얼마나 많은 나쁜 짓들이 저질러지고 있는가? 우리는 그쯤에서 흰소리를 그치고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런 도락을 즐겼던 것도 벌써 반 년 전의 일이다. 한동안 박무생이 까닭없이 기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학교에 연락해봤더니 벌써 그만두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역시 집도 옮겼다는 것이고 새 연락처를 알 길이 없었다. 나는 무척 그의 소식이 궁금했으나 그렇다고 경찰에 알아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럭저럭 반 년이 지나고 어느날 박무생이 전혀 달라진 모습으로 기원에 불쑥 나타났다. 모습이 달라졌다는 건 그에게 초라한 훈장티가 싹 가시고 살도 찌고 혈색도 좋아졌고 옷차림도 아주 말쑥해졌다는 말이다. "아니, 이 사람 소식도 없이 자취를 감추는 법이 어디 있나? 그래, 외국 나들이라도 하고 온 거야?" "그야 몇 차례 다녀왔지. 나 사실은 사업하고 있어. 우리 차나 한잔 마실까?" 박무생을 따라가서 다방에서 내가 들은 이야기는 나를 놀라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세상에는 그런 일도 있구나. 나는 그러니까 가난뱅이에게 갑자기 십억씩이나 생기는 일도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아내의 외조부가 유산을 아내에게 물려줬다네. 그런 외조부가 있다는 것도 몰랐는데 갑자기 나타난거야. 임종을 앞두고 이 양반이 친족을 찾아보니 아내밖에 재산을 물려줄 사람이 없는 거야." "그래서 그 유산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 거군. 유산이 얼마나 되는가?"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대충 한 십억쯤 될 거야. 나도 아직 정확한 걸 모르고 있어." "그 돈으로 그래 지금 뭘하고 있는가?" "빌딩을 하나 샀지. 내가 뭐 사업에 관해서 아는 게 있는가? 괜히 손 잘못댔다가 돈만 날릴 수가 있으니까 우선 안전하게 부동산을 하나 구했지. 7층 빌딩인데 그것 관리하기도 쉽지는 않더군. 외국 무역에 손을 댈려구 지금 연구중인데 그 때문에 외국 시찰을 두어 번 다녀왔지." "정말 놀라운 일이로군. 이건 공상이 현실로 바뀐 거야. 그런 일이 왜 자네에게만 일어나고 내겐 안 일어날까? 그건 그렇고 자넨 돈이 생기면 꽃이나 가꾸겠다더니 빌딩을 산 걸 보니까 자네도 많이 변했군. 그게 공상과 현실의 차이일까?" "아마 그럴 거야. 그때는 꽃밭이나 가꾸겠다는 게 정말이었네. 지금도 꽃은 좋아하고 있는 걸. 아내는 어떤 줄 아나? 전에는 꽃가게 노래를 부르던 여자가 막상 돈이 생긴다니까 그 이야긴 쑥 들어가고 이젠 자동차 운전을 배우고 있어. 자기 차를 운전하고 백화점에도 가고 친구들도 만나러 다닌다는 거야. 그러니까 꽃이나 가꾸고 꽃가게나 운영하고 싶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가난뱅이의 발상이란 말이야. 돈이 정작 있는 사람은 그런 말을 절대로 하지 않지."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2. 달리는 집 십 년 전만 해도 주변에서 누가 차를 사가지고 손수 운전하고 다니는 걸 보면 신기하게 보았다. 그런데 요즘엔 도리어 자동차도 없이 다니는 사람이 신기하게 보일 정도가 되었다. 정말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몇 해 전엔 사람을 만나면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사느냐고 묻는 게 유행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그 말은 쑥 들어가고 요즘은 차를 뭘 타고 다니느냐고 묻는 게 유행이다. 자동차의 종류가 그 사람의 신분과 형편을 나타내는 척도가 됐기 때문일까?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한국사람들은 약간 으시대기를 좋아하고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성품들이 있어서 누가 묻지 않는데 자기는 뭘타고 다닌다고 스스로 뽐내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뽐내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물어주면 그만큼 상대방은 좋아할 게 아닌가? 한국사람은 일반적으로 뽐내기 좋아한다고 했는데 과거에는 집으로 그런 경향이 나타났었고 지금은 자동차로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말하자면 자기 형편보다는 훨씬 과분한 집에서 살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고 역시 자기 분수에 지나친 자동차에 몸을 싣고 다니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김인배는 조그만 화장품가게를 하는 내 친구다. 그는 6년 전에 처음으로 마이카족이 되었다. 중고 포니 자동차를 몰고 그는 마이카족이 되었다는 걸 신고하기 위해 우리집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나를 자기 옆자리에 태우고 그때 막 개통된 남부순환도로를 한바탕 질주했었다. 그만큼 그는 마이카족이 된 사실에 흥분했고 들떠있었다. 그런데 김인배는 그뒤 자동차에 관한 한 장족의 발전을 거듭했다. 그는 일 년만에 차를 바꾸곤 했는데 물론 한 단계 더 비싼 차로 승격을 하는 것이다. 중고 포니에서 포니2 새 차로 바꿀때만 해도 나는 수긍이 갔다. 누구나 헌 차를 타다가 운전 솜씨가 좋아지면 새 차를 구입하는 게 순서인 것이다. 그런데 반 년이 채 안되어 김인배는 포니2를 버리고 스텔라로 바꿔 탔다. 만약 누가 아내를 그렇게 자주 바꿔 탔다면 그야말로 패가망신했을 것이다. "아니, 포니2도 쌩쌩한데 벌써 차를 바꾸나?" 내가 납득이 안가서 묻자, 김인배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포니를 몰고 다녔더니 수위들이 들여보내지를 않아요. 할 수 없이 차를 바꿨죠." 김인배는 화장품을 팔기 위해 큰 건물 같은 데 자주 출입하는 사람이긴 했다. 그게 정말일까? 포니는 출입을 안 시키고 스텔라는 출입을 시킨다는 말인가? 그야 어떻든 김인배는 그 스텔라마저 일 년을 채 못 타고 로얄로 차를 바꿨다. 수위들이 이젠 스텔라도 통과를 안 시키기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자넨 조그만 가게 하나 하면서 그런 차를 몰고 다녀도 지장이 없는 거야?" 검정색 로얄을 보면서 내가 물었다. "차를 몰아보지 않은 사람은 남의 심리를 몰라요. 포니나 스텔라 속에 앉아서 고급차를 타고 가는 사람을 보면 속에서 열불이 나는 걸 어떡합니까? 저런 고급차를 몰고 가는 기분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도 나구요. 자기도 한번 체험해보고 싶은 겁니다." "그래, 로얄을 몰고 보니까 기분이 어때?" "그야 말할 수 없이 상쾌하죠. 또 수위들이 이따금 거수경례까지 하는 걸요. 포니 타고 다녔다면 그 사람들이 거수경례까지 하겠어요? 어림 없는 일이죠." "장사는 잘 되나?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닐려면 장사라도 잘 되어야 하지 않겠어?" "염려마십쇼. 차를 바꿀 때마다 수입은 달라지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 차가 뭐 일시불로 사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천천히 벌어서 갚아가면 되는 겁니다." 김인배는 로얄을 몰고 바람같이 사라져버렸다. 그로부터 꼭6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한밤중에 김인배가 전화를 걸어왔다. "지금 찾아가도 괜찮겠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무슨 일이지?" "제가 한잔 사고 싶어 그럽니다. 집에 꼼짝않고 기다리고 계시면 제가 몰고 가서 근사한 데로 모시죠." 전화는 거기서 끊겼다. 가만있자,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일까. 오밤중에 특별한 이유도 없이 느닷없이 근사한 데 가서 한잔을 사겠다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기야 사노라면 그런 날도 있을 수는 있는 일이다. 갑자기 기분이 우울해서 친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던가 반대로 신나는 일이 벌어져서 밤중이건 새벽이건 한잔 마시지 않고는 배겨내기 힘들 때가 있는 법이다. 나는 기다렸다. 잠시 후 인터폰이 울렸다. 그는 정말 쏜살같이 달려왔다. 나는 아파트 마당으로 내려갔다. 어둠속에 검정 세단이 서 있고 김인배가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차 옆으로 갔다. 차가 또 바뀐 듯했다. "또 바꿨군. 이번엔 뭐야?" "우선 타고 보십쇼." 의기양양하게 김인배가 말했다. 나는 운전석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자동차 실내 분위기가 벌써 지금까지 타봤던 차들과는 사뭇 달랐다. 호화롭고 으리으리했다. "이게 무슨 차지?" "아이구. 벤츠도 모르세요? 그러니까 촌사람 말을 듣지." "뭐 벤츠라고? 이게 자네 찬가?" "물론이죠. 저는 남의 차엔 앉지도 않는 주의니까." "이걸 자네가 어떻게 샀어? 엄청나게 비싼 찬데." "비싸다는 걸 아시니까 다행입니다. 어디 가서 우선 한잔 하십시다." 김인배는 차를 움직였다. 과연! 감탄이 나올 만큼 차가 부드럽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김인배가 말했다. "외국 공관에서 내놓은 찬데 욕심이 나서 아파트를 팔았어요. 가족들은 임시로 셋집으로 옮기고요." "그래도 괜찮은가?" "뭐 내 아파트를 내가 팔았다는데 문제가 뭐가 있습니까?" "가족들 말야. 자네 부인이나 아이들이 가만 있겠냐구?" "이걸 뭐 혼자 탑니까? 밤낮없이 자기들도 타고 다닐 건데 뭐가 불평입니까? 그래도 나 같은 놈 애비로 둬서 이런 차도 타보는 것 아닙니까. 안 그래요?" "하긴 그래, 나도 그렇고. 벤츠를 타보리라곤 생각도 못했어. 그러니까 자네 집을 타고 다니는군. 이건 달리는 집이야. 하하." 어느 카페 앞에 차가 멈췄다. 웨이터가 부리나케 뛰어오더니 자동차문을 열어줬다. 웨이터는 그야말로 우리를 국빈처럼 모셨다. 그런 대접을 받는 나의 기분도 그다지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3. 사람의 바보 봄이 되면 내가 어김없이 찾아가곤 하는 찻집이 있다. 한남동 네거리에서 이태원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그 찻집이 있는데 찻집 이름이 '나무집'이라는 좀 맹랑한 것이다. 내가 왜 그 나무집을 봄이 되면 찾아가는가?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겨울에는 나는 추위 때문에 좀처럼 바깥에 나가지를 않으며 더구나 차 한잔을 마시러 나간다는 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그만큼 추위를 싫어하고 또 게으르기도 하니까. 나무집은 그 이름이 말해주듯 실내 장식이나 벽과 천정이 온통 나무로만 꾸며져 있다. 그것도 천연의 나무색 그대로 꾸며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 앉아 있으면 흡사 자연의 숲속이나 시골의 마굿간 같은 데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젖는다. 나무집의 커피맛 또한 일품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리고 다른 곳에 비해 그곳은 무척 조용하다. 음악도 비교적 조용한 실내악곡 같은 걸로 그것도 아주 볼륨을 낮추어 들려준다. 그 모든 것이 내 마음에 드는 것이다. 내가 봄이 되면 그제서야 나무집에 찾아가서 한 잔의 커피를 마시게 되는 까닭을 이쯤하면 이해했을 것이다. 이건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이었다. 어제 내가 점심을 먹고 집을 나와서 오랜만에 나무집을 찾아갔기 때문이다. 나는 찻집에 한번 들어가면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설 줄 모른다. 다소 무료하더라도 도리어 그 무료함을 즐기면서 오래도록 한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건 전에 내가 오랫동안 거리를 배회하는 실직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몸에 밴 습성이다. 그때는 갈 곳이 없어서 한 잔의 커피값을 지불하곤 마치 본전이라도 뽑을 사람처럼 줄기차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습성이 그다지 한가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남아서 일단 어디거나 의자에 앉기만 하면 일어설 줄 모르는 것이다. 무료함을 즐긴다는 말은 사실은 거짓말이다. 일단 한곳에 자리잡고 앉으면 좀처럼 다른 장소가 생각나지 않기 때문에 그냥 견디며 앉아 있을 뿐이다. 이런 걸 방향 감각을 잃었다고 흔히들 말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제는 전혀 상황이 반대였다. 내가 나무집에 앉아 있는 세 시간 동안이 내겐 무료하긴커녕 너무나 재미있었고 스릴까지 만끽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 찻집에서 난데없이 괴상한 비디오를 보여주었다거나 혹은 무슨 광대라도 동원해서 대낮에 활극을 보여주었던 건 아니다. 그리고 그 집에 어제 갑자기 손님이 유난히 많이 몰려왔던 것도 아니다. 내가 들어갔을 때 손님은 늘 그렇듯 서너 명에 불과했다.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보다 비어 있는 자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무집이란 곳은 이래야만 어울린다. 만약 이곳에 갑자기 바글바글 사람이 끓기라도 한다면 이건 나무집의 매력이 끝났다는 걸 의미한다. 물론 내 기준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내가 들어갔을 때 그녀와 그 남자는 먼저 와서 앉아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들이 내가 즐겨 앉곤 하던 창가의 그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나는 부득이 그들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꿩대신 닭이라고 내가 좋아하는 자리에 못 앉을 바에야 그 근처라도 앉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와 그 남자는 바싹 붙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뭔가를 얘기하다가 낯선 손님이 옆자리에 앉게 되자, 갑자기 이야기를 뚝 그치고 긴장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나까지도 괜히 긴장이 되었다. 나는 그들이 굉장한 밀담이라도 나누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얼굴을 그들의 반대쪽으로 돌리고 짐짓 다른 데를 바라보는 척했다. 그제서야 그들은 경계심을 풀었는지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자기 맛있는 걸 사줄려고 오늘은 돼지 저금통까지 깨가지고 왔단 말이야. 그런데 왜 째째하게 굴어?" 남자가 볼멘 소리로 말했다. "조카 저금통을 깼다구? 내참 기가 막혀서. 나 지금 배고프지 않아. 아무것도 먹도 싶은 생각 없단 말야. 오늘은 바쁘다고 전화로 그랬잖아?" "좋아. 난 혼자 중국집에 가서 배가 터지도록 짜장면이나 먹겠어. 항상 바쁘다니 누가 보면 뭐 아르바이트라도 하는 사람 같지 않아? 누굴 만나는 거야?" "왜 이래. 괜히 히스테리까지 부리면 나 싫다구. 내 입에서 다른 남자 이야기 나오는 것 봤어? 그런 말 하면 바보라고 할거야. 고모네집에 간다고 그랬잖아?" "좋아. 오늘은 양보하지. 그렇지만 다음엔 용서없다는 걸 알라구. 명심하겠어?" "알았어. 명심하지 뭐." 여자의 약속을 받아내고 남자가 약간 기분이 풀린 듯했다. "나 지금 운전 배우기 시작했다. 자기 태워줄려구. 집까지 데려다주고 좋지 않아?" "정말? 그래. 멋있겠다. 한데 차가 어디 있지?" "바보. 엄마가 사주기로 약속했다구. 벌써 일 년 전부터 약속을 받아놓고 있어. 걱정말라구." 그 남자는 계속 물을 마셔댔다. 나는 남자의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 그러고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그의 말투와 그의 용모가 너무 안 어울렸기 때문이다. 그는 청바지와 노란색 잠바를 입고 있었는데 얼굴은 아주 잘 생겼고 야무진 인상을 주었다. 눈에서는 안광이 번쩍이고 있었다. 남자들 속에서라면 이런 사람은 결코 뒷자리에 서는 법이 없는 것이다. 그는 대학교 졸업반 쯤으로 보였다. 여자는 거기 비하면 좀 바보스러운 인상이었다. 그녀는 옷차림도 그닥 단정한 편은 아니었다. 재킷과 스커트를 입었는데 자기 몸에 비해 좀 헐렁하게 사이즈가 큰 걸 입고 있었다. 그게 유행인지는 모르지만 내 눈엔 단정하게 보이지 않았다. 용모도 그저 그랬다. 얼굴이 크고 살이 많고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얼굴이었다. 구태여 좋게 말한다면 성적 매력이 약간 있는 편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것도 품질이 낮은 매력이었다. "안 갈 거야?" 여자가 재촉했다. 남자는 자리를 뜨기 싫은 눈치였다. 여자가 시계를 보았다. "젠장, 한 시간도 못 만나고 일어서야 하나? 김포에서 여기까지 헐레벌떡 달려왔는데 말이지." "아이, 고모가 기다리겠다. 나 빨리 가야 한단 말이야. 바보같이 그러지 말구 다음 번에 또 만나면 되지 않아. 누가 뭐 그동안 죽기라도 하나?" "알았어. 그대신 다른 녀석 나 몰래 만나고 다니는 걸 알게 되면 그땐 알았지?" "알았다니까 그러네." 둘은 동시에 일어섰다. 남자가 차값을 치렀고 그리고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제서야 나 자신의 생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건 무료함을 의미했다. 내 생각이래야 뭐 새로운 게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나는 무료함을 즐길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건 부질없는 걱정이었다. 2막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십 분쯤 지났을까? 조금전 청바지의 남자와 나갔던 그 여자가 이번에는 웬 신사와 함께 갑자기 들어왔던 것이다. 그들은 아까 그녀와 그 남자가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그때와 똑같은 자세로 앉았다. 이번의 남자는 서른이 훨씬 지난 듯했고 옷차림도 말쑥한 정장으로 어느 회사의 부장쯤은 되어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는 점잖고 지적인 용모의 소유자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남자가 말했다. "어떻게 된거지? 문 앞에서 둘이 마주치다니 말야." 그는 기분이 좋은 듯했다. "바보, 그걸 보고 텔레파시라고 하는 거야. 난 고모집에 갔다가 오는 길인데 시간 늦을까봐 막 뛰어왔다구." 물론 그건 거짓말이었다. 십 분동안에 어떻게 고모집에 다녀올 수 있겠는가? 그녀가 손오공도 아닌데 말이다. "뭘 시킬까? 뭐 맛있는 거 시켜 먹을까?" 남자가 여자에게 말했다. "바보, 여기 맛있는 게 뭐가 있다구. 맛있는 거 사줄려면 밖으로 나가야지. 안 그래?" "오 참 그렇군. 나 요새 정신이 없어. 아마 자기를 알고 난뒤부터 그럴 거야. 차나 마시고 우리 곧 나가. 내가 아주 맛있는 일식집을 알고 있다구. 자기 생선초밥 좋아하지?" "싫어, 왜 자꾸 살찌는 음식만 권하는지 모르겠네. 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단 말야." "왜 살찌는 게 싫어? 통통하게 살찌면 보기 좋지 않아?" "바보 같은 소리 작작 하라구. 자기는 그럴지 몰라도 다른 남자들은 안 그래. 비쩍 마른 여자를 더 좋아한다니까." "나 말고 다른 남자 맘에 들어야 할 이유가 있는 거야? 그 말 이상하지 않아?" "이상할 거 없지. 아직 백년가약을 맺은 사이도 아닌데 뭘 그래. 하지만 자기 말고 내가 만나는 사람이 있을까 봐서 그런다면 정말 나 화낼 거라구." "하하. 한번 해본 말인데 뭘 그래. 그건 그렇구 우리 다음 토요일에 정말 여행갈 거야? 난 사파리 외투까지 사놨다구." "안 갈 거야. 자기 그렇게 시시하게 나오면 다른 사람하고 갈거라구." "괜히 사람 놀라키지 말어. 심장 떨어지게. 갈 거지?" 여자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밖으로 나갔다. 2막은 여기서 끝났다. 물론 그들의 대화가 뭐 굉장한 내용을 갖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전혀 무료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그 연극은 잘 구성이 되어 있고 그녀의 연기는 뛰어났던 것이다. 4. 종달새와 포수 이건 이십 년도 더 지난 옛날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금호동에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집주인 아주머니가 헐레벌떡 집안으로 뛰어들어오더니 내게 말하는 것이었다. "학생! 지금 저 골목길로 좀 나가봐요. 글쎄 민정이가 저녁밥 먹을 생각도 않고 골목길에서 이야기를 듣는다고 저러고 있는데 학생이 좀 데려와야겠다구요. 내 말은 듣지도 않는 걸." 민정이란 국민학교 삼 학년에 다니는 주인집 딸아이였다. "이야기를 듣다뇨? 누가 이야기를 하는데요?" "글쎄, 며칠 전부터 이상한 사람이 골목에 나타나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하는데 난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여요. 그 사람이 뭣 때문에 그러는지도 모르겠고 몰골도 수상쩍기만 하다구요. 그러니 학생이 한번 나가서 그 사람을 보구려. 이상하다 싶으면 파출소에라도 알려야 하지 않겠어요?" 금방 저녁식사를 하고 난 여름밤이었다. 민정이 엄마는 그 이상한 사람이 혹시 아이들을 유괴라도 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긴 이처럼 각박한 세상에 뚜렷한 목적없이 시간을 허비하며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사실이 내게도 쉽게 수긍이 가지 않았다. 나는 당시 민정이네 집에서 가정교사로 있었다. 그러니까 민정이를 그 낯선 이야기꾼으로부터 떼어놓는 일은 내 책임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나는 어둑어둑 골목길로 달려나갔다. 집에서 십여 미터 떨어진 골목 입구에는 전신주가 하나 있고 거기에 가로등이 커져 있었다. 아이들은 그 가로등 밑에 모여 있었는데 놀랍게도 십여 명이 넘는 숫자였다. 그건 그 이야기꾼의 이야기 솜씨가 대단하다는 증거였다. 그렇지 않고야 어떻게 그 많은 아이들이 저녁식사도 잊고 골목길에 남아 있겠는가? 내가 가로등 밑으로 다가갔을 때는 이야기가 한참 재미있게 진행중이었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아직 서른이 채 되지 않은 젊은이였는데 얼굴이 파리하고 옷차림이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민정이 엄마가 그를 위험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대학생인 내가 듣기에도 그의 이야기 솜씨는 보통 수준을 훨씬 넘는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 나도 그의 이야기에 흘려서 민정이를 데려간다는 것도 잊고 십여 분이나 그 가로등 밑에 서 있었을 정도였다. 그 동안에 아이들의 누나나 형 혹은 엄마가 나타나서 아이를 반강제로 데려 갔기 때문에 아이들은 금방 숫자가 줄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윽고 십 분이나 넋을 잃고 있던 나도 민정이를 가까스로 타일러 집으로 데리고 왔다. 물론 민정이는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자기를 끌고 가는 것에 대해 몹시 불평을 터뜨렸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마저 듣고 오는 건데 선생님도 나쁜 선생님이야." "미안하다. 엄마가 너무 걱정하셔. 그런데 너 방금 그 이야기는 제목이 뭐라던?" "종달새와 포수래요. 너무 재미있어요." "응, 종달새와 포수, 좋은 제목이구나." 민정이 엄마는 아이가 돌아왔는데도 그 이야기꾼에 대한 불평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녀에 의하면 이웃 아주머니들이 그 사람을 의심한 나머지 파출소에 알릴 거라는 것이었다. 엄마들은 그가 나타날 시간만 되면 불안에 떨게 된다는 말도 했다. 하기야 요즘 세상에는 그런 엄마들을 나무랄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며칠이 지났다. 민정이가 갑자기 그 이야기꾼 아저씨가 오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벌써 사흘째 안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그날 민정이 엄마로부터 나는 그가 파출소로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들이 불안해서 드디어 그를 파출소에 고발한 것이다. 그 뒷소식은 엄마들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가 나타나지 않게 되면서 아이들이 저녁 때 골목에 나가지 않는 것만이 엄마들에겐 즐거운 일인 듯했다. 그 사나이의 뒷소식 같은 건 그녀들의 관심 밖이었다. 그가 어떤 사람일까? 정말 위험한 인물일까? 이런 의문이 가끔 있었지만 나 역시 그것을 알기 위해 파출소에 가보지는 않았다. 세월이 많이 지나갔다. 아마 반 년은 지나갔을 것이다. 민정이 아빠가 딸의 생일 선물로 한권의 동화책을 사온 건 겨울이 다 지나갈 무렵이었다. 아빠는 밤늦게 들어왔기 때문에 민정이가 그 선물을 발견한 건 다음날 아침이었다. 그런데 선물을 손에 들자마자, 민정이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나에게 달려왔다. "이거 봐요, 선생님. 종달새와 포수가 여기 있어요. 그리고 그 아저씨도 여기 있구요." 민정이는 너무 놀란 나머지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내가 자세히 책 제목을 봤더니 정말 종달새와 포수였고 표지 뒷쪽에 나와 있는 저자의 사진은 분명 그때 그 가로등 밑에서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 사람이었다. 그 책 안표지에는 그가 그해의 가장 우수한 동화 작가로 선정되었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민정이 엄마가 말했다. "왜 그 사람은 자기가 동화 작가란 걸 말하지 않았지? 그랬다면 파출소에 고발까지 했겠어?" 이건 그녀로서 약간 미안한 마음에서 하는 말일 것이었다. 이번에는 나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 사람이 동화를 들려주고 돈을 받았다면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겠죠. 남의 선의를 믿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는 게 슬픈 일입니다." 5. 추억을 찾아서 며칠 전 조간 신문 한 모퉁이에서 우연히 김훈재 시인의 부음을 읽었다. 그 기사는 사진조차 나오지 않은, 아주 짤막한 기사였다. 그는 최근에는 거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즘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아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김훈재 씨는 50년대에 주로 활동했으며 내 기억으로는 그 당시에 무척 낭만적이고 발랄했던 그의 시가 독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김훈재 씨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신문 모퉁이에 나온 그 초라한 기사를 봤을 때 내 머리에는 3년 전의 그 기억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김훈재 시인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말했는데 사실은 나도 가까이서 그를 보고도 그가 시인이란 걸 알지 못했다. 우연이지만 나는 그와 열흘 동안 한집에서 생활한 기억을 갖고 있다. 3년 전 나는 친구의 권유로 일본 여행을 갔었다. 일본에는 초행이고 아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나는 출판사에 근무하는 그 친구가 이끄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내 친구 김요한은 작가이자. 출판업자인데 일본에는 자주 왕래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동경에 교포가 운영하는 조그만 숙박업소를 잘 알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우리 두 사람은 신주꾸에 있는 그 숙박업소로 직행했다. 그곳에는 한국에서 온 여행자들이 많이 묵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식사를 하려고 김요한과 내가 식당에 갔을 때 키가 크고 몸이 마른 노인 한 사람이 혼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같은 한국인이고 더구나 한집에서 기거하기 때문에 자연히 우리는 서로 친밀감을 느꼈다. 김요한이 노인에게 먼저 말을 붙였다. "할아버지, 혼자 일본엘 오셨나요?" "네. 나 혼자 왔수다. 같이 오자고 해도 같이 올 할매가 없다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군요. 참 어려운 여행을 오셨습니다." "그렇소. 아들들에게 졸라대서 여기 어렵게 온거요. 뭐 내 생전에 다시 외국엘 나올 수 있겠소? 고맙게도 두 아들이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오. 난 이번이 마지막이요." 우리는 밥을 먹고 방으로 돌아왔다. 김요한이 말했다. "참 이상한 노인이야. 저 나이에 혼자 저렇게 다니는 사람은 처음 봤는걸. 안 그래?" "글쎄, 그도 그렇군. 뭘 하던 사람일까? 과거에 동경에서 살았거나 유학을 했던 사람이 아닐까? 그래서 그 기억을 더듬어 여길 온건 아닐까? 마지막으로 말이야." "자넨 역시 추리가 빠르군.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한번 정식으로 물어보세." 우리는 피곤해서 잠자리에 들었다. 숙박업을 하는 교포는 봉고차 한 대를 가지고 여행 안내도 하고 있었다. 그 교포가 운전을 하는데 희망자를 차에 태우고 매일 하꼬네다 아다미다 닛꼬 등을 돌아다녔다. 김요한과 나, 그리고 그 집에서 묵는 사람들 대부분이 편리한 관광 수단을 매일 이용했다. 값도 싼 편이고 그 교포의 안내도 친절하고 자상했다. 이렇게 실속있는 여행은 처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예외자가 있었다. 그 노인이었다. 그는 한번도 봉고 버스를 이용하지 않았다. 아다미다 닛꼬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 노인은 그럼 뭘 하러 일본에 왔단 말인가? 그는 매일 도쿄 시내로 나가서 돌아다니는 모양이었다. 저녁 때, 그러니까 우리들이 봉고를 타고 실컷 관광을 즐기고 숙소로 돌아가면 그때쯤 노인도 잔뜩 지친 몰골로 숙소로 돌아오곤 했다. "저 노인 하루종일 시내에서 뭘 하고 다닐까? 잔뜩 지쳐가지고 오는 걸 보면 한가하게 산보나 즐기는 것 같지도 않고 말야.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물건이라도 사러 다닌다고 하지." 김요한이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노인의 행적을 알 수가 없었다. 저녁 식탁에서 보면 그는 피곤해서 금방 쓰러질 것 같았다. 내가 노인이라면 나는 종일 집에 누워 있거나 귀국을 서두를 것 같았다. 노인의 건강은 그렇게 안 좋았다. 이윽고 노인은 어느날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 전날 유난히 무리를 했던 모양이었다. 김요한이 내게 말했다. "외국까지 와서 안됐는데, 한번 들여다봐야겠지." "그래, 가벼운 맥주나 몇 병 들고 가세." 나는 골목 구멍가게로 가서 맥주를 사왔다. 우리는 노인이 누워 있는 방으로 갔다. 노인은 우리가 아무리 만류해도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맥주를 마셨다. 우리의 문병에 감격한 탓일까? 그날은 노인이 말을 많이 했다. "난 본래 시를 조금 썼다오. 필명으로 썼지. 김훈재라고. 요새 사람들은 잘 모를 거야." "아, 선생님께서 바로 그 김훈재 선생이십니까? 어릴 때 저는 선생님 시를 많이 읽고 또 좋아했는데요." 김요한이 몹시 반가와했다. 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틈에 내가 노인, 아니 김훈재 시인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그런데 도쿄 시내에서 그동안 뭘로 소일하셨습니까?" 노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사람을 찾고 다녔지. 난 옛날 여기서 대학을 다녔다오. 그때 하숙집 딸을 좋아했었소. 그쪽에서도 내게 관심이 있었고, 그런데 선친께서 작고하는 바람에 도중에 귀국을 해버렸소. 평생 그 여자를 잊을 수가 없었서. 그래 죽기 전 한번 만나보려고 아들들을 졸라 여기까지 온 거요." "그래 그분을 만나셨습니까?" 내가 물었다. "아이구, 거리가 어떻게 변했든지 그 집 찾느라고 사흘이나 걸렸소. 집은 찾았는데 이번엔 사람이 없으니 어떡하오. 그래 동사무소를 찾아가 이사한 곳을 알아냈지. 거길 갔는데 거기서도 또 옮긴 거요. 북해도에서 살고 있다는 주소를 얻었소." "아직 못 만나셨군요. 북해도엘 가실 겁니까?" "몸이 좀 나으면 내일이나 모레쯤 그곳으로 떠날거요. 비행기를 타고 가야겠지." 노인은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인의 얼굴을 그려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제서야 그동안 노인이 도쿄애서 뭘 하고 지냈는지 그리고 왜 돌아올 때 그렇게 지쳐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이야기를 듣고 보니 노인의 처지가 너무 안타까왔다. 몸만 건강한들, 아니 조금만 더 젊었던들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는 일정이 끝나서 먼저 귀국을 했다. 노인은 그때까지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래서 나는 노인이 그 뒤 건강이 회복되어 북해도를 갈 수 있었는지 어떤지를 모른다. 아니, 노인은 분명히 그곳에 갔을 것이다. 가서 그 여인을 만났을 것이다. 6. 옷걸이 인간에겐 정말 병도 여러 가지가 있다. 육체의 병, 마음의 병, 정신병, 등등. 이것을 다시 세분하면 병의 가짓수는 하룻밤 동안 주워섬겨도 다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 병에 걸려 있고 병 자체가 아주 무겁고 치명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흔히 잊어버리고 있는 병이 하나 있다. 잊고 있다기 보다 그런 병은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병은 다름 아니라 현금 공포증이다. 물론 그 반대의 병도 있다. 좀 더 쉽게 풀이하자면 현금을 몸에 지니고는 좀이 쑤셔서 못 견디는 병인 것이다. 왠지 몸에 현금을 가지고 있으면 불안하고 무슨 피부병이라도 걸릴 것처럼 신경이 쓰이는 사람, 이런 사람은 뜻밖에도 많다. 돈도 많이 그리고 자주 가져본 사람이 돈을 몸에 소유하는 데 익숙한 법이다. 오랜 세월을 그야말로 적수공건으로 불편없이 살아오던 사람에게 갑자기 목돈이 생겨보라. 그는 까닭없이 뭔가 불안하고 거추장스럽고 초조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서둘러 빨리빨리 그 돈을 모조리 한푼도 남김없이 써버리고 다시 빈털터리가 된 다음에야 비로소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안도감을 느낀다. 이런 사람에겐 목돈이란 그야말로 재갈이며 멍에에 지나지 않는다. 김유성은 총각이며 하숙생활을 하는 출판사 편집 사원이다. 그는 반 년 전 겨우 조그만 출판사에 취직을 했는데 그전까지 무려 삼 년 동안이나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놀고 지냈다. 하숙비는 시골 부모님께서 근근히 부쳐왔지만 그는 몹시 쪼들리는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머니는 언제나 비어 있었고 커피 한 잔 값, 담배 한 대 값도 없어서 어떤 때는 커피나 담배를 얻기 위해 멀리 친구를 찾아나선 경험도 여러 번 있었다. 취직이 되자, 다행히 그런 문제는 해결되었는데 이번에는 약간 색다른 걱정이 생겼다. 그의 회사에서는 고맙게도 그해 여름 바캉스 보너스를 지급했다. 이건 김유성이 처음 타 보는 보너스였다. 바캉스 보너스를 받은 동료 직원들은 벌써부터 바다 이야기로 꽃을 피우며 즐거워했는데 김유성 한 사람만은 거기에 끼여들지 않았다. 그는 수영도 할 줄 모를 뿐 아니라 바다를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바캉스 휴가 동안 그는 하숙방에서 책을 읽거나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자연히 바캉스 보너스가 그의 호주머니에 고스란히 남게 되었다. 그는 그 돈을 호주머니에 담고 살았다. 그는 은행 통장도 없었고 돈을 따로 둘 데도 맡길 데도 없었다. 김유성도 바로 목돈을 가지고 있으면 몹시 부담을 느끼고 신경을 쓰는 그런 인물이었다. 본래 목돈을 주머니속에 오래 지니고 있어본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바캉스 휴가가 끝나고 회사에 다시 출근을 했는데 교정을 보다가도 그는 문득 그 돈이 아직 자기 주머니에 고스란히 있는 걸 깨닫고는 깜짝 놀라곤 했다. 마치 독이 있는 벌레를 주머니에 넣고 있는 것처럼 그는 불안했다. 길을 걷다가도 돈이 아직 그대로 있는 걸 깨닫고는 그는 몹시 불안했다. 그런데 김유성이 언제까지 그런 불안에 시달릴 정도로 어리석은 친구는 아니었다. 그도 이미 어떤 궁리를 해뒀던 것이다. 그의 하숙집으로 가는 길목에는 이태리 수입가구를 판매하는 고급 가구점이 있었다. 그 가게는 눈부신 조명 아래 여러 종류의 수입가구들을 진열해 놓고 지나는 행인들의 눈길을 현혹하고 있었다. 구경이야 공짜로 더구나 호화로운 가구들이 잘 배열되어 있는 광경을 매일 보고 다니는 건 건강에 나쁠 게 없으므로 김유성은 그앞을 지날 때마다 가게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곤 했었다. 어느날 술을 약간 마시고 퇴근할 때는 용기를 내어 그 가게 안으로 들어가 이것저것 값을 묻기도 하고 비싼 소파에 몸소 앉아 보기도 했다. 그가 앉아본 소파의 가격은 그의 일 년 월급의 총액보다 더 비싼 것이어서 그는 내심 겁을 먹기도 했다. 그런데 그 가게에서 그의 능력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이 딱 하나 있었다. 옷걸이였다. 양복 한벌을 걸어놓을 수 있게 만든 그 옷걸이는 앙증맞고 맵시있게 만든 물건이었다. 옷걸이를 보자, 그는 몹시 반가왔다. 왜냐하면 그건 그의 능력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 옷걸이 한개 값도 그의 한달 월급에 육박하는 고가품이긴 했지만. 그날은 그냥 가격만 확인하고 가게에서 나왔다. 다음날 가세 앞을 지나면서 그는 바캉스 보너스로 옷걸이를 사버릴까 하는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니 옷걸이가 자기에게 당장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다. 게다가 값도 너무 비싸다. 그는 유혹을 참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보너스를 다른 데 쓸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가구점 앞을 지날 때마다 옷걸이를 유심히 쳐다봤고 그게 그 가게에서 자기가 구입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란 이유로 옷걸이에 친밀감을 느꼈다. 그는 자기는 결국 옷걸이를 사고야 말 거라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돈은 그대로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그는 그걸 깨달을 때마다 피부병이라도 옮을 것 같은 께름직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아직 돈을 지니고 불쾌감을 견디고 있는 자기에게 혐오감까지 느꼈다. 왜 하필이면 자기의 한달 월급과 맞먹는 비싼 옷걸이를 사야 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 물건이 그 가게에서 자기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옷걸이야 변하거나 썩는 물건도 아니지 않은가? 돈을 갖고 있기보다는 그냥 옷걸이를 갖고 있는 게 맘이 편할 것 같았던 것이다. 무려 일 주일 동안이나 그 문제로 고민하던 김유성은 드디어 옷걸이를 사고 말았다. 그는 자랑스럽게 옷걸이를 들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돈이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고 생각하자, 나를 듯이 후련하고 기분이 좋았다. 더구나 돈이 그냥 나가준 게 아니고 앙증맞고 맵시있게 생긴 옷걸이 하나를 선사하고 나가준 게 아닌가? 그러니 기분이 유쾌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김유성은 옷걸이를 썰렁한 하숙방에 모셔놓고 아침저녁으로 인사하듯 혹은 문안을 드리듯 옷걸이를 쳐다봤다. 옷걸이는 혼자 서 있었다. 왜냐하면 김유성에겐 고급 옷걸이에 걸어놓을 고급 양복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낡은 양복을 옷걸이에 걸어 놓고 보니 옷걸이의 품격이 땅에 떨어졌다. 그래서 그는 옷걸이에 걸맞는 양복을 마련할 때까지 옷걸이를 비워두기로 했다. 한달쯤 지났을 때 시골 아버지가 서울 나들이를 오셨다. 아들의 하숙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아버지께서 비어 있는 옷걸이를 보고 말했다. "얘야, 이게 뭐하는 물건이냐?" "옷걸이죠 뭐." 아버지에게 차마 그 물건이 한달 월금만큼이나 비싼 물건이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마침 잘 됐다는 듯 말했다. "너 쓰지 않을 거면 내가 가지고 가겠다. 논에 허수아비 만들때 쓰면 제격이겠어." 김유성은 말을 못하고 벙어리처럼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전혀 터무니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7. 설렁탕과 피아노 구청에 볼 일이 있어서 그곳을 들렀다가 나오는데 나는 갑자기 배가 고팠다. 그러고 보니 이미 점심 때가 지난 시간이었다. 나는 대개 늦잠을 자고 오전 열한 시에나 일어나는데 그때는 입맛이 없어서 식빵 두어 조각으로 아침 겸 점심을 때우곤 했다. 집에 종일 있을 때는 저녁식사를 할 때까지 이것저것 간식을 먹기 때문에 허기를 안 느끼고 버틸 수가 있는데 어쩌다 바깥에 나오게 되면 금방 허기가 엄습해온다. 바깥에 나올 때는 움직이기 때문에 그만큼 소화가 잘 되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나는 구청 앞 거리에서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을 찾아 보았다. 그러다가 붓글씨로 '설렁탕'이라고 깨끗하게 쓴 조그만 간판을 발견하고 그 집으로 들어갔다. 그 식당은 큰길에서 약간 골목으로 들어가는 곳에 있었는데 간판에 비해서는 내부가 꽤 널찍하고 쾌적한 분위기를 지닌 식당이었다. 때가 지났기 때문인지 홀에는 손님이 한 사람도 없고 마흔살 안팎으로 보이는 여인 둘이 식탁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들은 내가 들어가자, 깜짝 놀랐다는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설렁탕 한 그릇을 시켜놓고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신문을 펼쳤다. 한 여자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아 냅킨을 접고 있었고 한 여자는 주방으로 가서 주문을 전하고 그리고 내 식탁 위에 몇 가지 반찬 그릇을 옮겨 놓고 있었다. 반찬 그릇을 옮겨 놓고 나자, 그 여자도 다시 조금 전 앉아 있던 자리에 가서 앉더니 다른 여인처럼 냅킨을 접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엔 처음부터 냅킨을 접던 여인은 주인 여자 같았고, 내 식탁 위에 반찬 그릇을 옮겨 놓던 여인은 종업원이거나 아니면 일을 돕고 있는 먼 친척쯤 되어 보였다. 물론 친척이라 하더라도 주인이 아닌 이상 그 자리에서는 종업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여인들은 마주 앉게 되자,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줌마, 그래 정민이는 미국 보낼 거예요?" 종업원으로 보이는 여인이 물었다. "아이구, 나 그 일만 생각하면 골치 아파 죽겠다구. 지네 아빠는 계집애를 미국 보내 뭘 하냐고 반대지, 정민이는 재수하는 건 싫다고 그러지. 중간에서 나만 마른다니까 글쎄. 이럴 줄 알았으면 피아노를 안 시키는 건데 괜히 시켰다구." 주인 여자가 한숨을 쉬어가며 말했다. "아이구, 피아노가 얼마나 좋은 건데 안 시킬 걸 그랬다니 무슨 말이유? 정민이 뜻대로 미국 보내요. 보내라구요, 글쎄." "보내는 거야 좋지. 그런데 돈이 얼만데? 게다가 여기서도 대학에 떨어진 애가 미국 가면 뭘 해? 지네 아빠 말은 그거야. 그 말도 일리가 있지. 희망이 뚜렷하다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은데 내가 지금 설렁탕 팔아가지고 그 애 미국에 보내게 됐어? 그 동안에 들어간 돈만 해도 생각하면 끔찍한 걸. 영미 엄마는 겪어보지 않아 내 심정 모른다구." 주인 여자는 다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미 설렁탕 그릇을 거의 비워가고 있었다. 나는 식사를 하면서도 그들의 대화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들었다. 물론 그녀들의 이야기 내용이 뭔지도 나는 잘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주인 아주머니의 일이 내겐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특히 다음의 대사가 내 마음에 절실하게 와서 닿았다. 그만큼 실감을 느꼈다는 말이다. '내가 지금 설렁탕 팔아가지고 그 애를 미국에 보내게 됐어?' 이 말을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는 문득 '설렁탕과 피아노'란 말이 떠올랐다. 물론 이 두개의 말 사이에 특별한 관계는 없다. 하지만 주인 여자는 설렁탕을 팔아가지고 딸에게는 피아노를 가르쳐왔다. 지금은 그 돈으로 미국까지 보낼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설렁탕은 피아노와 특별한 관련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설렁탕과 피아노의 그 특별한 관계에 문제가 발생했다. 정민이란 아이가 만약 피아노를 잘 쳤고 대학에도 들어갔다면 그 특별한 관계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정민이가 대학 시험에 떨어졌고 자칫하면 여기서 피아노를 그만두게 될 수도 있다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만약 정민이가 피아노를 그만두게 되면 피아노를 위해 바쳐진 설렁탕의 공적은 완전히 허사가 되는 것이다. 나는 그 점이 너무 딱하게 느껴져 두 여인의 대화에 끼어 들었다. "아주머니, 따님이 피아노를 잘 치는데 대학 시험에 떨어졌나요?" 내가 주인 여자에게 물었을 때 그녀는 내 질문의 의도가 뭔지 몰라 잠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다시 물었다. "피아노는 잘 치는데 혹시 다른 이유로 시험에 떨어졌느냐고 물은 겁니다." "아아뇨, 그랬다면 차라리 기분이나 좋지요. 무슨 수라도 써서 미국도 보낼 거구요. 피아노 실력이 신통치 않아서 문제라구요." "만약 피아노를 잘 치는데 그렇게 되었다면 미국에 보내는 것도 좋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여기서 재수를 시켜 좀 떨어지는 대학이라도 보내세요. 만약 재주가 있는데 돈이 문제라면 제가 좋은 방법을 아르켜 드릴까 했는데." 나의 이 말에 관심을 보인 건 주인 여자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종업원 아주머니였다. 지금껏 남의 얘기 듣듯 잠자코 앉아 있던 그녀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저씨, 그 좋은 방법이 뭡니까? 저 좀 가르쳐주실 수 없나요?" 나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그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물었다. "아주머니도 음악하는 애가 있나요?" "있어요. 딸이 고등학교 3학년인데 그 애가 피아노를 쳐요. 학교에서는 교내 콩쿠르에서 일등도 여러 번 했구요. 모두들 그 애가 피아노를 전공하면 틀림없이 성공할 거라고들 말해요." "피아노를 누구에게서 배웠나요?" "어릴 땐 동네 학원엘 보냈죠. 지금은 학교에서 틈틈이 음악 선생님 지도를 받아요. 집엔 피아노가 없지만 앞으로 사줄 생각인걸요." 약간 초라한 옷차림ㅇㄹ 한 그 여인의 표정은 누구보다 진지했다. 그러나 그 얼굴은 딸에게 음악을 가르치기엔 너무 가난하게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주머니, 내가 말하는 방법이란 유럽 쪽에는 재능만 인정되면 외국인이라도 돈을 받지 않고 배우게 하는 제도가 있다는 걸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방법도 숙식이나 왕복 여비는 자신이 부담해야죠." "그게 얼마나 될까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고, 꼭 필요하시다면 제가 알아다 드리죠." 종업원 아주머니는 침을 삼키면서 진지한 눈초리로 나를 응시했다. 그때 다른 손님이 들어와서 그녀는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주방 쪽으로 간 사이에 내가 주인에게 물었다. "저 아주머니 딸이 피아노를 잘 치나 보죠?" 그러자, 주인 여자는 못마땅한 듯 입을 비틀었다. "잘 하면 뭘 해요? 돈이 있어야지. 한번도 돈을 들여 제대로 배우지도 않은 걸 가지고 허풍을 떠는 거라구요. 피아노가 뭐 강아지 이름인가요?" "그야 그렇지요. 아주머니 남편은 뭘 하는데요?" "없어요. 헤어졌죠. 수입이라군 우리 식당에서 가져가는 것밖에 없지요. 그런데 피아노는 무슨 피아노를 하겠어요? 괜한 욕심이죠." 그러고 보니 이 식당의 설렁탕은 피아노와 이중관계를 맺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두 경우가 모두 결실을 얻기가 힘든 경우였다. 하나는 재능 부족이고 하나는 돈 부족이었다. 그렇다. 피아노를 하자면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한다. 나는 종업원 여인이 자리에 돌아오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진실을 말하자니 그건 그녀의 유일한 희망에 찬물을 끼얹는 격일 테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전혀 의미없는 행동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돌아오기 전 서둘러 식당에서 나와버렸다. 8. 숨바꼭질 같은 장소라도 어떤 사람에겐 지옥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겐 낙원이 될 수도 있다. 최근 나는 그런 실례를 아주 분명하게 내 눈으로 확인했었다. 그러니 말을 바꾸어보면 누구에겐 가난이 즐거움일 수도 있고 부귀가 한낱 고통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주 빤한 이야기를 왜 내개 새삼스럽게 여기 늘어놓느냐 하면 삶이란 때에 따라서 다소 역경이 있더라도 낙천적인 태도가 그만큼 이롭고 건강에도 좋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다. 내 친구 가운데 모 재벌 기업이 이사가 되어 아주 분주하게 생활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기업에 종사하고 있고 나는 출판사 아니면 바둑집이나 드나드는 생활을 하고 있어서 우리가 비록 남달리 절친하다고 해도 서로 만날 기회가 그만큼 적은 것이다. 이따금 그와 나 사이에는 전화로 안부나 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저녁 때 그 친구가 갑자기 나를 좀 만나고 싶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그런데 그 만나자는 장소가 전혀 상상밖이었다. "자네가 이곳을 찾아올 수 있을지 몰라. 약수동 네거리에서 약국 골목으로 들어오면 커다란 소나무가 보이네. 거기서 오 분쯤 비탈길을 올라오면 구멍가게가 하나 있지. 그 가게 뒷집이 빨간 벽돌집이야. 그 벽돌집 바로 옆집, 파란 대문이 있는 집을 찾아오면 되는 거야. 자네 찾을 수 있겠나?" "아니, 홍준이 자네 지금 나하고 숨바꼭질 하자는 건가? 자네가 뭣 때문에 그런데 가 있는지 모르지만 난 가고 싶지 않네. 나를 꼭 만나야 한다면 자네가 이쪽으로 나오게나." 나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이 녀석은 자주 가는 단골 술집도 있고 또 세상에서 흔히 일류 아파트라고 하는 곳에 집도 있다. 이를테면 동산아파트 7동 709호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찾기가 간명하고 쉬운가? 집에서 만나는 게 거추장스럽다면 자기 집 주변에 있는 그 많은 멋장이 카페나 살롱에서 만나면 그만이다. 그런데 명색이 대기업 이사란 녀석이 구멍가게 뒷집의 옆집에서 만나자니 대체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내 기분을 홍준이 눈치채고 재빨리 말했다. "자네가 이쪽에 나타나면 말할려고 했는데 할 수 없군. 사실은 나 오늘부터 거처를 이곳으로 정했네. 그래서 자네와 단둘이서만 오붓하게 입주식을 하려고 자네에게만 살며시 연락을 하는 거야. 왜 이런 곳에 거처를 정했냐구? 그건 이따 말하기로 하세. 아무튼 자네가 오지 않으면 자넬 친구로 생각하지 않을 걸세." 녀석의 협박에 나는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그 집 위치를 녀석에게 주워섬기게 한 다음 길을 나섰다. 약수동의 언덕 비탈에 있는 그 집을 찾는데 나는 30분이나 시간을 썼다. 홍준은 거기서 겨우 방을 하나 빌려 쓰는 처지였다. 방에는 세간이나 옷장 같은 것이 전혀 없고 어디서 방금 빌린 듯한 모포 한 장, 책 몇 권, 그리고 물주전자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홍준은 그 방을 월세로 빌렸다고 말했다.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이 갑자기 마누라와 헤어지고 갈 곳이 없어서 이 비탈진 언덕의 셋방으로 기어들어왔단 말일까? 요즘엔 여권이 신장되어 이혼했다 하면 남편들이 집에서 쫓겨나는 게 다반사다. 그런식으로 하루 아침에 거리의 부랑자로 전락한 가엾은 남편들을 나는 많이 본 바가 있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기업 이사께서 갈 데가 없어서 이 골방 속으로 기어들었을까? 아니면 이 녀석에게 어떤 피치못할 사연이라도 생긴 것일까? "어떻게 된거야? 곧 대기업 사장이 될 사람이 이 무슨 청승인가? 자네 마누라와 아이들은 어디 갔어?" 홍준은 그러나 웃지도 찌푸리지도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그야 가족들은 집에서 살고 있지. 나만 잠시 여기 와 있는 거라구. 자네 이 동네에 오니까 무슨 생각이 안 나나?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뭔가 느낄 법도 한데." "느끼는 거야 있구말구. 빈궁이 뭔가를 느끼게 되지. 저 벽에 곰팡이를 보게나. 빗물이 흘러들어온 저 싯누런 줄기를 보라구. 정말 저런 풍경도 오랫만에 보는군. 난 이런 골목과 마을을 잘 알고 있어. 구태여 자네가 보여주지 않아도 말야." "자넨 틀렸네. 여긴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어머니와 함께 살던 동네야. 자네도 아마 이곳에 몇 번 왔었지. 기억 안 나나?" 그제서야 나는 이 마을에 찾아왔었던 20년 전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 홍준은 분명 이 마을의 어딘가에 살고 있었다. 물론 지금 그가 방을 얻은 집은 그가 살던 집은 아니었다. "맞았어. 이곳에서 자네 어머님과 자네가 살았었지. 그럼 그 시절이 그리워서 다시 돌아온 셈인가?" "그것도 하나의 이유지. 여기 와서 이방에 누워 있으니까 왠지 마음이 평온해지는 걸 느껴. 고향의 잔디에 누운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더 큰 이유가 있네. 최근 나는 내 생활이 없어졌다네. 회사에서 퇴근하면 집에 와서는 내 생활을 가져야 하는데 주위에서 나를 가만 두지를 않네. 퇴근 후에도 이 술집 저 술집을 전전하며 사교 생활을 해야만 했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마디로 거절할 성질의 자리도 아니라구. 어떤 때는 어렵게 피해서 집에까지 오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따르릉 하는 전화벨이 울리네. 나를 불러내는 전화지. 그렇다고 집에 돌아온 걸 빤히 아는데 없다고 거짓말 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더구나 아내는 거짓말은 질색이야. 그래서 언제부턴가 나 혼자 숨어있을 비밀의 장소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지. 책도 좀 읽을 수 있고 생각도 좀 할 수 있는 장소, 그리고 아무도 알 수 없는 장소. 설마 내가 이런 곳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할 테니까. 이제부터는 꼭 필요한 모임에나 나가고 되도록 이 방으로 와서 책이나 읽고 내 인생의 전후좌우에 관해서도 좀 생각하고 싶어. 그러기엔 이 방이 아주 제격이네. 나 자신의 과거가 여기 있으니까 최소한 여기 있으면 과거를 잊어먹는 올챙이는 면할 것 아닌가?" "듣고 보니 그럴싸하군. 자네에게 그런 멋진 두뇌가 있다는건 미처 몰랐었네. 나야말로 이 동네에 방을 하나 얻고 싶군. 실은 나도 술 마시자고 불러대는 통에 일을 할 수가 없다구. 그런데 우리집 마님도 거짓말에 소질이 없단 말야. 그래서 나도 어디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지. 그렇지만 여기 매일 와서 있을 수는 없지 않을까?" "그야 물론이지. 불편해서 매일 와 있는 건 곤란해. 식생활도 그렇구. 꼭 필요할 때 이 방을 이용하는 거야. 아무도 모르게." 나는 홍준이 매우 흐뭇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게 부러웠다. 그의--아무도 모르게--란 그 말이 내 마음에는 꼭 들어왔던 것이다. 9. 특별시민 십 년 전만 해도 서울 거리에서 고향 친구를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마치 거친 바다에서 고독한 향해를 하다가 다른 배를 만났을 때처럼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만큼 그렇게 반가왔다. 그런데 요즘엔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어쩌다가 거리에서 고향 친구나 고향 사람을 만날 경우에도 특별히 가까왔던 사이가 아니라면 살며시 피하고 싶은 생각마저 나는 것이다. 그건 물론 나의 잘못이 아니다. 이제는 서울 거리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는 일이 그다지 드문 일도 아닐 뿐더러 어찌보면 일상의 다반사가 되어 버린 감이 없지 않다. 서울에는 고향 사람들이 그처럼 많이 살고 있다. 최근에 나는 고향의 국민학교 동창회 모임에 처음 나갔다가 서울에 왜 인구가 이렇게 많은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서울의 인구는 세계의 내노라 하는 도시 가운데서도 세번째라고 하던가? 내 기억이 정확한지 어떤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건 매우 가상한 일이다. 그런데 서울을 그렇게 세계적인 도시고 만든 사람들이 바로 고향 사람들인 것이다. 좀 더 과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지방의 보통시민들이 특별시민의 되기 위하여 한결같이 서울로 모여들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그런 현상에 한가닥 공포심까지 느끼고 있었다. 만약 우리나라 사람들더러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거주지를 자유로 선택하라면 아마 국민 전체가 서울을 선택하지 않을까? 그 동창회에 나갔을 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내 고향은 먼 시골의 조그만 소읍이다. 그 작은 소읍의 국민학교 출신들이 거의 반수나 서울 시민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니 내가 거리에서 고향 사람들을 다반사로 만난다는 사실이 조금도 무리가 아니었다. 만약 서울이란 도시로 우리나라 사람이 모두 모여든다면 대체 이 도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건 물론 정부나 시 당국이 걱정할 일이지, 내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정부나 시 당국에서 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것 같지는 않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지방의 도시는 물론 소읍까지 골고루 발전하고 잇으며 문화라던가 교육 그리고 산업 등의 발전이 골고루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오직 서울만 국제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니 지방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드는 걸 탓할 수만도 없는 것이다. 그날 나는 시내에서 누구를 만나고 집으로 오려고 택시 정거장에 서 있었다. 그런데 문득 앞을 보니 내 앞쪽에 어딘지 낯이 익은 사람이 서 있었다. 그런데 그 쪽에서 곧 나를 알아봤다. "이봐, 자네 수장이 아닌가?" 자세히 보니 그는 뜻밖에도 김도일이었다. 내가 김도일을 못 알아보다니, 도일은 어린 시절 나와 가장 가까왔던 친구였던 것이다. 내가 그를 빨리 알아보지 못한 건 그가 이 서울 거리에 서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일이, 자네가 웬일이야? 서울에는 언제 왔지?" "음, 두어 달 되었네. 정말 이런 데서 만날 줄은 몰랐는걸." "두어 달이 되었다구? 그렇다면 내게 전화라도 하지 않고." 내 말에 도일은 멋적은 듯 머리를 만졌다. 우리는 가까운 다방으로 갔다. 도일이 그때서야 자기가 서울에 온 내역을 이야기 했다. "사실은 나 서울시민이 되었네. 애들이 크니까 교육 문제도 있고 해서 이번에 시골 재산을 모두 정리해서 올라왔어." 그의 이 말에 나는 적지않게 실망했다. 내 입에서 무심코 이런 말이 나왔다. "아니, 도일이 자네마저." 이건 마치 도일이 나를 크게 배반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나는 고향에는 도일이란 친구가 고목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 늘 위안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고향에 내가 갈 때에는 나는 언제라도 도일을 먼저 찾았다. 그는 전기사업으로 재산을 얼마간 모았으며 고향에서는 불우이웃돕기나 야학 같은 사업을 해서 고향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었다. 고향을 찾는 친구에게 술을 사는 것도 도일이 즐겨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젠 고향 가면 누구를 만나나? 물론 나는 이따위 이기적 생각만으로 도일의 상경을 불평하지 않았다. 김도일까지 서울시민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드디어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서울로 모여드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감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애들이 주장하고 나 자신도 시골에 남아 있는 게 어쩐지 못난 인간으로 치부되는 것만 같아 결단을 내렸어. 물론 많이 망설이기도 했었지." 내 기분을 알아차린 듯 도일이 변명까지 늘어놓았다. 다른 때 같으면 대폿집에라도 가서 서로 회포를 풀었을 것이다. 그날은 웬일인지 그냥 헤어지고 싶었다. 그래서 다음에 서로 연락하자고 약속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일이 있고 다시 두어 달이 지나갔다. 하루는 도일이 갑자기 동네 앞 다방으로 찾아왔다. 도일은 어쩐지 무척 초라한 모습이었다. 표정은 우울했다. 고향에 가서 만나는 도일은 늘 호탕하고 당당했는데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사실은 나 다시 내려가기로 했네." 이게 도일의 첫마디였다. 나는 얼떨떨했다. 도일이 차분하게 다시 말했다. "몇 달 동안 특별시민 경험을 한 걸로 충분한 것 같아 내려가기로 했다구. 첫째 나는 내가 여기서 할일이 없다는 걸 깨달았네. 고향에서는 그래도 난 유지였어. 너무 바빠서 마누라 얼굴 볼 시간도 없었다구. 그런데 서울 온 뒤부터는 할일이 없어서 매일 복덕방 근처를 어슬렁거렸지 뭔가? 게다가 누가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고향에서는 이 김도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 아이들도 이젠 내가 돌아가는 걸 반대하지 않아. 제 눈으로 특별시민이 된 애비가 얼마나 초라하다는 걸 봤거든." "아이들은 어떻게 하고?" "학교에 다니는 애들이야 다 자랐으니까 자취를 하도록 방을 얻어주었지. 그리고 우리 내외만 내려가서 다시 읍사람이 되기로 했네. 그래서 자네에게 작별 인사나 하려고 온 걸세." "자네가 그런 결정을 했다니까 말이지만 정말 잘 생각했어. 자네는 고향에 있어야 자네다운 거야. 이런 도시에선 자네의 소박하고 너그러운 성품이 죽고 말아. 그동안 서울에 온 친구를 내가 너무 박대해서 미안하네." 나는 정말 도일에게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서울에 있는 반 년동안 나는 그에게 술 한 잔을 안 샀던 것이다. 10. 이종 사촌 조카의 결혼식 이 도시의 풍속 가운데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풍속을 들라면 열 손가락 가지고는 헤아릴 수도 없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나를 가장 당혹시키는 것이 결혼식 풍습이다. 결혼식 풍습이야말로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다. 아마 이건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연극 중에서도 아주 뛰어난 연극이고, 그중에서도 아주 빼어난 희극에 속할 것이다. 나는 요즘의 연극을 별로 자주 구경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짐작컨대 이 도시에서 공연되는 가장 우수한 연극을 구경하려면 극장이나 무슨 카페에 갈 것이 아니라 결혼식장으로 달려가는 것이 지름길일 것이다. 물론 가장 우수한 연극인 만큼 입장료는 엄청나게 비싸다는 걸 각오해야 한다. 그렇게 입장료가 턱없이 비싼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머리가 터지도록 앞다투어 결혼식장으로 몰려드는 걸까? 정말 이른바 전문 예식장이라는 데엘 가보면 그곳에서 한날 한시에 이십여 쌍의 결혼 공연이 벌어지건만 어느 곳이나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가 없는 만원사태를 자랑한다. 손님이 없어서 파리를 날리고 있는 일반 연극 공연장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이 이미 이 결혼식 공연의 연극적 우수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걸 알 수가 있다. 아니다.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사람들은 인연에 약하다는 말이 있다. 또 다정다감해서 특별한 인연이 없어도 남의 경사를 그냥 모른 척 지나치지는 못한다. 결혼식장에는 대체로 가까운 친척, 먼 친척, 그리고 알고 지내는 친지들이 모인다. 그렇지만 친척이라고 해도 일 년 열두 달, 아니 십 년 이십 년씩 전화 한 번, 안부 엽서 한 번 교환하지 않던 사람들은 생판 남이나 매일반이다. 결혼식장에는 그런 친척들로 만원을 이룬다. 주로 얼굴도 모르는 친척들 말이다. 그런 친척들이 던지는 축하의 말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 년 열두 달 살았는지 죽었는지, 밥을 굶는지 먹는지도 모르고 지내는 주제에 갑자기 결혼식장에 나타나서 축하 어쩌고 하는 건 완전한 거짓에 불과하다. 사람들도 그걸 알고 있다. 결혼식장에 나타나서 교묘한 미소를 짓고 있으나 그 미소 역시 거짓에 불과하다. 그건 모두 연극 배우의 연기에 해당하는 행동이다. 그들은 무대에 나온 배우답게 예외없이 자기가 갖고 있는 최고의 의상으로 몸을 감추고 있다. 이쯤 되면 왜 사람들이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고 결혼식 공연에 머리가 깨지도록 앞다투어 뛰어들어오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그렇다. 결혼식 공연은 관객이 완전한 주역으로 참여하는 연극이다. 손님들은 자기들의 지루하고 따분하고 각박하기까지 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그 공연의 한 배역을 맡음으로써 희극적 기분을 만끽하는 것이다. 이틀 전에 나도 실제로 그런 공연에 참가한 일이 있었다. 초청의 전화는 결혼식이 있기 사흘 전에, 한밤중에 내가 남몰래 미군 방송의 심야 프로를 보고 있는데 걸려왔다. 그건 정말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걸려온 전화였다. "이봐! 자네가 김동일인가? 정말 목소리 한번 오랜만에 듣겠네." "예, 그렇습니다만, 실례지만 누구신지요?" "하하하하, 내 목소리도 벌써 잊었나? 예끼! 이 사람아. 이종 사촌 형의 목소리도 잊었다면 자네같이 무정한 사람도 없네. 은행에 있던 이종 사촌 형, 나 모르겠어?" "저 이종 사촌 형이라면…." "차암 우수운 사람이군, 자네. 나는 그래도 자네를 매일같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인데, 아 자네는 내 목소리도 몰라봐? 하긴 너무 얼굴 본 지가 오래 되어 그도 그렇겠군.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우리가 서로 얼굴이나 보면 어떨까 해서 내가 전화를 한 걸세. 까딱 하면 얼굴마저 잊어먹겠네. 안 그런가? 동생." "그렇습니다. 언제 뵐까요?" "그게 아니고 이번에 내 큰아이가 결혼하네. 계집아이라구. 영등포 행복 예식장 특실 3호에서 이번 토요일 오후 2시야. 적으라구. 적었나? 다시 한번 불러줄까? 영등포 로타리 행복 예식장 특실3호에서 토요일 오후 2시 정각이야. 적었나?" "네. 적었습니다." "얼굴이나 봐야 되지 않겠어? 고향에서는 자네와 내가 친형제보다도 더 다정하게 지냈는데, 참 세상 무심하군. 나는 그래도 자네를 하루도 안 잊었는데 자넨 이 이종 사촌 형을 깡그리 잊어먹은 모양이야. 자네 안되겠는걸."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이종 사촌 형님." "그럼 거긴 오는 거지?" "물론 가야지요. 가구말구요." "좋아. 그날 자네 얼굴이나 보세." 이종 사촌 형의 전화는 여기서 끝이 났다. 전화를 끝내놓고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런 이종 사촌 형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 건 아니다. 그는 사실을 말했지만 그 사실은 이미 이 도시에서는 지워지고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윽고 토요일 오후 2시에 나는 거금 3만원을 하얀 봉투에 담아 가지고 영등포 로타리 행복 예식장 특실 3호로 갔다. 예상했던 것처럼 이 공연도 초만원이었다. 접수구에 흰 봉투를 내는 데도 나는 3분 가량이나 차례를 기다려야만 했다. 시장에 발 디딜 틈도 없었다. 가까스로 사람 틈을 비집고 들어가 단상이 보이는 지점에 자리를 잡고 섰다. 식은 이미 진행 중이었다. 주례가 주례사를 하고 있었다. 단상 오른쪽에 무지막지하게 큰 화환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 화환에 국회의원 아무개라고 쓴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나는 오직 이종 사촌 형의 얼굴을 보는 것이 목적이었다. 어차피 그곳에 와 있는 사람들 가운데 내가 아는 얼굴이 없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이윽고 결혼식이 다 끝나고 신랑의 아버지로 보이는 인물이 왼쪽 윗포켓에 꽃을 꽂고 문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의 옆에는 키가 크고 허우대가 좋은 중년이 함께 걸어나왔다. 사람들 속에서 그 사내를 가리키며 속삭이는 말이 들렸다. "저분이 국회의원 아무개란 사람이야." "전보다 살이 많이 쪘군. 몰라보겠는걸." 그러나 나는 그 선량보다는 그 옆에서 걸어나오는 이종 사촌 형에 관심이 있었다. 나는 단숨에 이종 사촌 형 앞으로 달려가서 말했다. "축하합니다. 기쁘시겠군요." 몸집이 좀 비대한 이종 사촌 형은 청각이 별로 안 좋은지 못 들은 척했다. 나는 다시 인사를 시도했다. "축하합니다. 기쁘……."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종 형이 내 얼굴을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누구시라고 그랬죠?" "저어, 대치동에 사는 김 아무개라고…." 나는 얼떨결에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이종 형이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대치동에 김씨, 하여튼 감사합니다. 난 좀 바빠서……." 이종 형은 그런 뒤에, 앞서 가는 국회의원을 쫓아 종종걸음으로 뛰어갔다. 11. 고독을 위한 휴가 "여보, 당신 그러지 말고 병원에 한번 가봐요. 가봐야 원인을 알게 아니예요." 출근하는 남편을 붙잡고 아내가 걱정이 되어 한마디 했다. 아내로서 걱정이 되는 건 너무 당연했다. 남편의 안색이 요즘 눈에 띄게 핼쓱해지고 있으며 남편 자신도 왠지 무기력하고 피곤해서 일손이 안 잡힌다고 하지 않는가? "알았어. 나도 오늘은 그래볼 생각을 하고 있었어 퇴근을 좀 빨리하고 병원에 가볼게." 김득주 씨는 아내에게 말하고 집을 나섰다. 그는 무역 회사 부장인데 국내 자재 담당으로 실상 그다지 바쁜 처지는 아니다. 업무가 많기는 하나 어지간한 일은 유능한 부하 직원들이 잘들 알아서 처리해주니까 부장은 결재나 하고 지시나 내리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뭣 때문에 얼굴이 핼쓱해지고 일손이 안 잡힐 정도로 무기력해졌는가? 그런 현상은 오랫동안 과로에 시달린 사람에게 발생하는 증상이 아닌가? 그점이 사실은 김득주 씨의 문제였다. 회사에서는 비교적 한가하고 편하다고 했지만 김득주 씨는 이 세상 누구보다 분주하고 바쁜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 말을 빌면 그는 가족을 위해서는 일 주일에 한 시간도 제공하지 못하는 위인이며 그만큼 다른 일로 시간에 쫓기로 있는 것이다. 회사 일로는 결코 그렇지도 않은데 그럼 이 사람이 그다지도 시간에 쫓기는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혹시 그는 불우이웃 돕기나 양로원 혹은 고아원 지원 같은 그야말로 갸륵하고 거룩한 자선사업 같은 데 시간을 아낌없이 바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도 않다면 혹시 무슨 민주화 운동 단체 같은 데 관계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단체에 관계를 한다면 그야 당연히 시간에 쫓길 것이다. 그러나 김득주 씨는 자선사업과도 민주화운동과도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문제가 더 심각한 것이다. 자, 이 문제는 다음에 또 거론키로 하고 우선 병원에 다녀온 이야기부터 하기로 하자. 왜냐하면 김득주 씨 본인도 그렇고 그의 아내 역시 이 문제가 가장 궁금한 사항이니까. 그날 김씨는 두 시간쯤 일찍 회사에서 나와 가지고 병원으로 가서 진찰을 받았다. 의사는 김득주 씨의 증상을 대충 듣고 나서 간검사, 소변검사 등 간단한 검사를 했다. 그런 뒤 김씨에게 말했다. "특별한 병세는 없고 단지 과로에서 오는 무기력증입니다. 너무 일로 자기를 학대했군요. 그렇지요?" 김득주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가 말했다. "과로가 직접적 원인이니까 한 일 주일쯤 집에서 푹 쉬세요. 다른 생각 마시고 집에서 잘 자고 잘 먹고 하면 일 주일 정도로 회복이 될 겁니다. 그러나 병세가 없다고 해서 내 말을 소홀하게 듣고 여전히 과로가 계속되면 그땐 정말 병이 생깁니다. 본인이 잘 알아서 하세요." 요컨대 일 주일 정도의 휴식은 반드시 취하라는 의사의 당부였다. 병원을 나오면서 김득주 씨는 혼자서만 아는 웃음을 빙긋이 웃었다. 그가 왜 과로에 지쳤는지 의사도 모르지 않는가? 집에 돌아오자, 그는 아내에게 의사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아이구. 그나마 병이 없다니 천만다행이구료. 당신 그럼 어떻게 하실래요?" "어떻게 하긴. 의사 말대로 휴가라도 받아서 집에서 쉬어야지. 내일 당장 회사에 가서 휴가를 받아내겠어." "당신 지금 뭐라고 하셨죠?" "휴가 받아 집에서 쉬겠다고 그랬지." "글쎄 휴가를 내는 건 좋지만 집에서 쉰다는 건 말이 안되요. 당신 집에서 쉰다고 당신의 그 벌떼 같은 친구들이 가만 두겠어요? 얼씨구나 하고 아침부터 또 불러내고 찾아오고 난리법석일 텐데요. 그랬다간 치료는 고사하고 상태가 더 악화될 건 뻔하죠. 그러니까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그 동안에 숨어 있을 생각을 하세요. 당신 목숨 하나에 매달린 식구가 몇인가를 생각해서라도 이번만은 제 말대로 어디 비밀 장소에 가서 혼자 푹 쉬어야 한다구요." 김득주 씨는 아내 말에 잠자코 있었다. 아내 말이 옳기 때문이었다. 이쯤 되면 김득주 씨가 뭣 때문에 피로가 쌓였고 그동안 정신없이 시간에 쫓겼는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세상살이에는 친구가 너무 없고 외롭다는 것도 문제지만 반대로 친구가 너무 많고 그리고 너무 사교적인 성격도 문제인 것이다. 김득주 씨는 너그럽고 이해심이 많을 뿐 아니라 놀기 좋아하고 술 마시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자연히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좋고 친구들이 많이 따르기 마련이다. 친구뿐 아니라 회사 상사들이나 심지어 부하 직원들까지 김씨를 좋아하고 따랐다. 그는 약속 없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어떤 때는 약속이 겹쳐서 두 군데를 오락가락 할 때도 있었다. 친구들은 그가 빠지면 술맛이 안 난다고 투덜거렸다. 그는 어느 자리나 늘 중심에 앉아 있기 마련이고 화제를 끌어나가는 것도 김득주 씨였다. 그는 화술도 일품이었다. 오죽하면 그가 없이는 술맛도 안 난다고 불평하겠는가? 그는 당연한 얘기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정이 지나서 만취한 몸으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물론 아내는 불평이 많지만 벌떼처럼 찾아오는 친구들을 어찌 물리치겠는가. 그래서 김득주 씨는 피로가 쌓이고 급기야는 무기력 증세까지 보인 것이다. 아내는 이번 기회에 그를 친구들로부터 격리시키기로 굳게 작정을 하고 교외의 풍치좋은 호텔을 휴식 장소로 정했다. 그 장소를 물색한 것도 그의 아내였다. 김득주 씨는 아침 일찍 아내와 함께 교외의 호텔로 가서 잡아놓은 방으로 들어갔다. 아내가 그를 혼자 남겨두고 집으로 떠나면서 아이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여보, 여긴 아무도 모르는 곳이니까 꼼짝 말고 숨어 계세요. 필요한 건 집에 연락만 하면 제가 언제든 가져다 드릴게요. 여기서 또 친구를 불러들인다거나 하면 그땐 정말 당신 애들에게도 신용 잃는 줄 아세요." "내가 미쳤나? 여기까지 와서 사람을 부르게. 아이구, 나도 이젠 좀 고독하고 싶어. 다만 며칠이라도 혼자 고독하게 지내고 싶다고. 그러니 내 걱정은 할 것 없어." "잘 생각하셨어요. 당신은 정말 고독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예요." 아내는 만족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갔다. 김득주 씨는 혼자 방에서 신문도 읽고 이런저런 지난날 생각들을 하면서 오전을 보냈다. 몸이 왠지 근질근질하고 금방이라도 밖으로 뛰어나가고 싶었으나 그는 용케 한나절을 잘 참아냈다. 점심 때는 호텔 식당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얼른 방으로 돌아왔다. 밖에 오래 있다보면 누군가의 눈에 발각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오전을 그렇게, 정말 난생 처음으로 외롭게 지내고 보니 그런 시간도 견딜 만했고 또 편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는 이번 기회에 지나간 과거사를 한번 돌이켜보고 자기 인생의 의미, 즉 자기는 무얼 위해 살아왔고 앞으로는 무얼 위해 살 것인가 하는 인생의 의미를 꼼꼼히 따져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엔 지금이 안성맞춤의 기회였다. 그런데 저녁 때가 되어 그가 다시 호텔 식당으로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였다.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사람이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닌가? "아니, 자네 득주 아냐? 여긴 웬일인가?" 놀라서 쳐다봤더니 안경을 쓰고 있는 그 인물은 다름 아닌 대학 동창생 김이구였다. "응, 건강 상태가 좀 안 좋아 잠시 쉬러 왔네. 자넨 왠일이야?" "나, 난 지난번 회사 그만뒀지 않아. 조그만 사업을 시작할려고 하는데 골치 아파 여기로 들어왔지. 사업 구상도 할 겸 해서. 자네 그나저나 잘 만났네. 그렇지 않아도 자네 한번 연락할려고 했지. 대학동창들이 자넬 지금 얼마나 찾고 있는데 그래. 자네 몇 층인가?" "난 11층." "난 12층이야. 마침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다구. 여기서 득주 자넬 만난 걸 보면 난 역시 운이 좋은 놈이야. 이따 우리 라운지에서 한잔 하면서 이야기 좀 하자구. 아이구, 어젯밤엔 라운지에 가서 혼자 술을 마실려고 했더니 술맛이 나야 말이지. 다른 친구들도 부를까? 자네가 여기 있는 줄 알면 아마 당장 열 명은 뛰어올걸. 부를까 말까." 남의 속도 모르고 김이구는 득주를 만난 기쁨 때문에 신이 나서 떠들었다. 김득주 씨는 눈앞이 아득했다. 난 도대체 어떻게 된 인간이냐? 고독을 찾아 이곳까지 피해 왔는데 기껏 온다는 게 호구로 들어오다니, 그는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이 친구를 떨쳐버릴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았다. "관둬, 다른 친구까지 부를 건 없어. 그냥 우리끼리 조용히 한잔씩 하는 건 몰라도." 김득주 씨는 나약한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친구가 선선하게 대답했다. "그래, 맞아. 오늘은 우리끼리 오붓하게 마시고 내일 친구들을 부르세. 스무 놈쯤은 달려올 거야, 아마." 12. 허풍장이 이 세상에는 참 벼라별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세상이 재미있고 변화무쌍하게 돌아가는 것일 게다. 생각해보라. 하나같이 똑같은 얼굴, 똑같은 생각만 지닌 인물들로 이 세상이 가득차 있다면 도대체 세상살이에 무슨 변화와 조화가 있으며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얼굴도 생각도 같은 인간들만 모였다면 내일 일도 내년 일도 그야말로 뻔할 게 아닌가? 그러고 살고 싶은 의욕이 나겠는가? 그러니 우리가 흔히 누구에게 욕하거나 비아냥거릴 때 쓰는 말투로 '나 원 참 별놈 다 봤군. 뭐 저런 놈이 다 있나?'하고 말하는 것도 이제부터는 재고해봐야 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별놈이나 저런 놈이라고 욕하는 대상이야말로 정말 이 세상을 재미있게 변화무쌍하게 만드는 주역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나는 친척 아저씨로부터 자기 아들 취직부탁을 받았다. 사진을 전공했는데 군대도 다녀왔고 이제 장가들 나이가 되었는데 다만 하나 직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물론 남 취직시키는 게 전공도 아니고 더더구나 사진 기사라는 흔치 않은 직종에 누굴 취업시킨다는 건 막연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구름잡는 일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내게 아들 취직 부탁을 한 아저씬들 오죽이나 답답했으면 나를 붙잡았겠는가? 그나저나 나는 부탁을 받고도 별 대책없이 몇 달을 보냈다. 대책이 있을 턱이 없었다. 어저씨로부터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조심스럽게 재차 삼차 간곡한 당부의 말씀을 전해왔다. 나는 그때마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렇다고 딱 잘라 못한다고 거절할 처지도 아니었다. 그저 노력은 해보겠노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 달쯤 전 친구와 청진동 어느 대폿집에 들렀다가 우연히 대학 후배 한 사람을 만났다. 후배라고 하나 나는 사실 그의 이름도 직업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어느 동창회 모임에서 두어번 얼굴을 마주친 기억 밖에 없는 사이였다. 대폿집에서 나를 알아보고 먼저 달려온 것도 그 후배였다. 그는 인상이 좋은 데다 뭣보다 인사성이 밝았다. 인사성이 밝지 않다면 겨우 얼굴 정도 기억하는 선배를 보고 마치 죽었다가 살아돌아온 친형을 만나듯 그렇게 반갑게 달려오겠는가? "아이구, 선배님. 이거 웬일이십니까? 이런 데서 만나다니 정말 뜻밖입니다." 그는 대뜸 우리 자리에 끼어들었다. "저를 아십니까? 이름은 아마 모르실 겁니다." "그래. 얼굴은 기억하지만 이름은 모르겠군. 뭘 하고 지내지?" 후배는 부리나케 명함 한 장을 꺼내 내게 공손하게 내밀었다. 명함이야말로 바로 이런 때 쓰지 않고 언제 쓰느냐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명함을 봤다. 이정석. 유니온 대표. 평화 호텔 807호. 호텔은 사무실 대용으로 쓰는 듯했다. 유니온 기획이 뭘 하는 곳일까? 뭘 기획한다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이 일었다. "오, 이정석 씨. 이름도 자네 인상처럼 명쾌하고 쉽군. 유니온 기획은 뭘 하는 곳인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뭐랄까? 광고 업무도 취급하고 슬라이드 제작이나 화보 제작 같은 걸 하죠. 앞으로는 홍보 영화제작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거 재밌겠군. 그럼 여기서 사진 같은 것도 취급하겠네." "물론이죠. 사진하고 관계가 깊습니다." 나는 머리가 번쩍 깨었다. 비록 초면이나 매 한가지지만 까짓거 부탁 좀 하면 어떠랴? 선후배지간인데. "자네 사진 기사 한 사람 취직 좀 시켜줄 수 없을까? 꼭 자네 회사 아니라도 그 계통에 자넨 발이 넓을 것 아닌가? 내 친척 젊은인테 성실한 건 보장하지." 나는 이 대목을 말하면서 내 딴엔 태연할려고 무진 애썼다. 저쪽에서 한마디로 거절하면 그야말로 망신이었다. 그런데 이정석은 시원시원한 사나이였다. 나는 이만큼 인상도 밝고 이만큼 시원시원한 남자를 처음 봤다. 그는 전혀 부담을 안 느끼는 표정으로 대뜸 내게 말했다. "제게 보내십쇼. 이력서하고 자기 사진 작품 두어 장하고 들려서 말입니다. 제가 어떻게 주선해보죠." 이게 꿈인가 생신가. 운만 닿으면 이렇게 쉽게 해결되는 걸 가지고 괜히 고민했지 않나. 세상은 확실히 운이란 게 있다. 그럼, 있고말고. "아이구, 고맙네. 정말 고맙다구. 그 애 취직만 자네가 해결해 준다면 내가 그야말로 뻑적지근하게 한잔 사겠네. 아이구. 내가 이문제로 얼마나 고민했는지 아는가." "참 선배님도 뭘 그깐 일 가지고 그러실 것까지 있습니까. 술은 선배님께서 저를 찾아오시기만 하면 언제라도 제가 사죠. 정말입니다." 이렇게 되어 그날 나는 기분이 좋은 나머지 이정석과 밤이 이슥하도록 술을 함게 마셨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기가 무섭게 나는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내심으로 의기양양했으며 좀 뻐기고 싶었다. 보시오. 내 능력이 어떤가. 아저씨에게 통보를 한 뒤 일 주일쯤 지났을 때 아저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들이 이력서와 작품 두 장을 준비해가지고 평화 호텔 807호로 갔으나 여자 직원 한 사람만 자리를 지키고 있고 이정석은 코빼기 구경도 못했다는 것이었다. 아들이 일 주일째 평화 호텔 807호에 출근하다시피 했는데 역시 그 사람은 못 봤고 여직원이 짜증을 내는 눈치여서 더 나가라고 하기도 뭣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이렇게 말은 했으나 왠지 가슴이 서늘했다. 뇌물을 거래한 일도 아니고 이정석이 그 장소를 모면해야 할 부담이 내게 있을 턱이 없다. 문자 그대로 호의에서 나온 약속이고 그러니까 지켜질 확률이 큰 것이다. 나는 몸소 호텔로 나가보기로 했다. 그날 호텔 커피숍에서 나는 거의 종일 이정석을 기다렸다. 그 덕분에 저녁 일곱 시가 되어서야 가까스로 그를 만났다. 그런데 그가 호텔 커피숍에 나타났을 때 나는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하나가 아니고 대여섯이 넘는다는 걸 알았다. 여기저기서 이정석에게 자기 자리로 와달라고 손짓을 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배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저쪽 친구들을 보내놓고 오겠습니다." 내 옆으로 그가 와서 이 말만 던져놓고 다른 사람 쪽으로 가버리더니 그는 대여섯 좌석을 한 바퀴 순례하느라고 한 시간이나 소비한 뒤 겨우 내게 왔다. "아이구,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말했다. "말씀 안 하셔도 왜 오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제가 요즘 워낙 바빠서 그 일을 미처 손대지 못하고 있어요. 곧 시간이 나는 대로 추진을 할 생각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말씀해주십시오. 저는 또 가볼 데가 있어서 이만 실례를 해야겠는데 이거 미안해서 어쩝니까? 모처럼 나오셨는데." "바쁘면 할 수 없지.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가보게나." 그는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커피숍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혼자 멍하니 앉아 이정석이 방금 한 말 가운데 한가닥 희망적인 말을 반추해봤다. '곧 시간이 나면 추진할 생각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이 말은 내게 중요했다. 왜냐하면 아저씨에게 할 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카운터에서 이따금 나를 흘금흘끔 보고 있던 마담이 살며시 내 앞으로 왔다. 그녀는 당돌했다. "손님, 방금 나간 사람 믿지 말아요. 허풍장이도 보통 허풍장이가 아니니까요. 우리 다방에 그의 허풍을 믿고 오는 사람이 하루에도 십여 명은 된답니다. 딱해서 드리는 말슴이에요." "아니, 뭣 땜에 받는 것도 없이 아무나 붙들고 허풍을 떱니까? 뭐 돈이라도 받고 그러나요?" "돈이라도 받으면 실속이나 있게요. 자기 과시를 하는 거죠. 그리고 맘도 약해서 누가 부탁하면 거절 못합답니다. 능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이상한 사람이죠." "허허, 정말 별놈 다 봤군. 다 봤어. 이 바쁜 세상에 괜한 허풍으로 스스로도 시달리고 욕먹고 남도 괴롭히니 알 수 없는 인간이야." 나는 멋적은 마음을 달래며 자리에서 오랜만에 일어섰다. 13. 종착역 오랜만에 서랍을 정리하다보니 묵은 명함들이 백여 장이나 쏟아져 나왔다. 물론 이건 내 이름이 박힌 명함이 아니고 모두 오다가다 남들로부터 받은 명함들이다. 나는 명함이란 걸 원래 몸에 지녀본 역사가 없다. 그 때문인지 묵은 명함 뭉치를 볼 때마다 속으로 짜증을 낸다. 무슨 놈의 명함들을 이렇게 좋아하고 있는가? 하긴 일본과 중국과 한국만이 명함과 도장 문화의 나라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짜증이 나도 하나 하나 받아서 보관할 수밖에. 그런데 사실은 내가 짜증을 내는 건 명함 하나 때문은 아니다. 서랍 속에서 쏟아져 나온 명함 뭉치 속에는 유독 한 사람의 명함만 십여 장이나 있었다. 물론 명함의 내용이 같은 건 아니다. 같은거라면 아무리 건망증이 심한 사람이라도 열 번씩이나 똑같은 명함을 내밀겠는가. 한 사람이 열 장이나 되는 다른 명함을 내밀다니,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을까? 누구나 일단 놀랄 것이다. 그러나 이건 사실이며 내 친구 오달영이 바로 내게 열 장이나 되는 다른 명함들을 떠맡긴 장본인이다. 명함을 받아 보관하는 것도 하나의 고역이라면 고역이다. 그러니까 나는 내 서랍을 지저분하게 만든 오달영에게 유독 짜증을 내는 것이다. 종류가 다른 명함을 한 사람이 열 장이나 만들었다면 그가 열 종류의 직장을 전전했다는 얘기가 된다. 오달영은 실제로 그보다 더 많은 직장을 전전하면 전전했지, 적진 않을 것이다. 오달영은 머리가 좋고 행동이 아주 민첩했다. 대학에서는 수재로 통할 만큼 성적이 뛰어났다. 사회에 나와서 제일 먼저 그럴 듯한 직장에 자리를 잡은 것도 오달영이었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언제나 그 속담을 생각하곤 했다. 즉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란 속담 말이다. 오달영이 바로 나는 놈이었다. 주변 친구들은 오달영이 아마 언젠가는 크고 굵직한 자리에 제일 먼저 앉게 될 거라고 예상했었다. 한마디로 이 녀석이 제일 빨리 출세할 거라고 믿는 것이다.그처럼 머리 좋고 행동이 민첩하고 기회 포착이 빠른 친구가 출세를 안한다면 달리 출세할 녀석이 없는 것이다. 자, 그건 그렇다고 해두고 이제부터 오달영이 출세의 가도를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로 하자. 바꿔 말하면 이 녀석이 내게 명함 열 장을 떠맡긴 장면을 중요한 대목만 간추려서 추적해보자는 것이다. 내가 명함을 건네받은 장소는 대체로 길바닥이었다. 오다가다 어쩌다 길바닥에서 마주치면 오달영은 어김없이 새 명함을 무슨 연례 행사처럼 내게 내밀었다. 녀석처럼 명함의 효용 가치를 잘 활용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오다가다 마주쳤을 때 명함 한 장을 쓰윽 내밀면 자기 근황에 대해 긴 말 짧은 말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처음 명함을 받을 때도 길바닥에서 마주쳤다. 오달영은 양복 윗주머니에서 대뜸 명함 한 장을 쓱 꺼내더니 내게 건네주고는 그냥 가려고 했다. 나는 얼른 명함을 봤다. 무슨 해양연구소 과장이란 직함이 적혀 있었다. "아니, 자네 어찌된거야? 신문사에 다닌다더니 벌써 때려치웠나?" "응, 내근만 시키니 답답해서 견디겠나. 사내 녀석이 뭔가 진취적인 일을 해봐야 할 거 아냐?" "이 해양연구소란 데가 그렇게 진취적인 곳인가?" "자넨 답답하고 무식해서 설명해도 모를걸." 그렇지만 오달영은 길바닥에서 내게 자기 새 직장의 발전 가능성에 관해 반 시간 동안이나 설명했다. 그 좋은 머리로 그는 벌써 해양 문제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그의 전문가적인 해설을 다 옮길 수는 없고 요점만 말하자면 오달영은 우리나라는 이제부터 바야흐로 해양시대를 맞이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필생을 해양 문제 연구와 개척에 바칠 인물처럼 확신에 차 있었다. 일 년쯤 지나서 나는 또 그를 종로 거리에서 마주쳤다. 이번에도 물론 새 명함을 내게 줬다. 그 명함에는 무슨 시청각 교재 연구소 부장이란 직함이 적혀 있었다. "자네 또 옮겼군." 나는 간단하게 말했다. 오달영은 아주 바쁜 사람처럼 보였다. "지금은 시청각 시대 아냐? 시대의 흐름을 대충은 읽어야지. 지금 사업 확장 문제로 정신이 없네. 또 만나세." 그는 바람처럼 가버렸다. 일 년쯤 뒤에 나는 을지로에서 또 그를 만났는데 이번에는 무척 한가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명함을 안 준 건 아니다. 그가 준 새 명함에는 무슨 양봉 회사 전무란 직함이 적혀 있었다. "차나 한잔 할까?" 그가 먼저 말했고 우리는 지하 다방으로 내려갔다. "어찌된 영문인가? 자넨 매번 직업을 바꾸니 말야." "하, 자네처럼 세상을 답답하게 살면 무슨 발전이란 게 오나?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도전하는 거야." "글쎄 도전도 좋지만 불안하지 않아?" "난 안 그래. 그런 얘긴 그만하지." 오달영은 그때부터 벌꿀에 관해, 특히 여왕벌의 꿀이라는 로얄제리의 효능의 신비에 관해 전문가적인 지식을 늘어놓았다. 그의 해설을 듣다보니 나도 로얄제리를 팔아서 곧 갑부라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얼마 뒤 다시 오달영을 만났을 때 그는 갑부는 되지 않았고 무슨 출판사 사장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물론 명함을 받고 알았다. "자네 벌꿀은 다 먹어치워 버렸나?" 내가 물었더니 그는 씨익 웃고 난 뒤 말했다. "그쪽은 돈은 얻지만 재미가 적더군. 이봐. 내가 공연히 출판사를 차린 줄 아나? 난 우리나라 샤머니즘에 관해 체계적인 연구를 해가지고 그걸 책으로 묶을 작정이야. 스무 권쯤 만들 생각이지." 오달영은 샤머니즘을 여러 각도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문화와 샤머니즘, 정치와 샤머니즘, 종교와 샤머니즘 등등. 과연 이 분석을 토대로 스무 권쯤 책을 묶으면 그건 엄청난 반응을 불러 일으킬 것 같았다. 그의 논리가 어찌나 정연하던지 나도 감탄사를 터뜨리고 말았다. "굉장한데, 그건. 잘 해보게. 기대하지." 우리는 헤어졌는데 오달영은 내 감탄사 때문에 기분이 좋아서 갔다. 이걸로 명함 순례가 끝난 건 물론 아니다. 그 이후에도 그는 무슨 장난감과 봉제품 회사 명함과 무슨 구슬 핸드백 회사 명함과 심지어는 무슨 노무자 급식소 소장 직함이 적힌 명함까지 내게 건네줬다. 너무 가지 수가 많아서 내 머리로 이루다 기억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오달영이 그처럼 어지럽게 돌아가는 동안 다른 친구들은 어땠는가? 그들은 한자리에서 곰처럼 늘어붙어 있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그들은 모두들 중간 기업이나 혹은 대기업의 전무 아니면 상무로 승진해 있었다. 벌써 이십여 년이나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런데 오달영은 무엇인가? 가장 최근에 만난 오달영은 서적 외판원이 되어 있었다. 이것도 명함을 줘서 알았다. 아니,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가 나더러 아동용 동화책 한 질을 사라고 찾아온 것이다. 왜 외판원을 하느냐고 내가 물었다. "이젠 나이를 먹어서 다른 직장에 들어갈 수가 없네. 까맣게 젊은 사람 밑에서 신입사원 노릇 할 수도 없고." 오달영은 거의 종착역에 다 온 것처럼 보였다. 14. 동창생 고등학교 교감 선생님인 김말룡 씨는 요즘 기묘한 고민 하나가 생겨서 골치를 앓고 있었다. 그건 정말 기묘한 고민거리였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오직 김말룡 선생만이 할 수 있는 특수한 고민이고 만약 다른 사람에게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고 가정하면 이건 고민거리 축에도 결코 끼어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몇 해 전부터 대학 동창생들이 격월제로 모임을 갖게 되었다. 모임을 시작했을 때 이미 모두가 마흔 고개를 넘어 사회의 중견들로 성장했음은 물론, 이제 인생을 얼마쯤 안다고 할 만한 나이들이었음으로 삶의 중간 정거장에서 다시 젊은 날을 돌아보고 옛 우정을 되살려보자는 취지로 뒤늦게 그 모임은 시작했던 것이다. 취지 자체가 얼마나 뜻깊고도 아름다운 것인가? 지난날을 덮어버리고 눈앞만 바라보는 삶이야말로 얼마나 건조하고 삭막한가? 그래서 김말룡 씨는 그 취지에 적극 찬동하고 격월로 만나는 모임에도 거의 한번도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이만 원씩 회비를 내고 참석해온 것이다. 대체로 대학 동창회란 출세했거나 돈을 많이 벌어놓은 사람끼리 만나는 게 상례이기도 하다. 추억을 위하여, 우정을 위하여 어쩌고 하는 건 겉치레에 불과하고 자기 출세한 자랑, 돈 번 자랑들을 하려고 부지런히 그 자리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 중뿔나게 출세도 못하고 돈도 별로 벌어놓지 못한 친구는 당연히 꽁무니를 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김말룡 씨는 그러나 어디까지나 순수한 인물이었다. 그는 스스로 뽐낼 것도 뻐길 것도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오직 취지 그대로 순수한 마음으로 동창회에 나가곤 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얼마 전 모임에서 제약 회사 상무로 있는 친구가 색다른 제안을 했다. 뭐 색다른 제안이랄 것도 없었다. 이미 남들은 그렇게들 하고 있었으니까. "이거봐, 맨날 남자들끼리만 이렇게 모이는 건 너무 촌스럽지 않아. 그렇다고 꼭 미국 사람 흉내 내자는 건 아니지만 집사람에게 너무 미안해서 그래. 다음부턴 우리도 마누라쟁이들을 함께 데리고 나오자구. 내 생각이 어때?" 뜻밖에도 대찬성이었다. 왜 그 생각을 여태 못했냐고 저마다 투덜거렸다. 오직 한 사람 김말룡 씨만 그 제안에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내를 동반하는 게 뭐가 힘들어서 난처한 표정을 지었을까? 김말룡 씨 아내는 얼굴 어디에 심한 흉터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다리 하나쯤 저는, 거동이 부자유스런 상태인가? 절대로 그렇지는 않았다. 아내를 동반하자는 데 김말룡 씨가 곤혹감을 느낀데에는 좀 더 복잡미묘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아내는 그야말로 멀쩡한 현모양처였다. 아내는 교감 선생님인 남편을 세상 어디에서나 가장 유능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떠받들며 살아왔다. 김말룡 씨는 대학시절 수재로 통했다. 아내도 그 일을 알고 있고 자랑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우등생은 선생이 되고 열등생은 사장이나 교수가 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김말룡 씨 처지가 꼭 그랬다. 마흔 고개를 넘어 오랜만에 동창회에 나와보고 김 교감은 그 속설이 영낙없이 맞는 말임을 확인했다. 모두가 사장이나 이사님이었다. 그들은 자가용 승용차들을 몰고 동창회에 나타났다. 택시를 타고 온 사람은 김말룡 씨 뿐이었다. 출세하고 돈 번 친구들을 보면서 김씨는 즐겁기도 했으나 한편 다소 씁쓸하기도 했다. 그게 인간의 마음인 것이다. '그래, 하지만 나는 교육자야. 교육자가 돈을 많이 벌었다면 그게 이상하지. 교육자로서는 나는 잘 걸어왔어. 그런데 뭐가 부끄럽나. 인생의 길이 서로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데 내가 그들을 부러워하면 안돼지. 나는 친구들의 출세를 기뻐해야 한다구.' 김말룡 씨 자신은 갸륵하게도 이런 생각으로 즐겁게 사장들의 모임에 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만약 아내가 이 자리에 나오면 지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유능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했던 남편을 어떻게 볼까? 간신히 택시를 잡아타고 거기 도착하고 돌아올 때는 또 택시를 잡느라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남편을 보고 아내는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이게 김말룡 씨의 고민이었다. 그가 걱정하는 건 자기 보상이 아니라 아내가 불쌍해질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김말룡 씨는 그래서 두 번이나 약속을 어기고 혼자 모임에 나갔다. 친구들의 비난이 그에게 쏟아졌다. 이에 더 버틸 재간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어느 봄날 오후 아내를 동반하고 동창회에 나갔다. 난생 처음 남편 친구들 모임에 참석하는 아내는 무척 즐거워하고 그리고 잔뜩 기대를 품는 눈치였다. 그날 모임은 어느 호텔 라운지에서 있었는데 김말룡 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사장들은 호탕하게 웃으며 골프장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고 또 그 사모님들은 값비싼 의상으로 몸을 단장하고 나와서 남편과 동반했던 해외여행담, 그리고 증권 투자나 부동산 투자 등에 관해 각자 소견을 얘기했다. 김말룡 씨는 물론 화제에 끼어들지 못했다. 그는 전에도 늘 그랬었다. 그의 아내 역시 화제에 끼어들 밑천이 없음으로 그저 멍하니 앉아 주로 경청하는 수 밖에 없었다. 김말룡 씨는 그러는 아내에게 신경을 쓰느라고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그는 화제에 끼어들지 못하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아내가 가엾고 애처로왔다. 그렇다고 남들 앞에서 아내를 위로할 수도 없었다. 그는 아내를 데리고 나온 걸 후회했다. 모임이 끝났을 때 어느 동창생이 다가와서 말했다. "자네, 집이 수유리지. 나하고 같은 방향이니까 내가 태워다 줄까?" "아냐, 우린 택시를 타고 가겠어." 김말룡 씨는 완강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친구의 부인이 말했다. "아이, 같은 방향인데 함께 가시죠, 뭐."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냥 우리끼리 따로 가겠어요." 김말룡 씨는 아내 손을 잡고 도망치듯 호텔에서 빠져나왔다. 도심지의 밤거리에는 언제나 택시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다. 김씨는 아내의 손을 잡고 택시를 잡기 위해 또 다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한참만에 운좋게 택시를 잡아탄 김말룡 씨는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런 뒤에 그는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옆에 앉아 있는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 놀랬지? 내 친구들을 보니." "그래요. 굉장히들 출세했고 잘들 사나 봅디다. 그래도 그 자리에서 당신이 제일 훌륭해 보입디다. 당신 눈빛이 제일 맑아 보이고 당신이 제일 자기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여보, 정말 그렇게 느꼈단 말이야?" "제가 왜 거짓말을 해요? 저는 줄곧 그것만 관찰하고 있었는데요." 김말룡 씨는 그제서야 어리석은 자기 자신을 깨달았다. 이런 아내를 두고 그동안 공연한 고민에 시달렸던 것이다. 15. 타인의 시간 일에 쫓겨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흔히 자신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 자기 삶을 따져보고 반추해 볼 시간조차 없다는 말일 것이다. 하긴 이 사회에서 완전히 자기의 생각대로 자기 생활을 영위해가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재산이 많건 적건 행복한 사람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뜻이나 생각과는 다른, 때로는 전혀 엉뚱한 일로 시간을 보내고 그날그날을 보낸다. 그럴 경우 그런 생활은 일단 불행한 생활이며 무의미한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요섭은 삼십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시인으로 작은 출판사에서 일을 하고 있으며 틈틈이 자기 글도 쓰고 책도 읽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제부터 하루하루가 자기 인생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귀중한 시간임을 누구보다 잘 깨닫고 있었다. 그는 책을 많이 읽고 싶었고 자기 자신도 좋은 책을 여러 권 쓰고 싶었다. 그런 일은 김요섭에겐 움직일 수 없는 인생의 목표였다. 그런데 그 움직일 수 없는 목표라는 게 요즘에 와서는 왠지 가물가물 멀어져 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유는 그가 자기의 귀중한 시간을 자꾸만 다른 엉뚱한 일에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고 연륜이 쌓일수록 그 현상은 심해졌다. 직장에 나가는 건 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퇴근 후에 그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것이다. 그는 오후 다섯 시에 일과가 끝나는데 다섯 시만 되면 김요섭은 일 분도 더 회사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곧 밖으로 나와버리곤 했다. 만약 이때 그길로 집으로 와서 자기 시간을 가질 수만 있다면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김요섭은 그럴 수가 없었다. 김요섭에게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를 불러내는 전화가 직장으로 걸려왔다. 어쩌다 근무 시간에 그런 전화가 오지 않아서 모처럼 일찍 집으로 돌아오면 기다렸다는 듯 그를 찾는 전화가 집으로 걸려오곤 했다. "이봐, 우리 얼마만이야? 오늘 오후에 국민학교 동창 몇이서 만나기로 했는데 자네도 퇴근하고 나와야 하네." 이런 전화가 제일 거절하기 힘든 전화였다. "아니, 내가 꼭 나가야 하나? 이번엔 자네들끼리 만나고 다음에 만나면 안될까?" "이 친구가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자네 안 나오면 우리도 나갈 필요가 없다구. 모두들 자네 얼굴 한번 보고 싶다는데 그게 말이 되나?" "그래? 알았네. 퇴근하고 나가지." 전화를 끊고 나서 김요섭은 언제나 자기의 약한 마음을 원망했다. 그러나 타고난 성격은 어쩔 수 없었다. "나 그림장이 오장환일세. 그러고 보니 자네를 오랫동안 못 봤군. 그 지난번 갔던 탑골에서 저녁 때 맥주나 한잔 하자구." "아이구. 오늘은 집에 가서 원고 쓸 게 있다네. 제발 다음에 만나지." "무슨 소린가? 자네가 원고 쓰는 걸 내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 원고 따위 하루쯤 있다 쓰면 벼락이라도 맞나? 원, 잔말 말고 나오라구. 나 일곱 시에 거기서 기다리겠네." 화가 친구는 일방적으로 선언해버리고 전화를 끊는다. 이렇게 되면 마음 약한 김요섭은 그 자리에 안 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남들이 들으면 몹시 부러워할 초대도 있었다. 물론 김요섭은 그런 초대가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나, 정 사장일세. 오늘 저녁에 우리집에 와서 저녁이나 먹세. 신부님 한 분 하고 교수님 한 분, 그리고 시인인 자네, 이렇게 세사람을 초대하기로 했네. 오는 거지? 그래, 알았네." 이런 경우는 한마디도 못하고 응락할 수 밖에 없었다. 정 사장이란 친구는 대학 동창으로 일찍 무역 회사를 차려서 꽤 돈을 벌었다고 소문난 친구였다. 그는 돈을 벌었기 때문에 돈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 호기심이 많았다. 신부와 교수와 시인을 초대하는 것도 정 사장으로서는 자기의 고상한 취향을 과시하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런 초대를 김요섭이 거절 못하는 이유는 상대가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쪽의 그런 취향을 묵살하는 게 어쩐지 인색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김요섭의 일 주일은 비는 날이 없었다. 그는 근래에 책 한 권 변변히 못 읽었고 시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그는 마음 약한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나는 왜 거절하지 못할까? 친구를 만나고 남의 저녁 초대에 나가는 것보다 내게는 책 한 권 읽고 시 한 편 쓰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한 일 아닌가? 그래서 김요섭은 어느날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회사의 사환 아가씨에게 엄명을 내렸다. "이제부터 나를 찾는 전화가 오면 무조건 없다고 그래. 무조건이야. 알겠어?" 그는 아내에게도 같은 당부를 했다. 그런 뒤에 그는 비로소 책을 읽을 수가 있었고 오랜만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생활이, 말하자면 김요섭이 퇴근 이후의 자기 시간을 자기의 뜻에 따라 사용하는 생활이 불과 일 주일도 지나지 않았을 때 하루는 사촌 형이 푸르둥둥한 얼굴로 회사에 나타났다. 그 형은 김요섭보다 두 살 위인데 무역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사촌 동생을 만나 형은 몹시 화가 난 표정으로 아우에게 말했다. "이 나쁜 자식. 너 같은 게 시인이라고 껍죽거리고 다니다니. 정말 가소롭다, 가소로와. 나는 너를 다시 안 만날 생각이지만 네 뻔뻔한 얼굴이나 봐두려고 온 거야." "아니 왜 그러오? 형." "몰라서 묻니? 이 나쁜 놈아. 너 큰아버지 환갑 잔치에 얼굴도 안 비치고 그럴 수 있어?" "큰아버지 환갑 잔치라구요? 그럼 연락을 해줬어야 하지 않아요?" "그래 맞았다. 네게 연락하려고 직장으로 집으로 백 번도 더 전화를 걸었지. 그런데 이렇게 버젓이 직장에 근무하는 놈이 그렇게 매번 없다고 잡아떼지 않았어?" 그제서야 김요섭은 사촌 형이 화를 내는 이유를 알았다. 그는 사촌 형을 다방으로 데리고 가서 일이 그렇게 꼬이게 된 내력을 설명하고 이해를 시키느라고 두 시간 동안이나 진땀을 흘렸다. 그런 뒤에도 사촌 형은 그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았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 더구나 타인의 시간의 소중함을 이해한다는 건 그렇게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김요섭은 할 수 없이 다시 전화를 받기로 했다. 이제 방법은 자기가 마음을 독하게 먹는 것 뿐이었다. 자기의 시간을 지킬 수 있는 건 역시 자기 자신 뿐이기 때문이다. 16. 직업 천려일실이란 말이 있다. 아마 그날의 그 일이 나에겐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안타까웠던 기억일 것이다. 나는 당시 신촌의 어느 집에서 방 한 칸을 빌어 혼자 살고 있었다. 자취 생활이랄 수도 있었고 하숙 생활이랄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자주 집주인네 식탁으로 불려 나가 신세를 지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이틀에 한번 꼴로 스스로 밥을 지어 먹기도 했다. 그럴 경우에도 반찬이라든가 식기 같은 걸 집 주인네로부터 얻어 쓰고 먹었다. 당시 주인 남자는 회사에 나가 있었고 국민학교 여교사 생활을 했다는 안주인은 집에서 살림만 하고 있었다. 두 내외가 모두 사람이 원만했다. 남자는 그릇이 큰 편이고 여자는 자상하고 친절했다. 그들은 모두 교회에 나가는 신자들이었다. 그렇다고 셋방에 사는 내게 교회에 함께 가자는 식의 과잉친절 같은 건 베풀지 않았다. 그런 양식도 내 마음에 들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나 그들은 나를 무척 좋게 보는 듯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게 신부감을 소개하겠다고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정말 그들 내외가 나를 좋게 보는 이유를 오랫동안 알지 못해 한도안 당황했던 적도 있었다. 소설을 쓴답시고 밤 늦게까지 책상 앞에 엎드려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무직자이다. 적어도 당시의 기준으로 본다면 무능한 실직자임이 확실했다. 그런데 그들은 나를 실직자로 대우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한 사람의 자기 일을 갖고 있는 인간으로 대우했다. 실직자에게 신부감을 소개하겠다고 나설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집주인 내외는 신통하게도 나를 엄연한 사회의 일원, 즉 사회에서 뭔가 유익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인간으로 봐줬던 게 분명하다. 그들이 나를 좋게 봤다는 이유를 나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주인 남자, 즉 모 회사의 상무로 근무하는 김영달 씨에겐 남자 동생이 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서른이 가까운, 나와 비슷한 세대의 젊은이들이었는데 이따금 형네 집에 놀러 왔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옷차림이 화려했고 인물들도 훤칠했다. 정말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신랑감들이었다. 말솜씨도 능란해서 그 아우들과 한참 이야기하다 보면 그들이 지금 무위도식하고 있는 건달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형수님, 즉 김영달 씨의 부인 말에 의하면 김영달 씨는 그들 두 아우 때문에 늘 고민이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목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직장에 취직을 시켜주면 한 달이 못 가서 그만두고 다시 무직자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자기네 집안이 재벌의 집안도 아닌데 말이다. 인생의 목표도 없고 고민도 없고 오직 취미라면 옷이나 장신구따위로 모양이나 내면서 빈둥빈둥 살아가는 자기네 시동생들에 비한다면 고영 씨는 얼마나 훌륭한 청년이냐고 주인 여자는 내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의 견해가 그다지 엉터리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무직자로 생각했던 내 견해가 바뀐 건 아니다. 그런데 주인 여자가 하루는 내게 넌지시 색시감을 소개하겠다고 말해온 것이다. 평소에 그들이 나를 워낙 좋게 봐왔기 때문에 그런 제안이 내겐 그닥 갑작스런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말했다. "이제 고영 씨도 슬슬 신부감을 알아볼 때가 되었지 않아요? 우리 교회에 아주 참한 아가씨가 하나 있다구요. 만약 우리 시동생이 직업만 확실하다면 그리고 고영 씨처럼 성실하다면 정말 동서로 삼고 싶은 아가씨예요. 똑똑하고 예쁘고 얌전하고 대학도 좋은 성적으로 나왔다나봐요. 한번 만나보실래요?" 주인 여자의 말에 나는 당장 귀가 솔깃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그때쯤 혼자 꾸려가는 생활에 약간 지친 상태였었다. 나는 이미 나이도 적령기를 지나치고 있었다. 그렇지만 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상대의 조건이 너무 완벽한 것 같았던 것이다. "그렇게 훌륭한 상대가 저 같은 사람에게 어울릴 수 있겠어요? 아무래도 너무 과분한 상대 같은데요." "아니, 고영 씨가 어때서 그래요? 내가 너무 저쪽을 좋게만 말했나? 그 아가씨 좋긴 하지만 나더러 말하라면 고영 씨 쪽이 도리어 기운다고 생각하는데요." 잘못 들으면 그녀가 나를 놀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인 여자의 그 말이 그녀의 진심이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물론 그녀의 남편도 글을 쓴다는 걸 무슨 대단한 일로 여기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그런 생각이 나로선 고맙기 짝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나까지 덩달아 우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미 글을 쓴다는 이유로 많은 장소에서 경멸과 조소를 적지 않게 받은 경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은 일단 나는 확답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물러났다. 내 방에 돌아와서 곰곰 생각하니 정말 그 아가씨에 대한 관심이 무럭무럭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다. 나는 집 주인의 안목을 믿을 수 있었다. 주인 여자가 그렇게 평가하는 아가씨라면 틀림없이 좋은 아가씨일 것이었다. 그러자, 내겐 심각한 고민이 생겼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글을 쓴다는 이유로 허다한 장소에서 경멸과 조소를 받아왔던 것이다.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김영달 씨 내외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절대로 아닌 것이다. 도리어 그 반대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그 아가씨 앞에서 내가 글을 쓴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틀림없이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나갈 것이다. 그렇게까지는 않더라도 글을 쓴다는 걸 아는 순간 이미 그녀는 나라는 인간을 고려의 대상에서 젖혀놓을 것이다. 나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이건 그간의 내 경험이 말해주는 진실이었다. 나는 자신을 직업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가령 어쩌다 여행을 가서 여관 같은 데서 묵게 되었을 때 나는 직업란을 공란으로 남겨두거나 그냥 무직이라고 써버린다. 달리 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음날 나는 주인 집의 저녁 식탁에 다시 불려 갔다. 주인 여자가 더욱 정색하고 내게 그 아가씨의 문제를 꺼냈다. 내가 응락하면 그쪽에도 내일 당장 말을 전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잠시 궁리 끝에 내딴엔 아주 기발한 제안을 했다. "아주머니, 만나는 건 좋은데 그녀에게 제가 글 쓴다는 말씀만 하지 말아주십쇼.어쩐지 저는 그게 걱정이 되서요." "그게 어때서 그래요? 고영 씨가 원한다면 그거야 어렵지 않죠. 그럼 무슨 일을 한다고 그러죠?" "그건 모른다고 하시든가 적당히 넘기세요. 나중에 제가 이야기를 하죠." "하기야 당사자들끼리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겠지. 알겠어요. 나는 절대로 고영 씨가 글 쓴다는 이야기는 않겠어요. 그러나 결국은 말씀을 하셔야겠지요." "아무튼 저는 글 같은 것과는 상관없는 사람으로 그 자리에 나가고 싶어요. 글과 관련을 지으면 될 일도 안되는 수가 있으니까요." 이렇게 해서 나는 기묘한 맞선을 보게 되었다. 물론 상대는 내 직업이 뭔지를 모르고 그 자리에 나오는 것이었다. 주인 여자가 교회에서 어떤 식으로 그녀를 설득했는지는 나는 모른다. 나는 오후 두 시쯤 약속된 다방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정각이 되자, 어김없이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주인 여자가 묘사했던 그대로 아름답고 야무지고 기품있는, 아주 훌륭한 아가씨였다. 이상이나 꿈속에서 그려봤던 그런 아가씨라고 하면 약간 과장이 되겠지만 아무튼 이상에 가까운 아가씨임엔 틀림없었다. 나는 자연히 가슴이 떨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런데 상대는 어디까지나 냉정했다. 자리에 앉아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나서 그녀는 대뜸 나더러 뭘 하시느냐고 물었다. 소개하는 쪽에서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그게 몹시 궁금하고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미리 준비했던 대답을 했다. "집에서 책이나 읽고 지냅니다. 특별히 하는 일은 없어요." 나는 이렇게 말하는 게 내가 글을 쓴다고 하는 것보다는 백 번 나을 줄 알았다. 아무것도 안 한다면 앞으로 뭐든 할 수 있다는 얘기도 되는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하세요?" 그녀가 눈을 부릅뜨고 다시 물었다. "그, 그렇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시계를 보았다. 그러더니 집에서 손님이 기다리고 있으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일어섰다. 그리고 고개를 까딱 숙여 보이고는 그냥 밖으로 걸어나가 버렸다. 말하자면 시간 낭비 같은 건 않겠다는 결연한 태도였다. 그런 뒤에 일 주일이 지났다. 마침 일요일이었는데 교회에서 돌아온 주인 여자가 나를 불렀다. 그녀는 화가 나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면서요?" "네, 그런데요?" "그럼, 고영 씨는 자신을 건달이라고 스스로 고백한 꼴이 되지 않아요? 그 아가씨에게 내가 욕을 많이 먹었어요. 건달을 소개했다는 거예요. 왜 작가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 아가씨는 문학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아가씨예요. 만약 고영 씨가 작가라고 말했다면 얼마나 재미있는 데이트가 지금쯤 이루어지고 있었겠어요?"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저는 작가라고 하면 무조건 일어설 줄만 알고 겁을 먹었거든요. 차차 알릴 셈으로 그렇게 말했는데." "너무 화가 나서 지금은 돌이킬 수도 없게 되었어요. 만약 이제 다시 사실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게 되었어요. 그래서 교회에서 그 아가씨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요. 난 건달을 소개한 사람으로 되는 거지요." "미안합니다.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어요. 나는 일이 잘 되도록 한다는 게 그만 엉뚱한 결과가 되었군요. 역시 거짓말은 안 좋다는 걸 이번 기회에 철저히 알았습니다." "그래요. 거짓은 어느 경우라도 안 좋아요. 결코 거짓으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는 없는 일이죠. 이제 아셨으니 다음엔 떳떳하게 작가라고 말을 하세요." 나는 할말이 없었다. 17. 전문가 한가할 때 나는 우리 동네 상가에 있는 복덕방에 가서 이따금 바둑을 두곤 했다. 복덕방이란 본래 바쁠 때는 그야말로 눈코 뜰새 없다가도 한바탕 회오리가 지나가면 시골 노인정처럼 한산하고 적막한 장소가 된다. 복덕방에서 나 같은 한량이 놀러 오는 걸 환영하는 것도 바로 이런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른바 학사 부동산이란 그곳 주인이 바뀌었다. 물론 나는 새 주인과도 인사를 하게 되었고 그 친구와도 비교적 자별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왜냐하면 새 주인 신진수야말로 바둑을 누구보다 즐겼기 때문이다. 신진수는 좀 특별한 중개업자였다. 그는 어느 대학의 부동산학과를 졸업했으며 지금은 대학원에서 부동산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사 아닌 예비 석사 중개업자였다. 그러니 이 업소 이름을 앞으로는 석사 부동산이라고 하는 게 적당할지 모른다. 신진수는 예비 석사답게 늘 넥타이를 말쑥하게 매고 다녔으며 복장이나 머리 매무새도 늘 단정하게 하고 다녔다. 그는 표정도 예비 석사답게 엄숙하고 행동거지도 정중하고 으젓했다. 석사는커녕 학사도 못 되었던 그의 전임자에 비하면 여러 모로 격이 다른 인물이었다. 과연! 그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속으로 이렇게 탄복했다. 배운 사람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 더구나 그는 부동산학을 전공한, 그야말로 진짜 부동산 중개사가 아닌가? 나는 앞으로의 그의 활약을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동산학 예비 석사 신진수는 복덕방 사무실 분위기부터 일신해 버렸다. 소파나 탁자도 고급품 새 것으로 바꾸고 책장도 들여놨다. 어른 키보다 더 높은 그 책장에는 부동산 관계 서적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그림도 제법 볼 만한 걸 한 점 벽에 걸어놓았고 글씨도 한 점 근사한 걸 걸어놓았다. 누가 이곳을 처음 들어와 봤다면 복덕방이 아니라 무슨 연구실이나 교수실 쯤으로 오해했을지 모른다. "과연 당신은 다르군. 새 시대의 복덕방은 뭔가 이렇게 달라져야 한다구." 좋은 분위기에서 바둑을 두게 되니까 내 기분이 나쁠 리 없었다. 신진수는 내 칭찬에 그저 씨익 웃기만 했다. 어느날 그는 조수 한 사람을 채용했다. 키가 작고 눈치는 빠르게 생겼는데 이웃 복덕방에서 잔심부름이나 하다가 이쪽으로 옮겨왔다는 것이었다. "제 이름은 박광수라고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니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조수 박광수는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다고 푸념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인사치레 하나는 시쳇말로 끝내줬다. 아무 관련도 없는 나 같은 한량에게까지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하는 것만 봐도 그 점은 알 수 있었다. 그 무렵에 공인중개사 시험 제도가 생겨 신문에 시험 날짜가 예고되었다. 신진수도 물론 일단 그 시험을 봐야 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신진수 입장에서는 시험 따위는 그저 치러보는 형식에 불과했다. 설마 예비 석사가 중개사 시험에 떨어지겠는가? 신진수는 아마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야 마땅할 것이다. 정말 그는 박광수에게 시험 준비를 시켰다. 책은 따로 살 필요가 없었고 사무실 서가에 얼마든지 꽂혀 있었다. 신진수는 시험을 앞두고도 책 한번 손에 잡는 법이 없었으나 박광수는 낮이나 밤이나 책을 들고 살았다. 그래도 그는 이해 못할 부분이 많아서 늘 주인인 신진수에게 이것저것 묻곤 했다. 박광수를 포함해서 근처의 중개사 시험 준비생들이 학사 복덕방에 몰려와서 신진수로부터 강의를 듣는 장면을 나는 여러 차례 목격했다. 그런 때는 신진수는 논리가 정연하고 어느 대학 교수 못지않게 지식이 풍부했다. 이윽고 시험을 치렀는데 신진수는 당연하게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박광수는 떨어지고 말았다. "자넨 아직 나이도 있고 또 기회가 얼마든지 있으니까 낙심말고 꾸준하게 준비를 하라구." 이건 신진수가 낙방한 조수에게 한 말이다. 그런데 학사 부동산에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영업이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손님들이 별로 찾아오지 않았다. 그건 내 예측을 완전히 빗나간 결과였다. 나는 신진수야말로 진짜 실력있는 중개사이고 그래서 학사 부동산은 문전성시를 이룰 줄 알았다. 그런데 반대였다. 신진수는 사무실에서 책을 보거나 바둑을 두곤 했다. 가만히 앉아서 손님을 기다렸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도 복덕방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일이 없으니까 신진수는 자연히 사무실을 자주 비우고 밖으로 나돌 때가 많았다. 어느날 내가 보기에 딱해서 신진수에게 말했다. "광고도 돌리고 부지런히 전화도 해봐야지, 가만히 앉아서 바둑만 두고 있어서야 장사가 되겠소? 좀 방법을 바꿔보시오." 그는 피식 웃었다. "아직 선전이 안 되어 그럴 겁니다. 내 얼굴 모르는 사람도 많구요. 차츰 좋아질 거예요." 그러나 상태가 좋아지지는 않았다. 육 개월쯤 그렇게 지냈는데 어느날 학사 부동산에 가봤더니 박광수 혼자 사장 의자에 앉아 여기 저기 전화를 걸고 있었다. "상장은 어디 갔지?" "그만뒀어요. 어제부터 제가 인수했습니다. 사무실 유지비도 안나오니까 신 사장은 더 버틸 수가 없었던 거죠." "아니, 그런데 자네는 무슨 재주로 사무실을 꾸려갈려고 그러지?" 박광수가 피식 웃고 대꾸를 안했다. 아마 내가 자기를 너무 얕잡아보는 게 불쾌한 모양이었다. 그는 계속 사모님 어쩌고 하면서 전화만 걸었다. 이틀 뒤에 복덕방엘 나갔더니 여인들 몇이 앉아 박광수와 함께 계약서를 쓰고 있었다. 내가 그 사무실에서 오랜만에 구경하는 풍경이었다. 다시 며칠 뒤에 나갔더니 사람들이 사무실에 가득 차서 북적거렸다. 나는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미 사무실엔 바둑판도 치우고 보이지 않았다. 박광수는 사람도 하나 더 채용했다. 학사 부동산이 번창하고 있는 게 내 눈에도 보였다. 어느날 상가에 나갔다가 우연히 복덕방에 들렀는데 마침 박광수 혼자 수첩에 뭘 적고 있었다. "장사가 잘 되나 보군. 자넬 다시 봐야겠는걸." 기다렸다는 듯이 박광수가 내게 말했다. "신 사장처럼 책이나 보고 바둑이나 두고 있으면 누가 찾아오나요? 그 사람은 책만 알았지, 복덕방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라구요. 이 사업은 발로 뛰고 말로 바르고 인사로 때우는 거지요. 봐요. 두 달만에 저는 투자를 건졌지 않아요." "중개사 시험 준비는 아직 하고 있나?" "글쎄 그것 때문에 골치에요, 골치. 신 사장이 없으니까 가르쳐 줄 사람도 없고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누가 누굴 가르쳐야 할지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과연 누가 진짜 전문가인가.? 18. 외딴 초가집 그것은 이상한 체험이었다. 그 초가집에서의 생활은 내가 그동안 어쩌면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나 자신을 다시 찾는 계기를 내게 준 것이다. 지금도 아파트의 13층 내 방에 앉아 있노라면 야산 중턱에 홀로 자리잡고 있는 그 외딴 초가집의 쓸쓸한 풍경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재작년 봄 나는 오랜만에 염산을 찾아갔다. 염산은 서남해안에 있는 한산한 어촌으로 내가 소년시절을 보냈던 지방이다. 가난하고 외로운 소년시절을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곳을 떠난 뒤에도 염산은 언제나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내가 갑자기 그 염산을 찾아가기로 한 것은 그 지방의 몇 가지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오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염산의 풍경이 뭐 대단한 건 아니다. 그곳은 다른 평범한 어촌과 마찬가지로 바다가 있고 그 바다 위에 떠있는 작은 어선들이 있고 그리고 야산이 있고 그 야산 아래쪽에 작은 마을들이 몇 개 띄엄띄엄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런 평범한 풍경도 어린 시절을 거기서 보낸 나에겐 각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는 염산의 그런 풍경들을 내 사진첩 속에 담아두고 싶었다. 그곳을 오랜만에 찾아간 목적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처음 도착한 날 나는 카메라를 들고 먼저 해안으로 가서 바다를 찍었다. 그런 뒤에 마을로 돌아와서 야산으로 올라갔다. 야산은 아주 낮고 나무도 별로 없는, 약간 삭막한 느낌을 주는 산이었다. 그곳에는 나무들이 서 있을 자리에 고추밭이나 감자밭이 있었다. 주민들이 경작지가 모자라 산에까지 밭을 일구었던 것이다. 그 야산 중턱에서는 바다가 아주 잘 보였다. 그곳에서 바다 위에 범선이 떠있는 풍경을 바라보는 건 정말 멋진 일이었다. 그것은 한폭의 그림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야산 중턱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 천천히 산을 내려오는데 문득 눈앞에 한 채의 외딴 초가가 보였다. 산중턱에 있는 그 외딴집은 아주 작고 낡은 초가인데 담장은 물론 없고 마당도 없었다. 다만 집 둘레에 싸리나무가 담장 대신 몇 그루 서 있었고 자세히 보니 몇 가지 조그만 들꽃들이 집주변에 피어 있었다. 나는 그 꽃들의 이름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집 가까이 가보았다. 그랬더니 그건 빈 집이었다. 누가 이처럼 아담한 집을 버리고 떠났을까?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도시로 갔을까? 그들은 왜 이곳을 떠났을까? 너무 외로와서, 너무 무서워서 이 외딴집을 떠나기로 한 것일까? 빈 집의 작은 마당에 서서 나는 이런 부질없는 생각에 잠겼다. 그때 내 머리속에 아주 엉뚱한 충동이 떠올랐다. 내가 그 집에서 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서울의 아파트에서 십여 년을 살아오고 있다. 콘크리트와 시멘트의 숲 속에서 십여 년을 살아온 내 눈에는 그 작은 외딴집의 풍경이 그렇게 목가적일 수 없었다. 그 집에서 나는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일단 밖으로 나와서 근처의 밭에서 일하고 있는 노파에게 그 집에 관해 몇 가지를 물었다. 노파는 그 집 사람들이 일 년 전 어디론가 떠났으며 아마 도시로 나갔을 거라고 말했다. 내가 그 집에서 살고 싶다고 말하자, 낯선 노파가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곧 헐어내자고 말을 하고 있다우. 빈 집이 보기가 민망하니까 그렇지. 식구들까지 모두 데려와 살 거라면 마을에서 환영할 거요." 식구들까지 데려 와야 한다는 말에 나는 고소를 금치 못했다. 물론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 가족의 생활 근거는 서울이고 아이들도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며 특히 아내는 그 도시 밖의 세계를 전혀 모르는 여자다. 모를 뿐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시골 따위에 흥미가 없는 것이다. 구태여 말한다면 도시 체질 여자라고 할 수 있을까? 아파트로 이사를 하자고 졸라댄 것도 아내였고 아파트 생활에 누구보다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것도 아내였다. 그런데 그런 아내더러 이런 와딴집에 와서 살자고 내가 말한다면 아내는 틀림없이 기절하고 말 것이다. 물론 나는 그런 제안을 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나 자신은 비록 며칠이라도 그곳에서 살고 싶었다. 나는 그 외딴집으로 돌아와 그곳을 대강 정리했다. 방 하나를 치우고 집 주변의 잡초도 뽑아냈다. 식사는 마을의 주막집에 나가서 하기로 정했다. 주막집에서 간단한 침구도 빌릴 수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므로 나는 양초를 사왔다. 집을 대충 정리하고 당장 필요한 물건을 준비하고 나자, 나는 자신이 갑자기 천국에 온 것 같았다. 그날 밤에 내게 뜻밖의 손님들이 찾아왔는데 그건 아까 낮에 만났던 노파의 아들과 그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마을의 청년들로서 내가 진정으로 그들의 이웃이 될 생각이라면 다 환영이란 그들의 뜻을 내게 전하려고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들은 소주도 가져왔고 주막에서 간단한 안주도 사왔다. 갑자기 오랫동안 빈 집이었던 초가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나는 그들에게 내 가족이 이곳에 올 수는 없으며 나 자신도 곧 이 집을 떠날 거라고 솔직하게 말해줬다. 그대신 이 집은 나의 집이니까 나는 앞으로도 자주 이곳을 찾아와서 얼마 동안 머물겠노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 방법도 좋겠다고 내 생각을 선뜻 이해했다. 나는 낮에는 야산에 올라가 바다 풍경을 바라보기도 했고, 저녁때는 혼자 초가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에 잠기기도 했고 그리고 내가 도시에서 지낸 오랜 시간을 반추해보기도 했다. 그런 반추는 사실 도시 복판에 있는 동안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밤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내 초가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도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나는 도시에 관해 비교적 냉정하게 분석하고 비판하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들은 나의 그런 이야기를 무척 좋아했다. 나는 그들로부터 염산 지방의 실정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나는 물론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는 편지에서 모든 걸 사실대로 적었다. 그러나 언제 이곳을 떠난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서울에서는 법석이 난 모양이었다. 아내는 내가 갑자기 이상해졌다고 친구와 친지들을 찾아다니며 하소연했던 모양이었다. 이윽고 내 친구들과 아내가 나를 끌고 가기 위해 염산으로 들이닥쳤다. 내가 이곳에 온 지 꼭 보름이 되는 날이었다. 갑자기 일곱 사람의 도시인들이 그 산중턱의 외딴집에 나타나자, 마을은 무슨 사건이나 난 듯 법석이었다. 마을 사람들까지 도시인들을 구경하려고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아니, 그들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그들은 내가 무슨 범죄인이거나 정신이상자라고 멋대로 단정한 듯했다. 내 아내와 친구들이 나를 그렇게 대했기 때문에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도리어 자연스런 일이었다. 나는 한마디 항변도 못하고 자동차 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수십 명의 마을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웃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에는 참 멀쩡한 미치광이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19. 밤에 만난 노인 "여보, 그럼 잘 자라구. 수정이 너도 잘 자고." "그럼 먼저 잘게요. 너무 늦게까지 무리하지 말아요." "아빠, 안녕." 수정이는 열세 살 먹은 외동딸이다. 지금 중학 일 년생인데 외동딸이라 그런지 아직도 집안에서는 어리광을 부린다. 규태를 혼자 거실에 남겨놓고 아내와 수정이는 각자의 방으로 잠을 자러 들어갔다. 이런 인사는 요즘 매일같이 이 집안에서 되풀이되는 것이다. 가장인 규태 한 사람을 남겨놓고 남은 가족들만 잠자러 들어가는 이 이상한 풍속이 생긴 건 두어 달 전부터의 일이고 그 원인은 물론 규태에게 있었다. 그는 두어 달 전에 실직했는데 그때부터 밤에 잠이 안 오는 버릇이 생겼다. 대낮에 한참 활동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일을 잃고 집안에서 마치 병실의 환자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으니까 불면증이 생길 건 당연한 이치다. 아니 규태의 증상은 불면증이라기보다 시간 감각을 잃었다고 하는 게 옳다. 그는 낮과 밤을 바꾸어 살게 된 것이다. 밤 동안 잠을 못 자고 아침 동이 터오면 그때 비로소야 잠이 몰려오는 것이니까 엄밀히 말하면 불면증은 아닌 셈이다. 아내와 수정이가 잠자러 들어간 뒤 한동안 규태는 거실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이때가 그는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갑자기 외로움을 타는 것이다. 이젠 직업도 잃고 따로 할일도 없고 가족들마저 꿈속으로 들어간 뒤 거실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자신을 생각하면 외롭고 처량한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대체 내 나이가 지금 몇인데 벌써 은퇴를 했단 말인가? 아직 서른아홉이면 남들은 이제 인생을 시작한다고 으시댈 때가 아닌가? 은퇴란 규태의 경우 물론 어울리는 말이 아니며 또 자기 의사에 따라 그렇게 된것도 아니다. 그는 지금까지 실패라는 걸 별로 모르고 살아왔다. 그는 누구보다 유능했고 남보다 언제나 한발 앞서 뛰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서른아홉 나이에 어떻게 대그룹 회사의 이사까지 승진했겠는가? 그가 너무 유능했기 때문에 사실상 은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된 지금도 그의 아내나 주위 사람들은 규태의 앞일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경우를 전혀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의 승진이 너무 빨랐기 때문에 일찍부터 주위에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네, 그렇게 빨리 질주하다간 나중에 남보다 먼저 경기장에서 나가야 하는 경우가 생길지도 몰라. 처음에는 우스개 소리로 흘려들었다. 하지만 서른여덟에 이사가 되었을 때는 자신도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이제 사장이 되는 것만 남았는데 사장 자리는 하나 뿐이고 사장을 노리는 사람은 열 명도 넘었다. 그리고 서열로 보거나 그룹 사주와의 인연으로 보거나 규태 자기에게 사장 자리가 돌아올 가능성은 몹시 희박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하나? 이런 걱정이 일찍부터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그게 현실로 이렇게 빨리 다가올 줄은 정말 몰랐었다. 어느날 그룹 사주가 그를 따로 불렀다. "여보게, 정 이사. 자네 잠시 동안 쉬어야겠어. 한 일 년만 쉬었다가 다시 나올 수 있겠나?" "아니, 무슨 말씀입니까?" 규태는 그 순간에도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다. 사주가 다시 말했다. "자네 그동안 한번도 쉬지 못했어. 그리고 우리 회사가 지금 인사 적체 현상에 빠졌다구. 자네도 알고 있을 거야. 그런데 누굴 빼자니 마땅한 사람이 있어야지. 그래서 정 이사더러 잠시 쉬라는 거야. 이건 정 이사가 그동안 남보다 열심히 뛰었기 때문에 휴가를 주는 걸로 받아들이면 좋겠네." 규태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를 물러나왔다. 그는 사주의 그런 말이 사람을 해고할 때마다 늘상 사용하는 상투적 수법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차마 자기에게 그런 말을 사용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직 서른아홉의 나이 아닌가? 어떻게 이 나이에 은퇴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그날로 그는 사표를 쓰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도 그의 실직을 실감하지 않는 눈치였다. 사주가 쉬라고 했다면 곧 다시 그를 부른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쪽 확률은 지극히 적었다. 규태는 기대를 갖지 않았다. 오랫동안 큰 회사의 조직 속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혼자 무슨 사업 같은 걸 한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 한동안 책방을 하나 차려볼까 생맥주집 같은 거라도 하나 운영해볼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에 뛰어들기가 겁났고 썩 마음이 내키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책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혼자 거실에 남은 규태는 우선 텔레비전을 켰다. 자정이 지나면 국내 방송사의 프로그램은 모두 막을 내렸기 때문에 그는 미군 방송까지 끝까지 시청했다. 재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할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시간을 보낼 방법이 없는 것이다. 미군 방송까지 막을 내리면 그는 석간 신문을 펼쳐 들고 광고란까지 글자 하나도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읽어내려 갔다. 전에는 사실 신문도 자세히 읽을 시간이 없었다. 정치면이나 사회면 기사의 제목이나 보고 경제면 기사나 조금 눈여겨 봤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젠 광고란의 일단짜리 광고까지 세밀하게 관찰했다. 시간을 보내는 데는 신문광고를 읽는 게 좋은 방법이었다. 한차례 신문을 독파하고 나면 새벽 세 시쯤 되었다. 이젠 정말 할일이 없었다. 규태는 갑자기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는 낮에 잠을 자야 하기 때문에 낮 외출은 거의 못하고 지냈다. 외출을 한다면 밤 시간 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한밤중에 아파트 구역을 어슬렁거린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아파트 구역은 밤이 되면 경비원들이 분주히 순찰을 돌았다. 만약 그가 아파트 마당이라도 어슬렁거리다가 경비의 검문이라도 받는다면 체면이 뭐가 되는가? 또 뭐라고 답변해야 할까? 그래서 그는 지금껏 밤외출마저 삼갔다. 그러나 오늘은 답답해서 밖으로 나가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현관 문을 열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마당은 생각보다 깜깜했다. 여기저기 등불이 켜 있지만 불빛이 몹시 약했다. 경비원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봄이었기 때문에 기온은 싸늘했다. 그는 밤공기를 마시며 아파트 마당을 천천히 거닐었다. 그가 어린이 놀이터 앞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놀이터의 벤치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처음엔 그는 무척 놀랐다. 새벽 세 시에 놀이터의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굴까? 대체 이 시간에 뭣때문에 혼자 나와 있을까? 이런 의문이 강하게 생겼다. 그러나 자기자신도 새벽 세 시에 밖으로 나와서 걷고 있지 않은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약간 안정된 마음으로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을 관찰할 수 있었다. 벤치 바로 옆에는 가로등이 있었다. 그래서 그 일대가 비교적 선명하게 보였다. 거기 앉아 있는 사람은 노인이었다. 그는 흰 옷을 입고 혼자 정면을 향해 앉아 있었는데 누가 오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돌부처처럼 꼼짝도 않고 있었다. 저 노인도 나처럼 밤잠을 잊은 사람인 모양이군. 규태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그날은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새벽에도 규태는 밖으로 나갔다. 물론 그의 새벽 외출은 놀이터에서 본 그 노인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는 새벽 외출 자체가 즐거웠고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발길이 놀이터 근처에 이르자, 그는 그 노인이 또 거기 나와 있는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놀이터로 다가갔다. 그 벤치에 그 노인은 어제와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규태는 이제는 놀라지 않았다. 그는 그 노인은 두 번째 봤다는 이유로 약간의 친밀감마저 느꼈다. 오랫동안 사람을 못 만났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도 몰랐다. 그는 또 오랫동안 가족 이외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일이 없다. 자기가 실직했다는 수치심 때문에 그리고 실추당한 자존심을 주체하지 못해서 그는 사람도 만나지 않았고 외출도 자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규태는 슬금슬금 노인 옆으로 다가갔다. 노인은 그가 다가가도 꼼짝도 않고 있었다. 마치 돌부처 같았다. 규태는 말없이 노인이 앉아 있는 벤치의 한 쪽 끝에 앉았다. 오랫동안 침묵이 흘러갔다. 그런 뒤 노인이 일어서더니 놀이터를 떠나버렸다. 규태는 몹시 실망했다. 그는 노인과 대화라도 나누기를 은근히 원했던 것이다. 노인도 사람을 싫어하는 걸까? 어쩌면 자기 신분을 감추고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밤에만 외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규태는 하는 수 없이 집으로 혼자 돌아왔다. 다음날 새벽에도 규태는 놀이터로 나갔다. 노인은 여전히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규태는 어제처럼 벤치의 한 쪽 끝에 걸터앉았다. 다시 침묵이 흘러갔다. 그렇다고 이 쪽에서 먼저 말문을 열 수는 없었다. 그건 노인에게 버릇없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질 수가 있었다. 노인에 따라서는 그렇게 까다로운 성미를 지닌 사람도 있는 것이다. 십 분쯤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노인 쪽을 바라봤다. 노인이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방금 들린 소리는 노인이 그를 향해 무슨 말을 한 소리였던 것이다.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규태는 노인에게 공손하게 물었다. "지금 몇 시쯤 됐느냐고 물었소이다." 노인이 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아 네. 세 시 조금 지났을 겁니다. 제가 방금 나올 때 세 시였으니까요." "이 아파트에 사시오?" 노인이 다시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만." "벌써 우리가 세번째 만나나 본데 구면이니까 내가 뭘 좀 물어도 좋겠소?" "실례지만 하시는 일이 뭡니까? 뭐 연구하거나 그 비슷한 일을 하는 게 아닌가요?" "아아뇨. 아닙니다. 전 놀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그냥 놀고 있습니다. 실은 얼마 전까지 직장에 나갔는데 실직을 한 겁니다. 그래서 아직은 놀고 있어요." "그랬군요. 난 또 이런 밤중에 밖에 나오는 걸 뭘 연구하다 머리라도 식히려고 그러는 줄 알았지요. 나 같은 늙은이야 밤잠이 없어서 바람이라도 쐬려고 나오는 거지만 당신처럼 젊은 사람이 이 시간에 밖에 나오는 건 흔한 일이 아니거든. 전에 어딜 다녔었소?" "기계를 제작하는 회사 관리직에 있었습니다. 직장이라곤 처음부터 거기 한 곳에만 다녔습니다." "그런데 젊은이가 지금 한창 일을 할 나이에 무슨 이유로 실직을 하셨소? 내가 까닭을 알아도 좋겠소?" "상관없습니다. 말씀을 드리죠. 제가 실직한 건 특별한 이유는 없고 밑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비켜줘야 할 처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 운이 좋았던지 나빴던지 모르지만 남보다 너무 일찍 승진을 해서 이사 자리에 있었습니다. 다음엔 사장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 자리는 아무래도 제 몫이 아니고 그래서 결국 너무 일찍 은퇴를 당한 꼴이 되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사기없이란, 기업주 말 한마디로 자리를 떠야 하니까요. 기업주는 잠시 쉬라고 말했지만 저는 그게 그만두라는 말인걸 알고 있습니다." "혹시 정말 잠시 쉬라는 뜻일 수도 있지 안겠소." "절대로 아닙니다. 저는 기대를 안해요." "그러면 앞으로 뭘 할거요? 무슨 좋은 계획이라도 가지고 있소?" "없습니다. 정말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있답니다. 마흔 살이 될때까지 남의 회사에서 지시만 받고 일을 하다보니 자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구자가 되었답니다. 저는 제가 유능한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막상 혼자 떨어져나오고 보니 자신이 얼마나 힘이 없고 약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노인은 한동안 규태를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노인은 이미 나이가 팔순이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어딘지 정정한 품위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규태는 이 노인이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란 걸 금방 느낄 수 있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노인이 입을 열었다. "당신의 처지가 어쩌면 내가 그 나이에 겪었던 경우와 흡사한지 모르겠소. 나는 이미 사업에서 손을 뗀 지 오래고 지금은 이렇게 지난날을 회고나 하면서 소일하고 있지만 나도 당신처럼 복잡한 과정을 한때는 거쳐왔다오. 내 체험이 당신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소. 난 젊었을 때 어느 일본인의 상점에서 서기로 일을 했었소. 신임도 받았고 능력도 평가받았지만 나중에 자기 아들이 자라니까 내게서 실권을 빼앗아 아들에게 모두 넘기더군. 나는 결국 그만두게 되었지. 집에서 한 일 년 놀고 있는데 그 집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게 되었소. 그 일본인이 그래서 나를 다시 찾은 거요. 나는 물론 가고 싶었으나 그때 내 아내가 극력 만류했소. 구멍가게라도 자기 사업을 해보라는 거요. 나는 자신도 없었고 겁이 났지만 결국 아내 말에 따르기로 했소. 뒷날 내가 그때 판단을 잘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지.마흔 살 정도의 남자라면 자기 일을 해봐야 하는 거요." "혹시 노인장께서는 화성 그룹의 오 회장님이 아니십니까?" 언젠가 규태도 그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노인의 얼굴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화성의 오 회장이라면 업계에는 너무 잘 알려진 얼굴이었던 것이다. "난 지금은 회장도 아무것도 아니오. 전문 경영자들에게 사업을 모두 맡기고 밖으로 나왔으니까. 나를 어떻게 아셨소?" "오 회장님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연히 뵙는 거지만 정말 영광입니다." "나 역시 당신을 만난 게 반갑소. 그런데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나라면 그 회사에서 다시 불러도 나가지 안겠소. 마흔에 이사까지 올랐다면 대단한 능력이고 자기 능력에 자신을 가져도 될 거요. 사회 경력은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볼 수 있지. 그렇다고 인생을 모두 남의 기업에서 보내고 말 거요? 왜 실패를 겁내는 거요? 가령 그런 사람이라면 나는 우리 회사에서도 고용을 하지 않을 거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소?" "잘 알겠습니다. 정말 회장님을 이렇게 뵙게 된 게 저로서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잘 모르고 살아왔고 인생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왔어요. 그러면서도 자기는 항상 남보다 뛰어나고 앞서간다는 자부심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두 헛것이었어요." "정말 그렇게 느꼈다면 이제부터라도 참된 자기를 남에게 보여줘야 하는게 아니요? 누구나 인생을 안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요. 나도 그동안 남들은 크게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들 하겠지만 나 자신에게 불만을 많이 느끼오. 돈도 벌어봤고 사업도 크게 일으켜봤지만 내 자신의 인생을 살아보지 못했소. 그저 일에만 미쳐서 그것만이 최고인 줄 알았지. 자기 인생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오. 그래서 이제서야 그걸 혼자 생각하고 후회하고 있는 중이요. 당신은 제발 나 같은 인생을 살지 마시오." 노인은 말을 끝내자, 일어서서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규태도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노인의 충고를 듣고 깨달은 게 많았다. 그때까지 그의 희망이란 사실 자기가 근무하던 회사에 사주가 자기를 다시 불러주는 것 뿐이었다. 그 가능성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는 오직 그 쪽에만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사주가 부르더라도 그는 돌아가지 않을 결심이었다. 그는 자기 사업을 개척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전에는 꿈도 꾸지 않던 일이었다. 그는 다음날 당장 외출을 시작했다. 친구들을 만나고 그동안 회사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을 찾아가서 사업 문제를 의논했다. 완구 회사를 권하는 사람도 있고 무역 회사를 권하는 사람도 있고 항공 운수업에 손을 대보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 업종들이 규태와 전혀 무관한 건 아니었다. 그는 그룹 회사에 근무하면서 여러 종류의 직종에서 근무를 한 경력이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을 만나서 사업 이야기를 하다보니 차츰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하루종일 그런 의논으로 시간을 보낸 규태는 집에 돌아오자마, 피곤해서 잠에 골아떨어졌다. 그런데 그는 잠을 자다가 문득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새벽 세 시였다. 규태는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어린이 놀이터로 달려갔다. 그런데 웬일인가? 그 노인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는 게 아닌가? 그는 빈 의자에 혼자 한동안 앉아 있었지만 노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 규태는 노인이 이승을 하직했다는 걸 알았다. 조간 신문에 화성 그룹 오 회장의 부음이 나왔던 것이다. 그 부음을 보는 순간 규태의 머리에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나도 내 자신의 인생을 살아보지 못했소. 당신은 제발 나 같은 인생을 살지 마시오." 규태는 그날은 노인의 빈소를 찾아가 조의를 표할 생각이었다. 노인은 어쩌면 그에게는 가장 소중한 스승일 수도 있는 존재였다. 20. 너무 훌륭한 남편 "여보, 미숙이 남편이 글쎄 이번에 유럽 여행을 하고 와서 미숙이에게 그러더래요. 나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선물 사왔다구. 뭔지 알아? 미숙이는 잔뜩 기대에 부풀어가지고 있는데 그애 남편이 뭘 가지고 왔겠어요?" "내가 남의 여자가 뭘 제일 좋아하는지 알게 뭐야? 뭐 구찐가 팔찐가 하는 핸드백쯤 되겠지?" "그런 거라면 내가 당신에게 묻지도 않았어요. 그런 거야 누구나 생각할 수 있죠. 하긴 당신은 자기 마누라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르는 무심한 사람인데 남의 여자 좋아하는 것까지 알 수가 있겠어요?" 또 타령이군. 아내 입에서 미숙이란 말이 나올 때부터 나는 벌써 조마조마했다. 아내의 나에 대한 불만과 불평은 주로 자기 단짝 친구인 미숙이란 여자의 남편에 빗대어 시작되고 끝이 나기 마련인 것이다. 아내의 표현을 빌자면 같은 40대 초반의 비슷한 직위와 경력을 지닌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그 쪽은 그야말로 어느 곳하나 흠잡을 대 없는 너무 완벽한 남자이자 가장이고, 우리집 가장인 나, 김만술은 그야말로 집에서 죽이 끓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거의 허깨비나 다름없는 위인이라는 것이다. 그 쪽은 무슨 남자가 너무 가정적일 뿐만 아니라 돈도 푸짐하게 집으로 가져 오고 아내 용돈도 덥석덥석 푸집하게 잘도 준다고 한다. 그래서 아내는 친구 미숙이와 만날 때마다 그 쪽에서 늘 도맡아놓고 밥값이며 차값을 내게 되기 때문에 민망해서 죽을 지경이라는 것이다. 아내가 늘어놓는 친구 남편의 모범적인 미덕은 끝이 없다. 그는 뭣보다 퇴근시간이 언제나 일정하다. 여섯 시에 퇴근하는데 그로부터 반 시간만 지나면 정확하게 자기 집 현관에 모습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 개인 시간이라든가 개인 생활이 따로 없고, 오직 하루 이십사 시간을 자기 가족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다. 오직 잠자는 시간만 제외하고 말이다. 무슨 남자가 그럴 수가 있을까? 대체 그는 친구나 회사 동료들과 오후에 대포 한 잔 기울이는 법도 없단 말인가? 나는 그 사람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너무 가족에 헌신적인 그 사람 때문에 나 같은 죄없는 사람까지 욕을 먹게 되기 때문이다. 하기야 내가 죄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나로 말하면 일 년 열두 달 가운데 퇴근해서 바로 집으로 돌아오는 날은 손가락으로 꼽아볼 정도이다. 나는 늘 밤 늦게 술에 취해가지고 갈짓자 걸음으로 돌아오곤 한다. 일요일이라고 해서 가족을 데리고 극장이나 교외로 나들이를 나가는 법도 없다. 미숙이 남편이란 사람은 일요일만 되면 새로 구입한 중형 승용차에 가족을 태우고 그야말로 이 국토가 좁다는 식으로 달리고 또 달린다고 하지 않는가. 아내는 그래서 새로 들어온 영화 얘기나 새로 개발된 관광 단지의 요모조모에 관한 얘기를 언제나 미숙이로부터 전해 듣는다. 그럼 나라는 위인은 일요일 같은 때 뭘 하는가. 뭘 하기에 가족을 하다못해 근처의 앞산에라도 데려 가지 못하는가. 나는 내 개인적인 취미가 두 개나 있다. 하나는 바둑이고 하나는 낚시질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취미가 모두 나 혼자만 해당하는 것이고 가족과는 무관한 것이다. 남들은 낚시질 가는데 아내나 가족을 동반한다는데 나는 혼자가 아니면 재미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일요일도 종일 집을 떠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아내가 나를 하숙생 혹은 허깨비라고 비난해도 나로서는 할 말이 없는 셈이다. 자, 그건 그렇고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미숙이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선물로 뭘 가져왔을까? 그보다 미숙이란 여인이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걸 선물로 가지고 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건 돈이었다. 돈도 국산품이 아니고 달러였다. 다시 아내의 해설을 들어보기로 하자. "그 남편이 가방 속에서 천 달러나 되는 돈을 내놓으면서 미숙이에게 말하더래요. '이게 내 선물이야.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 그 쪽에서 당신 선물을 살려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마땅히 물건이 없더라구. 당신이야 웬만한 건 다 가지고 있지 않겠어. 그래서, 필요없는 걸 사느니 돈을 그대로 당신에게 주는 게 더 좋을 것 같더라구. 당신이야 워낙 돈을 좋아하지 않아?' 봐요. 당신도 이걸 좀 본받으라구요. 얼마나 세심한 남편이에요?" "그렇군. 그래서 미숙 씨는 돈을 받고 좋아했나?" "그거야 물론이죠. 그 애가 돈보다 더 좋아하는 게 이 세상에 또 있나요? 자긴 겉으로는 내색을 안했지만 속으로는 고마워 죽겠더라는데요." 돈을 선물로 줬다는 말은 처음 들어본 얘기지만 듣고 보니 정말 선물치고는 실속 있는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런 선물도 그 남자처럼 돈을 풍덩풍덩 잘 벌어들이는 사람이나 가능한 일이지, 나처럼 쥐꼬리 월급 밖에는 달리 대책이 없는 사람은 흉내조차 낼 수 없지 않나? 게다가 유럽 여행으로 얘기가 발전하면 나는 더 난처해진다. 나는 결혼 십 년 동안 유럽은커녕 제주도도 한번 다녀오지 못한 것이다. 옆집에 이런 부부를 두고 산다는 건 여러가지고 불편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이웃에 지나칠 정도로 모범적인 남편이 있다는 게 내겐 여간 신경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아내는 또 어떤가? 미숙이란 친구 때문에 아내는 공연한 불행감에 시달리고 있지 않는가? 요즘 흔한 말로 상대적 불행감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지나치다는 건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 억지로 내 멋대로 해석하자면 미숙이 남편은 지나치고 나는 모자라는 편에 해당한다. 내가 뚱딴지같이 갑자기 왜 이 말을 꺼내느냐 하면 미숙이라는 그 행복한 여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일을 아내로부터 직접 들은 게 아니고 아내가 다른 자기 친구와 전화로 얘기하는 걸 옆에서 흘려듣고 사태의 대강을 파악하게 되었다. "얘, 그 남자가 그럴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니? 그리고 한둘이 아니고 몇 명씩이나 거느리고 있었다니 말이야. 도대체 그럴 시간이 어디 있었을까? 퇴근하면 곧바로 집에 들어왔다던 남자가 말이야." "미숙이는 남자가 돈 잘 주고 곰살맞게 구니까 십 년씩이나 꼼짝없이 속고 살았지. 정신은 딴 데 두고 있는 등신하고 산 거야." "얘, 그래서 너 병원에는 가봤니? 나도 가봐야겠는데 도무지 갈 마음이 안 생겨. 뭐라고 위로할 말이 없지 않아? 그 애가 자존심이 좀 강한 아이니? 식사도 안하고 말도 안한다는 거야. 그러니 지나치게 잘 하는 남자도 문제가 있더라구. 글쎄." 나는 그 마지막 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21. 아들 우리집 아이는 부잡하고 활동적이다. 좋게 보면 남자답다고 할 수 있겠으나, 지나치게 활동적인 나머지 때로는 말썽장이 구실을 톡톡히 한다. 가령 친척집이나 이웃집에 갔을 때, 거실에 놓인 물건들을 가만히 두고 볼 줄을 몰라서 반드시 손을 대고 결국은 값비싼 꽃병을 깨뜨리거나 TV의 실내 안테나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친척들이나 이웃에서는 이 녀석이 오는 것을 무척 꺼리곤 했었다. 아직 유치원에도 다니기 전의 일인데, 한 번은 아파트 근처의 쇼핑 센터에서 소동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이 사건은 수동이의 활동성과 말썽장이로서의 면목을 유감없이 드러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쇼핑 센터는 강남에서도 잘 알려진, 규모가 큰 백화점이었다. 마침 집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수동이란 녀석은 밥만 먹으면 쇼핑 센터로 나가서 살았다. 그래서 이미 그곳 점원 아가씨들 사이에는 잘 알려진 얼굴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녀석이 백화점 현관에 설치된 분수대 난간으로 올라가서 난간을 빙빙 돌다가 그만 분수대의 물 속으로 첨벙 빠져버렸다. 알다시피 그때 그곳에는 수많은 고객들이 붐비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분수대 주위로 몰려들었다. 나도 급히 연락을 받고 쇼핑 센터로 달려갔는데 수동이가 물 속에 있는 걸 보고 너무도 놀랐다. 어떻게 해서 저 높은 난간으로 올라갔을까?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아직 다섯 살짜리 어린애가 물 속에 빠졌어도 겁을 먹거나 울지 않고 도리어 그 속에서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 틈에서 아빠를 발견하자 대뜸 말하는 것이었다. "아빠, 이리 들아와. 시원한데……." 때가 삼복 더위인지라 시원하긴 했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눈길 때문에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가지고 아이에게 빨리 나오라고 호통을 쳐서 간신히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건 좀 창피한 이야기지만 수동이는 사람의 다리, 특히 여자의 다리를 만지길 즐겨 했다. 역시 네다섯 살 때의 이야기인데, 백화점 같은 델 함께 가면 녀석은 어느새 어디론가 사라지고 안 보인다. 눈치를 챈 엄마가 장난감 코너로 가보면 녀석은 다른 아이들이 몰려 있는 재믹스 세트라든가 로보트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인형들이 진열된 곳에 혼자 가만히 앉아서 여자 인형의 다리를 슬슬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다. 옷가게에 엄마를 따라 갔을 때도 엄마가 잠시만 한눈을 팔면 어느새 마네킹 쪽으로 가서 마네킹의 미끈한 다리를 익숙한 솜씨로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었다. "저 녀석 때문에 창피해서 죽겠어요. 옷가게에서 모두들 나까지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본다니까." 어느날 제 엄마가 내게 불평을 했다. "당신이 혹시 어렸을 때 그런 거 아니예요? 유전인 모양이지?" 이쯤 되면 나도 얼굴을 들지 못할 처지가 된다. 그러나 나는 여자의 다리를 만지는 취미는 어린 날이나 지금이나 가져본 기억이 없다. 그렇지만 그걸 반드시 고약한 취미라고만 나무랄 게 아니라 이 녀석이야말로 대단한 미적 감각의 소유자라고 평가해줄 수는 없을까? 여자의 몸 가운데 다리보다 더 아름다운 부분이 무엇인가? 그건 그렇다치고, 수동이의 다리 감상이 국제적으로 비약한 사건이 있었다. 제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어느 봄날 엄마와 시집 안 간 이모가 수동이를 데리고 덕수궁으로 놀러 간 일이 있었다. 정원 잔디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수동이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어떤 다리를 발견했기에 말없이 사라졌을까? 한참 찾아봤더니 백 미터 쯤 떨아진 곳에 수동이가 있었다.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거기 앉아 있는 두 사람의 서양 수녀들의 다리를 번갈아가며 어루만지고 있었다. 수녀들이 녀석을 피해 자리를 옮겨 앉으면 녀석은 다시 따라가서 서양 수녀들의 다리를 어루만졌다. 엄마가 달려가자 수녀들이 아이 엄마에게 비명을 지르더라고 한다. 이쯤 되면 미적 감각치곤 가히 광적인 것이다. 이 얘기를 듣고는 나도 약간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다섯 살인 아이에게 뭐라고 훈계를 할 것인가? 그것이 공중도덕에 어긋난다고 어떻게 설명해줄 것인가? 아들의 다리 감상은 국민학교 입학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다행히 그 이후에는 스스로 공중도덕을 체득했는지 요즘에는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지금은 부모가 모르는 장소에서 아직도 그 고상한(?) 취미를 즐기고 있는지도…….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아빠 오시는 날'이라는 행사를 했었다. 뒤늦게 결혼해서 나이 마흔에 낳은 하나뿐인 아들인데 거기에 안 갈 수가 없었다. 그 때까지 나는 이 녀석이 단순히 부잡하고 개구장이고 부끄럼이라곤 전혀 모르는 아이인 줄만 알았다. 나는 면도를 말끔히 하고 정장을 하고 유치원에 나갔다. 그야말로 아들에게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아빠 노릇을 해 보겠다는 결연한 각오를 가지고 있었다. 유치원에서는 아빠와 아들이 어울리는 공식 행사를 하고 나서 자유 여흥시간을 또 가졌다. 수동이는 공식 행사 때는 그런 대로 아빠와 함께 어울렸다. 그런데 웬일인지 별로 신나는 기색이 아니었다. 다른 때라면 모처럼 아빠와 어울리는데 그야말로 천방지축으로 뛰어놀 녀석이 아닌가? 그런데 자유시간이 되었을 때 녀석은 아예 아빠 옆에는 오지도 않았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자기 아빠와 즐겁게 어울리는데 말이다. 내 마음이 그다지 즐겁지 못했던 건 물론이었다. 나는 야속하고 슬펐다. 내 얼굴 어디에 검정이라도 묻었기에 녀석이 다가오지 않는 것일까? 아빠가 그렇게도 못난이로 보였단 말인가? 이 녀석은 어디로 갔는지 행사가 끝날 때까지 모습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그 날 아이가 집에 왔을 때 나는 화가 단단히 나서 아이에게 물었다. "너 이 녀석, 오늘 왜 아빠를 따돌리고 혼자만 놀았어? 그럴 거면 뭣 때문에 아빠를 오라고 한 거야?" 수동이가 침울하고 심각한 표정이 되어싸. 내게 차마 진상을 말하기가 어렵다는 얼굴이었다. "다른 애들이 할아버지랑 왔다고 나를 놀려. 아빠더러 할아버지래." 그랬었구나-. 이건 전혀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고보니 거기 온 아빠들은 모두 서른 안팎의 젊은 아빠들 뿐이었다. 게다가 나의 백발은 또 어떤가? 마흔여섯 살에 백발까지 곁들인 아빠는 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 마흔여섯이라면 대학생 아들을 둘 나이지, 유치원 학부모가 될 나이는 아니다. 그런데 수동이 녀석도 부끄러울 때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첫 발견이었다. 그 이유가 좀 씁쓸한 것이긴 해도 말이다. 그게 그렇게도 창피했을까? 외국 수녀 다리도 태연하게 만지던 녀석이 나이 많은 아빠를 두었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창피했을까? 22. 금연 연습 그가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결심한 건 무척 오래 전의 일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와서 지금 편집부장으로 근무하는 출판사에 취직을 할 때까지도 담배라는 걸 몰랐었다. 그러다가 직장에 나가기 시작한 지 삼 년만에 담배를 배웠다. 그런데 늦게 배운 도둑이 어쩌더라고 그는 금방 골초가 되어버렸다. 하기야 출판사의 편집과 교정 일이라는 게 워낙 골치 아픈 일인지라 담배라도 피우지 않고는 버틸 재간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 그는 일찌기 담배를 끊겠다는 결심을 했을까? 가령 요즘 누가 금연을 결심했다면 그 이유는 빤한 것으로 대개 한두 가지로 요약이 된다. 첫째는 건강에 막대한 지장을 주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점점 댐배 피울 장소가 사라져가는 건 물론이고 끽연자를 싫어하고 기피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택시 운전사들도 손님이 손가락 끝에 담배를 끼고 있으면 차를 안 세우고 그냥 달아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무척 오래 전에 그가 금연을 결심한 이유는 그런 상식적이고도 일반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금연을 결심한 시기는 그가 결혼했던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그때 아직 직장의 초년병이었는데 결혼을 하자 그도 남들처럼 신부와 함께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다. 첫날 저녁 때 호텔방의 창가에 앉아 그는 한 대의 궐련을 맛있게 피우고 있었다. 그때 샤워를 막 끝내고 나오던 신부, 즉 지금의 아내가 말도 없이 뒤에서 남편의 담배 피우는 모습을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뒤늦게 인기척을 느낀 그가 돌아보며 물었다. "뭘 그리 오래 보고 있지?" "영철 씨 담배 피우는 모습이 하두 멋있어서 보고 있는 거예요. 하루에 몇 가치나 피우세요?" "그렇게 말하면 답변하기 곤란하지. 몇 갑이냐고 물어야 답변이 쉬울걸. 난 두 갑 정도 피우고 있어." "뭐라구요? 두 갑이나 피운다구요?" 신부가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뭘 그리 놀래고 있어? 세 갑씩 피우는 골초도 있는데." "한 갑에 오백 원이면 하루에 영철 씨는 천 원씩이나 연기로 날리고 있군요. 그 말 들으니까 담배 피우는 게 조금도 멋있어 보이지 않아요. 당신 나더러 살림 알뜰하게 하라고 하면서 당신은 계속 연기를 날릴 거예요? 그래가지고 언제 집 장만을 하죠?" "그럼 한 갑으로 줄여볼까, 결혼 기념으로 말이야." "당신 말 잘했어요. 한 갑이 아니라 아주 끊어요. 그렇지 않으면 나 살림 알뜰하게 할 자신 없어요. 난 오 년 뒤에 셋방에서 탈출한다는 꿈을 갖고 있는데 이 꿈을 실현하자면 당신이 담배부터 끊어야겠어요." "알았어. 한번 끊어볼게. 대장부 결심인데 설마 실패야 하겠어." 영철은 정말 신부 앞에서 맹세했다. 그러니까 그가 금연을 결심한 이유는 건강 때문이 아니라 돈 때문이었고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집을 마련하기 위한 아내의 알뜰 작전에 협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정말 며칠 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러다가 회사 화장실에서 살며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돈 때문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게 갑자기 몹시 우스꽝스럽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아내는 크게 실망했지만 그렇다고 두고두고 그 문제로 남편을 들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천하의 고집장이인 남편이 들볶는다고 담배를 끊을 위인이 아닌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담배를 끊지 않았지만 그들 부부는 십 년만에 조그만 아파트도 마련했고 그리고 뭣보다 그들 부부의 소중한 보물인 아홉 살먹은 아들 녀석도 슬하에 두고 있었다. 물론 그가 금연을 실천했다면 십 년만에 아파트를 마련하지 않고 칠 년이나 육 년만에 집장만을 했을지는 모를 일이다. 그는 담배를 줄창 즐기며 살아왔다. 그러다가 그가 두 번째로 금연을 결심한 일이 있었다. 삼 년전이었는데 그는 텔레비전의 저녁 프로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화면에 갑자기 율 브린너가 나왔다. 율 브린너가 누구라는 것쯤은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일이다. 그가 담배로 인한 암으로 얼마 전 이승을 떠났다는 것도 웬만한 애연가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율 브린너는 죽기 전 지상에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하여 그야말로 대배우답게 금연 프로에 출연했는데 그가 그날 저녁 본 프로가 바로 그 프로였다. "나는 담배로 생명을 잃게 되었으니 당신은 지금 담배를 끊으시요." 몰골이 사납게 변해버린 왕년의 대배우가 그 큰 눈으로 바로 김영철 자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율 브린너의 그 한마디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당장 담배를 피우지 않기로 작심했다. 그 결심은 사흘간 유효했다. 사흘만에 그는 저녁 식사를 끝내고 나서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때 그는 율 브린너에 대해 이런 생각을 했었다. '자긴 실컷 담배를 피우고 괜히 남에게 겁을 주다니. 비겁한 짓 아닌가.' 그는 다시 끽연을 마음껏 즐기는 생활에 젖어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고집장이에게도 임자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그가 드디어 임자를 만난 것이다. 며칠 전 그는 아홉 살짜리 아들을 앞에 두고 훈계를 하고 있었다. 그 녀석이 하루 한 시간씩 피아노 연습을 하겠다고 아빠와 약속을 해놓고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그는 준엄하게 아들에게 말했다. "사내 녀석이 한번 결심한 건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하지 않느냐 말이야." "피이, 아빠는 맨날 담배 끊는다고 결심하고 금방 까먹으면서 내게만 지키라고 그래." 김영철은 할말이 없어 천정만 바라봤다. 옆에서 아내도 그를 공격했다. "그봐요. 아빠가 모범을 안 보이면 소용이 없어요. 당신 아이 가르칠 생각은 관둬요." 김영철은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제야말로 진짜로 금연을 끝까지 실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를 가르칠 수 없다는 걸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좋다, 그럼 아빠가 담배를 진짜로 끊겠다. 두고봐. 이번에는 정말이니까." 23. 아내의 생일 "여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시죠?" 아침에 출근하려고 현관 문을 열고 그가 막 나오는데 뒤에서 아내가 물었다. 너무 갑작스런 질문이라 김오규는 손으로 뒤통수를 만지작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렸다. 무슨 날일까? 장인의 환갑은 지나간 지 오래이고 장모님도 작년에 환갑 잔치를 치렀었다. 그럼 무슨 국경일일까? 하긴 국경일이라면 이렇게 이른 아침에 회사로 나가느라고 생고생은 하지 않을게 아닌가? 그럼 미령이가 학교에서 무슨 춤이라도 춘단 말인가? 미령이는 김오규 집안의 귀염둥이 고명딸로 국민학교 2학년인데 작년부터 고전춤을 배우고 있다. 본래 고전춤은 아내의 전공이었는데 결혼과 동시에 춤추기를 단념한 아내가 그 미련을 잊지 못해 딸에게 춤을 배우게 한 것이다. 제 엄마를 닮았는지 미령이는 춤을 곧잘 추었다. 그래서 일 학년이었을 때도 학급 대표로 뽑혀 나가 스승의 날에 선생님들 앞에 춤솜씨를 뽐냈었다. 가만있자 스승의 날이 언제더라? 김오규가 빨리 생각나라고 손바닥으로 머리통을 두드리고 있는데 눈앞에 있는 아내의 얼굴이 시퍼렇게 일그러졌다. 아내의 눈에서는 금방 눈물방울이라도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아차! 또 실수했군. 그제서야 김오규는 사태를 파악했다. 그렇군. 아내의 생일이었군. 그것도 모르고 엉뚱한 곳으로 헤매고 있다니. 자기 생일 문제가 아니라면 만사 쾌활하고 낙천적인 아내의 얼굴 표정이 저렇게 볼품없이 일그러질 까닭이 없는 것이다. 자기 아내 생일을 기억하느냐 못하느냐가 자기 아내에 대한 애정을 점쳐주는 기준이란 말을 김오규는 바로 결혼 이듬해에 자기 아내로부터 들었었다. "알았어. 당신 생일이란 건 알고 있다구." "엉터리, 내가 화 내고 있으니까 이제서야 생각났죠?" "아냐. 몇 번짼데 내가 그걸 까먹겠어? 벌써 열 번씩이나 치른 행사를 잊어먹는 바보가 어디 있어? 걱정 말고 기다려. 퇴근하는 즉시 집으로 달려올 테니까." 그제서야 아내는 찌푸렸던 얼굴을 풀고 그를 놓아주었다. 그러나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7시까지는 도착해야 되요, 아시겠어요?" "응, 알았어." 엘리베이터 속에서 김오규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았다. 반드시 땀을 흘렸다기보다 땀을 흘린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7시까지 남편이 집에 도착해야 한다는 건 그때부터 생일 파티를 위해 가족들이 함께 외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일 파티래야 사실은 좀 깨끗한 식당으로 가서 저녁 한끼 외식을 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아내는 이 한끼의 외식을 무척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일 년 열두 달 가운데 외식을 하는 기회란 그들 가족에겐 두어 차례 뿐인 것이다. 아내는 심한 구두쇠 노릇으로 살림을 꾸려왔다. 그렇지 않았다면 김오규의 알량한 수입으로 결혼 십 년만에 비록 스무 평짜리지만 이 아파트를 마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내는 미장원 출입도 거의 하지 않았고 옷도 언니로부터 얻어다 주로 입었다. 그런 아내가 고맙고 측은해서 김오규는 아내의 생일 파티만은 꼭 잊어 먹지 않으려고 했는데 워낙 회사의 격무에 시달리다보니 번번이 아내의 생일을 잊고 말았다. 결국 아내가 다시 그날을 환기시켜줌으로써 그는 아내를 위해 저녁 한턱을 내곤 했었다. 그게 십 년째 내려오는 그들 부부의 전통이었다. '오늘 저녁은 어디로 갈까? 조금 돈이 들더라도 영동에 새로 문을 열었다는 그 중국 요리집으로 갈까? 미령 엄마는 중국요리를 좋아하지. 미령이도 탕수육을 좋아하고.' 전철을 타고 가면서 김오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ㅆ. 그는 서른일곱 살이지만 아직 조그만 무역 회사의 대리에 불과했다. 그는 봉급에서 시골의 부모님을 위해 삼분의 일을 송금하지 않으면 안되는 입장이었다. 장남이었던 것이다. 그러자니 주머니 사정이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봐, 김 대리. 오늘 근무 끝나고 나가지 말고 기다려." 오후로 접어들어 퇴근 시간이 가까와 올 때쯤 불쑥 김오규에게 이런 말을 한 사람은 직속 상사인 무역부의 장 부장이었다. "아니, 왜 그러죠?" 너무 놀라서 김오규는 남들이 이해못할 만큼 큰소리로 물었다. "사장이 한턱 낸대. 무역부 식구들이 수고했다고 우리 부 식구들만 초대하는 거야. 김 대리도 곧 승진해야 할 처지인데 이런 기회에 사장과 얼굴을 익혀두는 게 좋을 걸." "난 안되겠는데요. 집에 일이 있어요." "아니, 일이라니? 직장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어? 사장이 모처럼 초대하는 데 빠진다는 건 말도 안돼. 내 체면도 안 서고 말야. 집에 전화로 알리면 되지 않소?"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예요. 난 가 봐야 해요." "그 일이 대체 뭔데 그러오?" "오늘이 아내 생일이예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난 아내와 저녁을 함께 먹어야 한다구요." "하하하하, 난 또 뭐라고. 김 대리는 너무 고지식한 게 탈이야. 아, 그까짓 아내 생일 가지고 뭘 그러오? 누군 아내도 없는 줄 아시오? 여자들이야 직장 일을 이해해야지. 그걸 못하면 어찌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겠소? 전화로 일찍 못 간다고 이야기하시오." "안됩니다. 난 가야 해요." "아 참, 딱한 친구로군. 그럼 난 사장님께 뭐라고 말하지? 김 대리는 어부인 생일 때문에 그냥 들어갔다고 말하나? 이봐요. 난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라구요. 남아 있어요." "사실대로 말씀드리세요. 부장님께 미안하군요." 장 부장 말마따나 김 대리는 너무 고지식한게 탈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태 대리밖에 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야 어떻든 김오규는 사람의 초대를 묵살하고 그날 일찍 집으로 와버렸다. 아내에겐 그런 말을 하지 않고 그는 아내와 미령이와 함께 강남의 그 중국요리집으로 가서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그러나 한편 마음속에 걱정거리가 없는 게 아니었다. 사장은 나를 두고 어떻게 생각할까? 아이구, 쪼다 같으니, 이런 친구는 승진시켜도 무능해서 안돼.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혹은 이런 괘씸한 놈, 감히 사장 초대를 마다하고 마누라에게 달려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김오규는 사실 이런 걱정 때문에 맛있는 중국 요리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다. 다음날 김오규는 회사로 나갔는데 그는 몹시 불안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회사 건물 입구에서 사장과 마주쳤다. 그가 사장에게 인사를 했을 때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사장이 먼저 김오규 쪽으로 달려오며 그의 손을 덥석 붙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아, 김 차장. 어젠 내가 미안했었소. 부인 생일인 줄도 모르고 사람을 붙들려고 했으니 말이오. 그래서 회식을 오늘로 연기했소." "사장님, 전 차장이 아닙니다." "어제부로 승진한 걸 내가 깜빡 잊고 말을 안했구려. 어제 회식자리에서 발표하려고 했던 거요." 김오규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24. 아내는 멋장이 "여보. 제발 날 살려줘, 그 밍크 코트 좀 벗어버리고 그냥 검정색 코트를 입으라구. 당신 그렇게 나가면 회사 사람들이 나더러 뭐라고 하겠어? 또 사장님은 어떻고? 아마 내가 회사 공금이나 훔쳐다가 당신 옷 사준 줄 알고 당장 나를 해고해버릴 거야. 제발 평범하고 수수하게 입고 나가자구." "흥, 당신이 평범하다고 해서 나까지 평범하라는 법이 있어요? 난 안 나갔으면 나갔지, 거지처럼 꾀죄죄하게 하고는 못 나가요. 당신 혼자 가세요. 난 집에서 연속극이나 볼래요." 아내는 소파에 털썩 주저 않았다. 김인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회사에서 부부 동반 회식이 있다고 반드시 아내를 동반하고 나오라는 사장님의 엄명이 내릴 때부터 김인후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슨 고민이냐 하면 서른다섯에 이제 겨우 대리밖에 되지 못한 주제에 지나치게 사치스런 아내를 데리고 회사 사람들 앞에 나가는 것이 고민이었던 것이다. 그의 아내는 남들도 알아주고 김인후 자신도 인정하는 멋장이였다. 얼굴도 비교적 말쑥한 편이고 몸매도 쑥 빼어난 데다 특히 옷을 입는 취향이 까다롭고 옷에 대한 집념, 그리고 자신의 옷맵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여자였다. 보통 남자라면 아내의 그런점이 자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인후에겐 자랑은커녕 고민거리고 두통거리였다. 비싼 옷이란 공짜로 주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어쩌다 외식이라도 할려고 아내와 함게 길을 걷다 보면 사람들의 눈길이 자기는 거들떠도 안 보고 아내에게만 집중적으로 쏠린다. 그런 때 김인후는 상대적으로 자기비하 감정에 빠져 자기는 서른다섯에 아직 대리밖에 되지 못했고 그리고 옷차림이나 외모마저 볼품이 없다는 슬픈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김인후에겐 멋장이 아내가 자랑이 아니라 하나의 부담이고 짐이었다. 그는 제발 아내가 평범하고 수수하게 자기 분수껏 옷을 입어주기를 바랐다. 하다못해 회사 동료들과 부부 동반으로 회식을 하는 그날 하루만이라도. 그걸 바라고 아내에게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그는 아내가 결코 평범한 옷차림으로 그 자리에 나가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어떤 여자인가?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퇴원할 때도 하이힐을 가져다가 그걸 신고 나온 여자가 아닌가? 그리고 그들이 결혼을 막 해서 그가 첫 월급 봉투를 전해줬을 때 그 금액의 절반을 들고 명동으로 달려가서 하늘거리는 여름용 원피스를 산 여자가 아닌가? 그 바람에 그 달에는 생활비가 일찍 바닥이 나서 하는 수 없이 처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봐, 당신 그 밍크 코트는 다른 때도 얼마든지 입을 수 있지 않아? 하필 오늘 꼭 입어야만 하겠어?" "이 옷은 바로 오늘 같은 날 입으려고 비싼 돈 주고 산 거예요. 당신이 이 옷 때문에 기죽을 거 뭐 있어요? 난 당신 체면 세워 줄려고 일부러 애를 썼는데. 참 남자들은 이상하지. 다른 여자가 멋을 내면 좋게 봐주고 자기 아내가 멋좀 내면 얼굴을 찌푸리고 야단이야. 그건 구식이고 못난이예요. 두고봐요. 회사 사람들이 당신을 욕하나 부러워하나." "에이, 할 수 없군. 그럼 이렇게 하지. 식당에 들어갈 때는 당신 먼저 들어가라구. 난 조금 뒤에 들어갈게. 우리가 함께 들어가면 사람들이 놀라서 뒤로 나자빠질 거야. 난 아무래도 그 순간을 견딜 자신이 없다구." "그거야 좋을 대로 하세요." 결국 이런 식으로 타협이 성립되었다. 김인후는 멋장이 아내와 함께 택시를 타고 회사 부근의 호텔로 나갔다. 그 호텔 부페 식당에서 회식을 하기로 정했던 것이다. 그의 아내가 약속대로 먼저 식당에 들어갔고 김인후는 5분쯤 지나서 어슬렁어슬렁 뒤늦게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김인후가 식당으로 들어가보니 아내는 사장님과 전무님 사이에, 그러니까 최고의 상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리는 물론 대리 따위가 접근할 자리가 아니었다. 김인후의 자리는 맨 끝에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아내와 떨어져서 그 끝자리에 앉았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불안하고 불쾌하기도 했지만 차츰 그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밍크 코트를 입은 그 멋장이 여인이 자기 아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는 사장님과 전무 사이에서 가만히 입을 닫고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옆의 사장과 쉴새 없이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대체 저 여자는 처음 만난 사장님과 무슨 얘기를 저토록 열심히 하고 있을까? 혹시 남편의 무능과 못난이 근성을 흉보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 그건 그렇고 또 사장님은 처음 만난 부하 직원 아내, 그것도 일개 대리의 아내와 무슨 얘기를 저토록 재미있게 하고 있는 걸까? 비록 그 여인이 밍크 코트를 입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김인후는 이런 생각을 하느라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김인후는 화가 나서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김인후는 화가 나서 아내에게 한마디도 던지지 않았다. 아내 역시 별다른 말이 없었다. 다음날 김인후는 회사에 나가자마자, 사장님의 호출을 받았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옳지, 올 것이 온 게로구나. 사표를 쓰라고 하겠지. 하지만 공금횡령으로 몰아부치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사장실로 들어갔다. "이봐, 김 대리. 거기 좀 앉아." 사장의 표정이 그런데 뜻밖에도 부드럽고 밝았다. 김인후는 소파에 엉거주춤 앉았다. "자네 이제 봤더니 아주 근사한 사람이더군. 아내를 그렇게 멋장이로 만드는 남자가 진짜 근사한 사람이야. 자네 아내를 보고 나는 자네에게 감탄했어. 우리 회사처럼 여자 옷 수출하는 회사에선 바이어를 상대할 때 그런 멋장이 여성을 내세워야 하는 건데 우리 회사 미스들 중엔 그만한 멋장이가 없단 말씀이야. 난 자네 아내가 식당에 들어올 때 첫눈에 저런 여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자네에게 안 보내고 일부러 나와 이야기를 하게 했던걸세. 이번에 동부인을 시킨 목적이 뭔지 아나? 직원 부인 가운데서 옷을 잘 입는 사람 두어 명 선발해서 우리 회사 특근 사원으로 채용할려고 했던 거야. 그런데 내 눈에 든 사람은 자네 부인 한 사람 뿐이라구. 자네 부인은 자네 의향에 따른다고 하더군. 자넨 어떤가?" 김인후는 얼떨떨하기만 했다. 사장님이 농담을 하지 않나 하고 그는 의심을 했다. 그러나 사장님은 어디까지나 진지했다. 사표를 쓸 줄 알고 겁을 먹고 들어온 김인후는 그것과는 정반대의 제안을 받고 어리둥절해버렸다. 그래서 그는 한동안은 답변도 못하고 있었다. 25. 아침의 행사 우리집에는 여름만 되면 늘 우산 때문에 걱정이다. 우산이 없다거나 남보다 근사하고 특수한 우산을 사용하기 때문에 걱정이란 말이 아니다. 아들이나 아빠나 건망증이 심해서 우산을 잘 잃어버리기 때문에 우산을 자주 사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새 우산을 사도 나는 술집이나 기원 같은 데 들렀다 나오 ㄹ때는 우산 따위는 까맣게 잊고 나오기 일쑤이다. 새 우산을 여름 장마철에 일주일 정도 잃지 않고 사용했다면 그건 그래도 오래 사용한 편이다. 하나뿐인 국민학교 3학년생 외아들은 또 어떤가? 하기야 부전자전이니까 이 녀석도 건망증이 어느 수준은 도달해야 제 아빠의 아들이라는 증명이 될 ㅓ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아빠보다 적어도 건망증이라는 점에서는 한술 더 뜬다. 이 녀석은 우산을 학교에 버려두고 집에 와서도 엄마가 그걸 지적할 때까지는 그 문제를 깨닫지 못한다. 나는 주로 우산 건망증이 심한 편이지만 아들녀석은 가지수가 다양하다. 엄동설한에 제 엄마가 털장갑이나 목도리를 만들어 주면 한번 사용하는 것으로 그 물건과 작별을 고한다. 장갑이나 목도리를 한번 휴대하고 나갔다 하면 그 물건을 다시 구경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산 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무리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여름 장마철에 우산도 없이 어떻게 지내나? 결론이 그렇다고 귀한 외아들까지 장대비를 맞고 학교에 가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아내가 이 집 저 집으로 아침만 되면 우산을 빌리러 가게 된 것이다. 남의 우산은 그럼 잃어버려도 좋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남의 우산을 빌려와 이건 남의 우산이니까 절대로 잃어버리면 안된다는 주의를 아들에게 주면 신통하게도 녀석은 이 우산만은 꼬박꼬박 집으로 다시 들고 돌아온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아침에 남의 집으로 우산 빌리러 가는 아내 처지는 딱하고 딱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날도 아내는 바로 앞집으로 우산을 빌리러 갔다. 앞집 사람들이 한 달 전 새로 이사온 사람들이어서 아내와 그 집 부인이 아직 그다지 친한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산을 빌려가지고 돌아온 아내가 넋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여보, 나 이상한 걸 봤어요. 아무래도 무슨 일인지 이해가 안가요." "무슨 일인데 그러오?" "아니, 아무것도 아니예요." 아들녀석이 아직 현관에 서 있었기 때문에 아내는 내게 눈을 꿈벅했다. 빌려온 우산을 들고 아들이 나가고 나서 그제서야 아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글쎄 내 이야기 좀 들어봐요. 내가 초인종을 누르니까 앞집 부인이 한참만에 문을 열더라구요. 그런데 문을 활짝 열지 않고 마치 집안에 뭘 숨겨놓고 있는 사람처럼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말을 하지 않겠어요? 그 여자는 재빨리 우산을 내게 주고는 또 뭣에 쫓기는 사람처럼 황급하게 문을 닫더라구요. 글쎄. 아 그러고 보니까 나더러 다음에 보자는 인사말도 않고 들어가 버렸어요." "쳇, 당신은 과민이야. 뭘 그걸 가지고 그래. 아침에는 누구나 남이 찾아오는 걸 싫어하는 것도 모르오?" "아이구, 그게 아니래두요. 난 다른 걸 봤다구요. 빼꼼하게 열린 문틈 새로 봤는데 그 집 남자가 양복을 입고 현관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거예요. 그 옆에는 또 그 집 고등학생 아들이 역시 가방을 들고 부동자세로 서 있었어요. 중학생 딸도 그 옆에 그렇게 서 있었고. 마치 선생님 앞에서 벌을 서는 사람들 같았어요. 말도없이 그렇게 서 있는 이유가 뭘까요? 또 그 부인이 그렇게 나를 보고 당황한 까닭이 뭘까요?" 아내 말을 듣고보니 나도 머릿속에 혼란이 왔다. 나는 앞집 남자가 나이가 몇인지 직업이 뭣인지 아직 모른다. 아파트에서는 특별히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아니면 이런 경우는 허다하다. 그런데 직업이 뭐든 아침에 아빠와 아들 딸이 출근과 등교 직전에 현관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이유가 뭘까? 혹 그들은 순국선열들에게 묵념을 올리고 있는 것일까? 애국심과 선열에 대한 흠모의 정이 남다른 사람이라면 있을 법한 일이다. 내가 이런 말을 했더니 아내는 사람을 웃기지 말라고 내게 핀잔을 줬다. "그럼 부인이 남편과 아들 딸을 세워 놓고 훈계라도 하고 있다는 거야?" "차라리 그 편이 유망하네요. 그 집 여자는 좀 대가 세게 생겼어요." "아무리 대가 세기로서니 아침부터 자기 마누라 앞에서 훈계 듣는 남자가 어디 있겠어? 그런 일은 직장에 가서도 얼마든지 겪을텐데 말이야." "그야 그렇죠.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으니까 상상을 해보는 거죠. 내일 우산을 돌려주게 되면 일부러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춰 그 집에 다시 가봐야겠어요. 또 그렇게들 부동자세로 서 있는지 어떤지 좀 보게요." 그날 오후에 비는 그쳤다. 그래서 아내는 다음날 출근 시간에 맞춰 우산을 들고 그 집으로 갔다. 우산을 돌려주고 온 아내는 또 어제와 같은 광경을 목격했노라고 말했다. "틀림없어요. 그 사람들 매일 현관에 서서 무슨 행사를 하는 게 틀림없다구요. 난 우산을 돌려주고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들어볼까 하고 서 있다가 사람이 나올까봐 그냥 왔어요. 밖에서는 소릴 들을 수가 있어야죠." "그렇게 관심이 많으면 아주 맞대놓고 뭘 하느냐고 물어보면 될게 아냐? 오늘이라도 찾아가서 커피라도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유도해보라구. 당신 그런 일 잘 하지 않아?" 사실은 아내가 자꾸 그러니까 나도 그 행사가 뭔지 궁금했다. 그런데 아무리 앞집이지만 남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길이 간단치 않았다. 요컨대 직접 만나서 물어보는 수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내는 붙임성이 좋은 편이지만 그녀도 당장 그 집에 가는 건 쉽지 않았던지 한동안 그 이야기는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났을까? 드디어 아내는 앞집 여자와 단둘이 커피를 마실 기회를 가졌던 모양이었다. 그날 아내는 앞집 여자로부터 그 행사 내용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아내가 내게 전한 그 내용이란 이런 것이었다. "여보! 당신이 그 집 좀 본받아 봐요. 오늘 난 그 이야길 듣고 그 집 여자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더라구요. 그 남자는 트럭에 옷을 싣고 다니며 아파트 단지나 큰 회사 같은 데 가서 옷을 팔고 있대요. 그런데 몇 해 전까지는 장사가 안되어 죽을 고생을 했다지 뭐예요. 그러다가 어느 날은 이 남자가 아침에 나가면서 자기 마누라 앞에서 부동 자세로 서서 이런 말을 하더래요. '부인, 오늘은 열심히 노력해서 돈을 많이 벌어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은 정말 돈을 많이 벌어 왔대요. 그래 그 뒤부터 매일 아침 현관에서 '부인, 오늘도 돈 많이 벌어오겠습니다.'하고 맹세하는 습관이 생겼다나요. 오죽 답답했으면 그런 말을 아침에 하고 나갔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장사도 잘되고 돈도 많이 벌었다지 뭐예요. 또 하나 이상한 건 아빠가 그러니까 애들도 따라서 '엄마, 오늘도 공부 열심히 하고 오겠습니다.'하고 맹세를 하기 시작했는데 정말 거짓말같이 그 뒤부터 애들이 공부를 잘하게 되었다니 알 수 없는 일이죠. 그게 자기 최면이라는 걸까요?" 아내는 우리집에서도 그 비슷한 행사를 하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하는 것 같았다. 26. 엘리베이터 아내는 먼저 식사를 끝내고 3층으로 내려갔다. "나 먼저 내려가서 옷 구경 좀 하고 있을게요. 당신은 담배까지 피우고 천천히 3층으로 오세요." 3층 여성 의류 코너가 있고 6층에는 식당들이 있었다. 아이옷과 전화기와 유리 그릇 몇 가지를 사고 나서 기환이 내외는 6층으로 올라가서 만두국을 먹었다. 아내는 본래 만두국을 좋아하고 그래서 만두국을 남편보다 두 배의 속도로 빨리 먹어치웠다. 기환이는 먹는 속도가 아주 느린 사람이고 게다가 음식을 먹고 나면 담배까지 피워야 한다. 이 백화점에서 눈치 안 보고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장소란 식당 밖에 없었다. 아내는 옷 구경이 유일한 취미였다. 백화점을 들렀다가 옷 구경을 하지 않고 나가는 법이란 없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옷을 사는 게 취미인데 무작정 옷을 사는 게 아니고 그 방면의 베테랑답게 사려고 하는 옷을 세 번 네 번 찾아가서 거듭해서 관찰하고 검토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아내는 즐긴다. 그런 과정을 모두 거친 다음에야 그녀는 그 옷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아내가 먼저 3층으로 내려간 뒤 기환은 만두국을 다 먹고 담배까지 한 대 피웠다. 담배를 피우면서 그는 오늘은 아내가 옷을 구경하는 걸로 그쳐주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남자들은 어찌되었건 자기 호주머니에서 돈이 당장 안 나가 주기를 바라는 것이 상정이다. 그는 담배를 피운 뒤 식당에서 나와서 3층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순간에 문이 열렸다.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곧 뒤따라 여자 한 사람이 들어섰다. 수용 공간이 아주 넓은 엘리베이터 속에 기환과 그 여자 두 사람만이 타고 있었다. 그 여자는 검은 원피스를 입었고 서른 살에서 적어도 몇 해는 더 지난 나이의 여인으로 보였다. 그녀는 체격이 좋은 편이고 화장을 짙게 하고 있었다. 너무 화장을 짙게 했기 때문에 기환이 대뜸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본 순간 그러나 기환은 곧 그녀가 명혜란 걸 알았다. 명혜가 스물세 살 때 헤어졌으니까 꼭 12년 만의 해후였다. "아니, 명혜 씨 아닙니까?" 저도 모르게 기환은 소리를 높였다. 중년이 되었고 옛날의 명혜답지 않게 화장까지 짙게 한 명혜가 그제서야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어머나!" 그녀는 그 외마디 뿐으로 곧 얼굴을 벽쪽으로 돌리고 돌아섰다. 기환의 기분은 악수를 하자고 손이라도 내밀고 싶지만 그는 지금 물건을 양 손에 들고 있어서 꼼짝할 수 없었다. 명혜는 표정이 어두웠다. 그녀가 왜 표정이 어두운지 기환은 대충 알고 있었다. "몇 층으로 가세요?" 명혜가 물었다. "3층입니다." 명혜가 3층과 1층의 숫자를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하강을 시작했다. 아니, 12년만에 만나서, 그것도 극적으로 만나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몇 층으로 가세요? 이 말 뿐이란 말인가? 기환은 심정이 좋지 않았다. 옛날에도 그렇더니 지금도 이 여자는 나에겐 쌀쌀맞구나. 그러나 기환은 지금 명혜가 왜 자기를 기피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었다. 명혜는 이혼녀고 적어도 그녀는 지금 행복하지 못하다. 더 멋진 행복을 찾아가기 위해 자기가 버렸던 남자를 결코 행복하지 못한 시간에 만나는 건 참혹한 기분이리라. 기환은 풍문으로 명혜가 남편과 헤어지고 생계를 위해 술집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편 시원하기도 하고 한편 연민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마주칠 줄은 정말 몰랐다. 명혜는 남자를 외면하고 벽만 보고 있었다. 기환이 물었다. "어디 사세요?" "방배동에 있어요." "여긴 자주 오시나보죠?" "아니, 별로. 모처럼 외출했는데." 모처럼 나왔는데 운나쁘게 너를 만났다는 말인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건 이때 기환의 머릿속에 아주 이상한 생각이 머리를 들었다. 이것도 하나의 운명이다. 이 운명을 어떤 계기로 만들 수는 없을까? 이 여자는 지금 자유의 몸이다. 이 여자가 어디 있고 어느 곳으로 연락하면 이 여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를 알아두고 싶다. 기환은 그러나 대뜸 그 말을 물을 수는 없었다. "무척 궁금했었지요." 그는 혼자말처럼 이런 말을 했다. 명혜가 다소곳이 듣고 있었다. 그 다음에 그는 전화번호를 물을 작정이었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섰다. 3층이었다. 기환은 1층까지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리더니 뜻밖에 아내가 엘리베이터 속으로 훌쩍 들어왔다. 아니, 지금쯤 옷 구경 하느라고 정신없을 사람이 여긴 웬일인가? "별로 볼 게 없었어요. 뭐 새로 나온거나 있나 했는데 모두 전에 봤던 것만 걸어 놨지 뭐예요. 집으로 가서 빨리 쉬고 싶은 생각뿐이에요." 아내는 활발하게 떠들었다. 너무 당황해서 기환은 대꾸를 못했다. 아내가 옆에 서 있는 명혜를 흘낏 바라보고 나더니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어요?" 아내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남편의 기분을 귀신처럼 잘도 읽었다. "기분 나쁘다니, 내가 왜 기분 나빠?" "당신 얼굴이 그렇게 뵈는데요, 뭐. 나도 모르겠어요." "너무 후덥지근해서 그럴 거야. 아마." "아, 이제 알았어요. 당신 내가 오늘 옷을 사버릴까봐 잔뜩 떨고 있었던 거 아니예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당분간은 사고 싶은 옷이 있을 거 같지 않으니까요." 기환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말 억울해도 너무 억울한 말이었다. 뭐 옷을 산 게 그동안 한두 번인가? 이 여자의 전화번호를 알아둬야 할 텐데 이걸 어떡하지? 지금 헤어지면 다시 이런 만남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하느님이 일부러 내려주신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그러나 아내를 옆에 두고 명혜와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명혜는 아내가 나타나면서부터 더욱 철저하게 이쪽을 외면하고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이 엘리베이터 속을 잠시 흐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드디어 1층에 도착했고 문이 열렸다. 명혜는 예상했듯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바ㅊ깥의 사람들 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물론 명혜뿐아니라 기환도 그녀에게 잘 가라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기환은 아내와 함께 햇빛이 쨍쨍 내리비치는 백화점 앞마당으로 나왔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명혜의 모습을 찾았으나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택시를 타려고 택시 정류장으로 가는데 그때 아내가 불쑥 이런 말을 던졌다. "방금 그 여자 당신 아는 여자죠?" 기환은 너무 놀라 넋이 빠진 표정으로 아내를 쳐다봤다. 아내가 싱글거리며 말했다. "그냥 농담으로 한 말이니까 너무 놀라실 거 없어요."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방금 손님을 내려놓은 택시 속으로 들어갔다. 27. 피서지에서 생긴 일 "여보, 금년엔 갈거죠?" "암, 가야지. 그런데 제주도는 숙박이 어려울 것 같고 동해로나 가는 게 어떨까?" "아무 데나 난 상관없어요. 그저 이웃들 보기에 우리가 피서만 다녀왔다는 증거만 되면 되니까요." 결혼 이 년이면 아직 신혼 기분이다. 아내는 그 기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웃들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도 신혼기분 탓이다. 저것들은 결혼한지 이 년도 채 안되는데 이 삼복 더위에 집에만 처박혀 지낸다고 이웃들이 흉볼까봐 아내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물론 이웃들도 더위에 시달리느라고 누가 피서를 갔는지 안 갔는지 신경쓸 겨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는 지나치게 주위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 그게 서른 살 노처녀로 가까스로 낭군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만기는 생각했다. 가까스로 잡은 행운의 밧줄이기 때문에 자신이 정말 행복하다고, 다시 말하면 그 행복의 밧줄이 튼튼하다고 이웃들에게 과시하고 싶은 것이다. 대학의 심리학 교수로 명색이 재직중인 만기가 왜 아내의 그 심정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작년에, 그러니까 신혼 첫해 여름에는 그들은 피서를 못갔다. 만기가 박사 논문 마무리 때문에 꼼짝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기도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 간호 학교 선생으로 근무중인 아내는 남편의 논문 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지만 그러나 작년 여름 아내는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피서를 못 갔고 따라서 행복을 과시하지 못한 것이다. 피서 여행이 무슨 행복의 보증수표라도 된단 말인가? 이렇게 만기의 아내를 비웃을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건 그다지 사려깊은 사람의 생각이 아니다. 피서지에 막상 가보면 정말 그렇다는 걸 실감하게 될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여름 휴가 기간이 일치해서 만기와 그 아내는 경포대로 떠났다. 삼 개월 전에 구입한 자동차는 아내가 운전했다. 만기는 운전을 할 줄 몰랐고 아내는 미국에서부터 자동차를 운전한 베테랑이었다. 그래서 아내가 운전하는 자가용을 타고 경포대를 향해 달리고 있을 때 만기는 위험 같은 건 전혀 느끼지 않아도 좋았다. 아내가 만혼이라면 만기는 할 술 더 뜨는 만혼이다. 그는 자그만치 서른 여섯에야 간신히 웨딩 마치에 맞춰 걸을 수가 있었다. 그 이전에 그는 맞선을 몇 번씩이나 봤다. 공부를 하느라고, 아니, 수완이 없고 붙임성도 없는 탓으로 만기는 여성을 스스로 사귀지 못했다. 그점은 지금도 만기에게 열등감을 안겨주는 사항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뒤늦게나마 맞선을 보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된셈인지 번번이 퇴짜였다. 나이가 너무 많아서, 이런 말을 하며 물러나는 아가씨도 있고 그 나이에 아직 대학 시간강사라면 좀 배고플 것 같다고 하며 꽁무니를 빼는 아가씨도 있었다. 남편을 무슨 코미디언 쯤으로 아나? 그 아가씨에게 만기는 이런 불평을 했지만 아무튼 퇴짜맞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세 번 네 번 퇴짜만 맞고나자, 만기는 겁장이가 되었다. 그는 맞선 보는 걸 한사코 사양했다. 나는 안된다. 나는 안되는 인간이야. 이 무렵에 나타난 사람이 바로 지금의 아내다. 역시 인연은 따로 있었던가? 동료 교수가 만기를 생일 잔치에 초대했는데 사실은 속임수로 자기 처제와 맞선을 보게 하려고 불렀던 것이다. 결혼뒤에 그날이 그 교수, 즉 지금의 손위동서의 생일도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알았다. 둘은 만나자, 크게 끌리지도 않았고 크게 거부감도 안 느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다시 만나고 또 다시 만났다. 한달만에 그들은 식을 올렸다. 정작 만기가 아내와의 결혼에 만족을 느끼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다. 아내는 그 능숙한 운전 솜씨로 만기를 학교까지 먼저 데려다주고 자기 갈길을 간다. 월급 안 나가는 자가용 기사를 둔 셈이다. 이 얼마나 편한 일이냐? 그뿐인가? 같은 직종이고 관심 사항이 비슷해서 척하면 상대의 뜻을 헤아린다. 부부 갈등 따위가 있을 턱이 없다. 아내는 이해심 많고 부지런했다. 집에서 빈둥거리는 여자들도 툭하면 파출부를 불러대는데 아내는 주부의 일을 모두 혼자 해냈다. 만기는 그래서 요즘에는 전에 자기를 걷어차고 물러간 아가씨들에게 고마움을 느낄 정도였다. 그녀들이 자기를 걷어차 주지 않았던들 어찌 이 보물 단지 같은 아내를 만날 수 있었으랴? 바닷가 모래사장에는 도시에서 몰려온 피서객들이 가득 붐비고 있었다. 아내는 운전은 잘 했지만 수영은 할 줄 몰랐다. 그래서 만기는 고무 튜브를 아내를 위해 빌리려고 간이 매점으로 갔다. 고무 튜브는 이용자가 너무 많아 여분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하나가 있었는데 그건 예약된 물건이라고 가게를 지키는 아가씨가 말했다. "그 손님이 언제 오지?" "오실 시간이 다 됐어요. 돈까지 지불한 걸요. 아, 마침 저기 오시네요. 손님께서 꼭 필요하시면 양보해달라고 한번 말씀해보세요." 저쪽에서 마흔대여석 살쯤 보이는 남자와 삼십대 초반의 여인이 오고 있었다. 그들이 가까이 오자, 만기는 튜브를 양보해달라고 말하려고 그들에게 다가섰다. 그 순간 만기는 그 여인이 눈에 익은 얼굴임을 깨달았다. 그쪽도 이쪽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몇번째 만난 여자였더라? 옳지, 맨 처음 만났었지., 나더러 나이가 너무 많다고 돌아선 여자였지. 그런데 웬 영감님과 동행을 했지? 아내가 옆에 있으므로, 그리고 그쪽도 남편이 옆에 있으므로 서로 아는 체를 하지 못했다. 다만 만기와 그 여인의 얼굴에 둘만 느끼는 기묘한 표정이 흐르고 있었다. "저어 이 튜브 선약하셨다는데 저희가 먼저 사용하면 안 될까요?" 만기는 그 여인에게 정중히 말했다. 그 여인은 만기의 아내를 관찰하느라고 정신이 팔려 있었다. 만기도 그쪽 남자를 관찰하며 그 남자가 적어도 자기보다 대여섯 살은 늙어 보인다는 사실에 이상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좋도록 하세요. 저는 아무래도 좋아요." 뒤늦게 이쪽 말을 알아들은 여인이 선선하게 대답했다. 만기는 튜브를 들고 아내와 함께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그런데 여자의 직감이란 무서웠다. 특히 자기 남편과 관련되는 여자에 관해서 말이다. 돌아오며 아내가 물었다. "그 여자 당신 아는 사람이죠?" "아니,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아는 사이죠?" 만기는 난처했다. 나를 걷어찬 여자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자존심 강한 아내에게 말이다. 만기는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거짓말을 하기로 결심했다. 28. 외판원 오랫동안 얼굴 구경을 못했던 큰누나로부터 얼마 전 자기집에 좀 와달라는 전화가 내게 걸려왔다. 같은 서울에 살면서도 어떻게 된 셈인지 누나와 나는 일 년씩이나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 자기 생활에 바빴다고 하면 그만이지만 이 도시의 비정한 풍속이 우리 형제 자매 사이에도 어느덧 자연스럽게 자리잡아 버렸다고 생각하니 서글프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정말 우리가 기묘한 이산가족인 셈이었다. 사실은 나도 하는 일 없이 바빠서 누가 만나자고 하면 우선 짜증부터 났지만 그날 큰누나의 전화는 내심 몹시 반가왔다. 그래서 나는 당장 보문동의 누나 집으로 달려갔다. 매형이란 인물은 사람 하나는 점잖고 착하지만 이미 60이 다 된 나이에 남의 회사 말단 자리에서 고작 호구지책이나 감당해나가는, 좀 무능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큰누나네 살림 형편이란 십 년전이나 지금이나 마치 변치 않는 골동품처럼 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큰누나도 이제 60이 가까와져서 얼굴에 가난한 노인티가 뚜렷했다. "바쁘지? 와줘서 고맙다. 웬만하면 너를 부르지 않았을 텐데 꼭 너하고 의논할 일이 있어서 전화를 했었다." 내가 방에 앉자마자, 누나가 좀 계면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의논할 일이 없으면 전화를 못하나? 아무튼 얼굴 잊기 전에 만나서 됐어요." 너무 성급하게 용건부터 꺼내는 누나의 행동에 나는 또 약간의 서글픔을 느꼈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서울 시민으로 찌들대로 찌들은 누나가 자기 말을 서슴없이 계속했다. "너 정일이 만난 지 오래지? 사실은 그 애 일을 네게 좀 의논해 볼려고 널 불렀다." "정일이가 지금 집에 있나요? 뭐 무슨 교파에서 지방으로 파견해서 선교사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지. 마산에서 일 년 반 동안 있었지. 그 일을 끝내고 돌아온 게 작년 이맘때야." "그래, 지금은 뭘 하오?" "글쎄, 내 이야길 들어봐. 이 녀석을 집에서 놀릴 수가 없어서 빚을 얻어 용달 차를 한 대 사줬다구. 그걸로 시장에 나가서 몇 달 일을 했지. 그러다가 겨울에 빙판길에서 그만 과적으로 차가 넘어졌어. 그 일이 그러니까 정일이에겐 안 맞는 거야. 차를 가까스로 팔아치우고 몇 달 놀다가 며칠 전부터 이 녀석이 외판원 노릇을 한다고 무슨 영양젠가 뭔가를 들고 다니는데 대체 그게 정일이 장래로 봐서 해도 좋은 일인지 네가 좀 판단을 해달라는 거야. 너도 알다시피 내가 자식이라곤 그 애 밖에 또 있니? 이젠 떳떳한 직업을 얻어 장가도 가고 해야 할 텐데 어떡하면 좋으냐?" 누나는 미리 준비해놓은 듯 정일이가 팔고 다닌다는 영양제 팜플렛을 내 앞에 내놓았다. 나는 그 종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누나에게 말했다. "아니, 참 누나도 딱하십니다. 그 애는 고등학교도 나왔고 군대도 마쳤는데 여태 제 방향을 못 잡고 있었단 말입니까? 그리고 그 무슨 교파 선교사란 또 뭐예요? 뭣 때문에 그 일로 한참 중요한 시기를 일 년 반씩이나 허송시켜요? 일생 성직자가 된다면 몰라도." "누가 아니래? 제 아빠가 글쎄 그렇게 해야만 천당에 간다고 억지로 보냈지 뭐겠니? 난 그때도 반대했어." 매형은 비록 현실에서는 무능해도 신앙은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 작은 봉급에서도 매달 십일조는 꼬박꼬박 교회에 바치는 인물이었다. 매형의 그런 신앙생활을 시비할 의도는 물론 내게 있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매형도 참 딱하군. 생활이 있고 신앙이 있어야지. 생활은 없고 신앙만 있다면 그 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더구나 서른이 다 된 나이를 그런 식으로 몰아가면 아이 장래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 나이라면 이미 직장에서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할 나이라고요. 좀 늦었어." "이걸 좀 보고 판단해줘. 괜히 헛수고하는 건지 그 녀석 말대로 전망이 있는 건지." 내가 영양제 팜플렛을 거들떠보려고도 않자, 누나가 그걸 집어서 내 코앞에 내밀었다. 마지못해 나는 그걸 대충 살펴봤다. 이름없는 회사의 제품이었는데 그 팜플렛 설명문이 옳다면 그 영양제는 만병통치약이었다. 나는 종이를 한쪽으로 던져놓고 누나에게 말했다. "이런 종이는 하루에도 우리 아파트에 십여 가지씩 신문지에 끼여들어 와요. 전망은 무슨 전망이겠어요. 그 녀석 늦기 전에 빨리 안정된 일자리를 잡아줘야겠군요." "네가 일자리를 좀 잡아줄 수 있겠니?" 누나가 기다렸다는 듯 다그쳐 물었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알아봐야지, 어떡하겠어요? 한번 내게 보내세요. 본인 의견도 들어보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생각해볼게요." "알았다. 당장 내일이라도 찾아가라고 할게." 나는 시간이 없어서 곧 누나네 집을 나왔다. 이틀 뒤에 조카 정일이가 우리집에 나타났다. 녀석은 물론 선교사들이 들고 다니는 것 같은 검정색 가죽 가방을 들고 왔다. 나는 정일이를 얼마간 알고 있었다. 녀석은 제 아빠를 닮아서 고지식하고 정직했다. 아마 정직하기로는 이 녀석을 당할 자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커피 한 잔을 놓고 아파트 거실에 조카와 마주 앉아서 나는 조카에게 누나에게 했던 말을 반복해서 말했다. 생활이 없는 신앙은 무의미하다는 것, 그리고 남자의 30이란 나이는 제 방향을 잡기에는 좀 늦은 나이란 것,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삼촌이 도와줄테니 새 일자리를 얻고 새 출발을 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걸 나는 정일에게 말했다. 정일은 내 말에 일일이 고개를 끄덕이고 아주 양순하게 동의를 나타냈다. 녀석은 앞으로는 삼촌의 지시대로 살아가겠다는 말까지 했다. 나는 내 말이 녀석을 완전히 설득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녀석이 갑자기 내게 물었다. "삼촌, 일하실 때 피곤을 느끼지 않으세요?" 나는 무심코 대답했다. "호흡을 할 때 이따금 가슴이 뻐근하지 않으세요?" "그런 때가 있어. 조금 답답하고." "삼촌은 담배 많이 피우시죠? 술도 많이 마시고?" "그야 그렇지. 담배는 곧 끊을 생각이지만 쉽지 않아."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보셨죠?" "보았지." "거기 이런 대목이 나와요. 노인은 상어 간유를 마셨다. 그걸 마시면 감기 따위는 일 년 열두 달 걱정하지 않아도 좋고 늘 몸에서 활력이 솟아난다. 이 약은 상어 간유로 만든 거예요. 삼촌도 한번 잡숴보세요. 즉시 효과가 나올 겁니다. 삼촌 건강을 위해 권하는 거예요. 이 약이 몸안에 들어가면 산소를 만들지요. 모든 병이 산소 결핍에서 온다는 학설도 있다구요." 녀석이 갑자기 검정색 가방에서 약병을 꺼냈다. 나는 또 무심코 약병을 받아들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그 영양제를 사고 말았다. 조카가 삼촌의 건강을 위해 좋을 약을 권하는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 설득을 당한 건 녀석이 아니고 나였던 것이다.녀석은 아주 고분고분하게 내 이야기를 다 듣고나서 내가 잠시 방심하는 순간에 불쑥 무기를 들이민 것이다. 녀석이 내 말ㅇ 설득되었다고 내가 단정한 건 내가 외판원이란 존재를 너무 과소평가한 탓이었다. 29. 앞집 남자 믿어지지 않는 얘기지만 이 년 동안이나 이 아파트에 살아오면서도 나는 아직 앞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본 일이 없고 그와 한마디 말을 주고 받은 적도 없으니 그가 무엇하는 사람이고 나이가 몇 살쯤 될까 하는 걸 내가 알턱이 없는 것이다. 하긴 요즘 아파트의 풍속에 얼마쯤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듣고도 그다지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아파트의 주민들은 이상하게도 각자가 익명의 인간으로 살아가길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익명의 인간이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윗층에서 살던 노인 한 분이 사망했는데 나는 그 분이 장의차에 실려 아파트를 떠나는 날 아침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른 아침 아파트 현관 앞 마당에서 웬 노래소리가 들려 나는 잠을 깼는데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영구차가 와 있었다. 그리고 그 영구차 뒤에서 십여 명의 여인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나는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아주 삭막한 기분에 잠겼었다. 이웃관계가 이렇게까지 삭막하게 변해버린 것일까? 잘못은 나 같은 사람에게도 있는 것이지만 아무튼 나는 이런 현실이 몹시 가슴 아팠다. 나는 그 고인의 얼굴도 모르고 그 분이 무슨 병을 앓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아파트의 이웃이란 그야말로 이웃이란 우리말의 본래의 뜻과는 아주 거리가 먼 관계인 것이다. 내가 이 년 동안이나 현관을 마주하고 살면서 앞집 남자의 얼굴도 직업도 모르고 있었다는 게 그러니까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사정은 아내 쪽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남자들이 그렇더라도 늘 집을 지키는 쪽인 아내는 그 쪽의 부인과 가벼운 왕래라도 있을 법한데 어찌된 셈인지 아내도 앞집 여자와 별다른 왕래가 없었다. 여자들은 이를테면 간장을 빌리러 간다든지 다리미를 빌리러 가는 것으로 간단히 친교가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하긴 요즘 어느 아파트나 슈퍼마켓이 지척에 있기 때문에 구태여 이웃의 도움을 청할 필요가 없을런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이 충족된 현대의 이웃간의 단절을 조장하는 범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얼마 전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지금까지의 얘기로 미뤄본다면 이건 분명 놀라운 사건임이 분명했다. 나는 늘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이 습관으로 되어 있다. 남들이 소등을 하고 잠들었을 시간에 혼자 내 방에 앉아서 이것저것 책을 읽기도 하고 뭔가를 끄적이기도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건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아마 토요일이었을 것이다. 이미 자정이 지났을 때인데 현관에서 문득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시간에 방문객이 나타날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현관으로 나가서 밖을 향해 낮은 소리로 누구냐고 물었다. 그런데 밖에서 뜻밖의 대답이 들려온 것이다. "저 앞집에 사는 사람이올시다. 죄송하지만 문좀 열어주십시오." "그럼 709호실에 사시는 분이란 말씀인가요?" "맞습니다. 비루 앞집이에요."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이 시간에?" "말씀은 들어가서 드리기로 하죠. 죄송합니다." 그의 어조는 지극히 공손했다. 이쯤되면 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약간의 두려움을 감추고 현관문을 열었다. 말쑥한 곤색 양복으로 정장을 한 삼십대의 역시 말쑥하게 생긴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나는 얼마간 마음을 놓았다. 그에게서 술냄새가 확 풍겨왔다. 눈빛에도 술을 지나치게 마신 흔적이 역력했다. "좀 들어가도 좋을까요?" 그는 청하지도 않았는데 거실로 대뜸 성큼 들어왔다. 그렇다고 불손하거나 무례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가 취객이란 사실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나는 손님을 소파에 앉도록 권했다. 자리에 앉은 그는 그제서야 자기가 나의 조용한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말했고 나도 그와 통성명을 했다. 그런 뒤에 그 남자가 말했다. "사실은 제 집으로 들어갈려고 했는데 아내가 틀림없이 물은 열어주지 않을 것 같아 그만 실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날씨가 추워서 어디 밖에서 시간을 보낼 수도 없고 말입니다." "하하하, 댁의 부인께서 그렇게 엄하십니까?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가는군요." 나는 그 남자에 대한 경계심을 그제서야 풀 수 있었다. 입에서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엄하다기보다 까다롭다고 할 수 있죠. 열두 시 지나서 돌아온 일이 없었는데 오늘은 어쩌다 실수를 했어요." "그렇다고 여기 계시면 더 오해를 받게 되지 않을까요? 지금이라도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지금은 문을 안 열어줍니다. 가장 화가 나 있을 시간이니까요. 조금 지나면 살그머니 걱정도 되고 해서 태도가 달라지게 마련이죠. 죄송합니다." "아니, 내 걱정은 안하셔도 좋습니다. 난 늘 이 시간에 잠을 안 자니까요." 마침 그때 거실 한쪽 구석에 잇는 바둑판을 그가 발견하고 난데없이 나더러 바둑을 두자고 청했다. 하긴 특별히 할 말도 없는데 시간을 보내는 방법으로는 바둑을 두는 게 제격이긴 했다. 그래서 거실 한복판에서 심야의 대국이 벌어졌다. 마침 그의 바둑이 나와 호적수였다. 우리는 갑자기 다정한 이웃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바둑 한 판이 중반에 접어들고 있을 때 갑자기 현관 쪽에서 다시 초인종이 울었다. 그러자, 그 남자가 벌떡 일어나서 먼저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이번에 나타난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였다. 그와 그의 아내가 몇 마디 주고 받는 소리가 내게 들렸는데 내가 놀란 건 그의 아내가 조금도 화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화내긴커녕 그녀는 남편에게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상냥하게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 남편은 바둑이 끝나면 곧 돌아가겠다고 말했고 그러자, 그의 아내는 두말없이 돌아갔다. 이윽고 바둑이 끝났다.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그제서야 의아심을 품었던 문제를 그에게 물었다. "부인께서 아이 아빠가 여기 계신 걸 어떻게 아셨을까요?" "아, 그건 제가 밖에서 미리 귀띔을 했었죠. 만약 늦더라도 먼데 있지는 않을 거라구요. 가능하면 앞집에서 시간을 보내겠다고 했어요. 먼 데 있게 되면 아내가 틀림없이 걱정할 거니까요." 이 대목에서 그는 약간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이미 술을 깨고 있었다. "그럼 아까 부인께서 문을 안 열어줄 거란 건 거짓말이었나요." "죄송합니다. 저는 오늘 회사에서 아주 안좋은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마실 줄도 모르는 술을 마셨죠. 그 상태로 집에 들어가면 아내가 불안해할 게 틀림없어요. 전 어떤 일이 있어도 바깥에서 있었던 나쁜 일을 아내 앞에 노출않는 주의예요. 이해하실 걸로 믿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내가 만난 누구보다 지독한 애처가였다. 그러나 결코 바람직한 이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30. 피아노 아들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하자고 먼저 제안한 건 아내였다. 그때까지 이상대 씨는 아들녀석이 학교 다니는 것 말고 또 다른 뭘 배워야 한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이유는 그가 아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대 씨가 자기 처지로는 그런 일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파트 촌 입구에서 자전거 판매 겸 수리점을 경영하고 있는데 수입 정도에 관계없이 스스로 서민이라고 생각했고 서민에겐 피아노 같은 것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아내가 점포에까지 달려나와 마치 사생결단이라도 해야 하는 순간처럼 절박하고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보! 당신 우리 순철이를 언제까지 그대로 내버려둘 작정이세요?" "내버려두다니, 그앤 학교에 잘 다니고 있고 몸도 건강한데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누가 학교에 잘 안 다니고 몸이 건강하지 않대요? 오늘 국민학교1학년 어머니들을 학교에 가서 만났는데 우리 순철이처럼 아직까지 아무것도 안 하는 아이는 하나도 없드라구요. 모두 피아노다 바이올린이다, 그림이다 하고 법석들을 떠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하나밖에 없는 자식 병신 만들고 있단 생각이 들더라구요. 우리도 어떻게 해야 하지 않아요?" "당신 생각에 순철이가 뭘 했으면 좋겠소?" "피아노를 시켜야겠어요. 오늘 거기서도 보니까 피아노 배우는 애들이 제일 많드라구요. 당장 아이를 피아노 선생님에게 데리구 가야겠어요." "아니, 소질도 모르면서 무작정 데리고 가면 어떻게 할 작정이요? 순철이는 운동이라면 모를까, 음악엔 소질이 없을 거라구. 나도 음치고 당신도 그렇지 않아?" "아니, 이 양반이 왜 나까지 물고 들어가시지? 당신이야 음치지만 난 여고 때 합창반까지 들어갔었다구요. 엄마를 닮았다면 그애는 틀림없이 피아노를 잘 칠거라구요. 두고봐요." "당신이 합창반이었다구? 당신 노래 들어보면 사람들이 안 믿을 걸." "나 시간 없어요. 그런 일로 다투러 온 게 아니라구요. 당신 승낙하는 거죠?" 이 대목에서 이상대 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기계를 만지는 사람답게 매사에 신중했다. 요즘 아이들이 뭔가 한두 가지끔 따로 배우고 있다는 건 자기도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피아노라는 게 요즘에는 반드시 서민이라고 해서 상종못할 물건만도 아닌 것이다. 세상은 변한 것이다. 그가 살고 있는 서민 아파트의 윗층에서도 옆집에서도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그것만 봐도 피아노는 이미 자신이 어렸을 때 생각했던 피아노는 아닌 것이다. 그는 전혀 자신이 서는 일이 아니었지만 아내가 합창반이었다는 말에 은근히 한가닥 기대가 가지 않는 바도 아니었다. 잘하면 이 녀석이 또 피아니스튼가 뭔가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는 일 아닌가? 하기야 피아니스트만 된다면 얼굴 생김새나 훤칠한 체격이야 누가 봐도 어울리는 녀석이지. 여기까지 심사숙고를 진행하던 이상대 씨는 드디어 중대결단을 내렸다. "좋아. 피아노를 그럼 한번 배우게 합시다. 난 아무것도 모르니 당신이 뒷일은 알아서 하구려." 이렇게 해서 자전거 판매 겸 수리점을 하는 이상대 씨의 아들도 피아노 학도의 대열에 드디어 한몫 끼어들게 되었다. 아내는 극성이었다. 아이는 일주일에 세 번 같은 서민 아파트에 사는 피아노선생님께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는데 그때마다 아내는 아이와 함께 붙어다녔다. "여보. 선생님 말씀이 집에도 피아노가 반드시 있어야 한대요. 그래야 연습을 하죠. 연습을 못하니까 순철이만 진도가 느리다나요." "피아노를 사주라는 말이로군. 그런데 당신 보기엔 어떻소? 애가 좀 하는 것 같소?" 남편이 묻자, 아내는 마치 남편의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당신에게 말하려던 참이었다구요. 만약 피아노를 안 시켰더라면 정말 큰일날 뻔했다구요. 이 녀석이 하루도 안 빠지고 가는 건 물론이고 피아노 앞에만 가면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이라구요. 정말 뭐가 되도 될 것 같은 걸요." "그래? 그럼 피아노를 사야겠군." 이상대 씨는 그야말로 거금을 들여 피아노를 집에 들여놓았다. 그게 거금일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돈을 마련하자면 그가 적어도 어린이 자전거를 백 대 정도는 팔아야 얻어지는 돈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하나뿐인 아들에게 백 대 아니라 만 대를 팔아서 바친들 아깝겠는가? 그날부터 이상대 씨네 아파트에서도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음은 물론이다. 아이가 연습을 할 때는 아내는 설겆이도 마다하고 아이의 옆에 꼭 붙어서서 그야말로 사생결단을 하는 듯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아이에게 다음 곡을 빨리 쳐보라고 불같이 재촉하곤 했다. 물론 음치에다 자전거 수리공 출신의 이상대 씨는 순철이가 피아노에 소질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길이 없었다. 그는 다만 합창단 출신의 아내만 믿었다. 아내가 저만큼 극성일 때는 거기에 반드시 그만한 가능성과 희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내는 어떤 때는 밥이 타는 것도 모르고 순철이의 피아노 옆에 붙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날 순철이의 피아노 선생님이 집으로 몸소 찾아왔다. 선생님이 혼자 사는 노처녀란 말은 들었지만 그날 현관에 나타난 선생님은 유난히 늙고 피로해 보였다. 현관으로 들어온 선생님께서는 거두절미하고 아내에게 말했다. "이런 말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저도 이제 목에까지 차 올라서 더 못 견디겠어요. 제발 아이를 더이상 제게 보내지 말아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아랫층에서 시끄럽다고 불평하는 바람에 신경이 피곤한데 댁의 아이까지 저를 피곤하게 만드니까 견딜 수가 없군요." "아니, 이 녀석이 무슨 일을 저질렀나요?" 아내가 시퍼렇게 긴장해서 물었다. "아뇨, 아무것도 저지른 것 없어요. 다만 댁의 아이는 피아노가 안 맞는 것 같다는 거죠. 오늘 아이가 와서 다짜고짜 피아노를 꽝 두드리면서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이 웬수놈의 피아노야! 너만 없다면 얼마나 좋겠니? 난 너 때문에 놀지도 못하고 정말 미치겠다. 이 말을 듣고 전 아이에게 피아노를 더 가르칠 맘이 없어졌어요. 이해하세요." 이상대 씨도 그때 옆에서 이 말을 들었다. 그 순간 그는 결심을 해버렸다. 선생님이 가고 나자, 그는 순철이를 불러놓고 말했다. "그래, 알았다. 이제부턴 피아노 배우라고 안할 테니 네 맘껏 놀아도 좋다." 31. 종교의 자유 종교의 자유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어떤 자유보다도 우선한다고 알고 있다. 내 짧은 서양 역사 지식으로도 서구사회의 민주주의 역사란 종교의 자유를 쟁취하는 과정 자체라는 것 쯤은 안다. 그러니 미국에서 민주주의를 직수입한 우리나라도, 다른 자유는 몰라도 종교의 자유만은 비교적 철저하게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가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건 결혼 이후 삼사 년 뒤의 일이다. 아내는 결혼 전에는 분명히 교회에 다니지 않았었다. 기독교인을 만나보면 본인이 아무리 그 사실을 감추려고 해도 금방 알아볼 수가 있다. 왜냐하면 본인 자신이 기회만 있으면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상대에게 알리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기독교인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런데 맞선을 보려고 나온 아내에게서는 그런 기미라곤 전혀 없었다. 그리고 결혼 이후 몇 년 동안 아내나 나는 종교란 말을 모르고 살았었다. 아내가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약간 당황했다. 이크, 또 시작이구나……. 내가 이렇게 말하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결혼 전, 나는 세 명의 아가씨들과 차례로 사귀었다. 내가 무슨 카사노바라서 한꺼번에 셋씩이나 아가씨들을 거느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노총각 신분으로 어떻게 결혼 좀 해보려고 남의 소개를 받아 차례로 교제를 했다는 이야기다. 셋씩이나 숫자가 불어난 건 그녀들과의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카사노바는 고사하고 사실은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그 실패의 원인이 아주 엉뚱한 데 있었던 것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그 아리따운 아가씨들을 모두 빼앗긴 꼴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공교로운 사실에 관해 의문을 품고 있다. 어쩌면 내가 만나는 여자들마다 한결같이 기독교신자들 뿐인가? 그것도 하나같이 이른바 광신적 인물들인 것이다. 그녀들과 일이 잘 풀리지 않은 주요 이유가 바로 그 점에 있었던 것이다. 어느 아가씨의 말을 빌면 나는 사탄적인 요소가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세 번씩이나 이 지경을 당하고 보면 노이로제에 걸릴 법도 하다. 맞선을 보러 나온 아내가 기독교인 냄새를 전혀 풍기지 않아서 나는 저으기 안심을 했었다. 그런데 역시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쯤되면 내가 이크, 또 시작이구나 하고 놀란 이유를 알 만한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내의 신앙은 날이 갈수록 점점 깊어갔다. 신앙이 깊어간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얼 의미하는지 알 수는 없는 일이나, 아내는 집사도 되고 구역장도 되었다. 또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를 교회로 인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사탄이 그런 정도에 호락호락 넘어갈 리 만무하다. 호락호락 넘어가서 고삐 맨 망아지모양으로 교회에 끌려갈 거라면 나더러 왜 사탄이러고 저주의 말을 퍼부었겠는가? 하나뿐인 아들녀석은 유치원부터 제 엄마의 뜻에 따라 기독교계통 유치원엘 다녔다. 일요일에는 엄마의 치마꼬리를 붙들고 꼬박꼬박 교회에도 나갔다. 대체로 아내는 일요일이면 일곱 시에 교회로 나가고 아들은 여덟 시 반이 지나서 따로 교회로 나간다. 교회에서 버스가 와서, 아이가 버스 정류장으로 나가면 교회 버스를 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 녀석은 말썽장이고 게으른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일요일에 시간이 되면 두말없이 혼자 정류장으로 나가는 게 나는 정말 신통하고 이상했다. 그래서 아내에게 수동이가 추운 겨울 아침에도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행여 버스를 놓칠세라 정류장으로 뛰어나가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그야 교회 가면 재미 있으니까 그렇죠. 저 녀석 교회만 갔다하면 다 제 세상인 걸요. 모두 제 뜻을 받아주고……." 그러면 그렇겠지. 네 녀석이 무슨 신앙심이 있어서 그 추운 겨울에 정류장으로 뛰어가겠냐? 사탄인 애비는 아내의 그 말에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아내를 교회에 빼앗겼다는데 하나 뿐인 아들까지 예수님께 또 송두리째 빼앗긴다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수동이 이 녀석은 노는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녀석이다. 그러니 오직 논다는 기분으로 교회당엘 간다는 추측이 그럴 법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예수님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새삼 깨닫고야 말게 되었다. 얼마 전, 교회에서 온 아내가 붉으락푸르락해가지고 아들에게 야단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도 보고를 했다. "여보, 이 녀석이 오늘 교회에서 무슨 짓을 했는 줄 알아요? 어떤 여자 아이 머리를 쥐고 흔들고, 그래서 내가 야단을 쳤더니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 대들더라구요. 나 창피해서 이 녀석 데리고 같이 못 다니겠어요. 당신도 혼 좀 내세요." 이 말을 듣고 사탄인 나는 옳지, 기회는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아들을 당장 불러 세워놓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얼굴로 말했다. "너 그따위 짓 하려고 아침마다 교회당에 부리나케 가지? 어쩐지 이상하더라구. 잘 됐어. 이제부터는 너 교외에 가지 마. 만약 아빠 몰래 교회당엘 갔다가는 혼날 줄 알아. 교회당에 꼭 가려거든 이 집에서 나가서 너 혼자 다녀. 나쁜 녀석 같으니, 국민학교 3학년이나 되는 녀석이 그따위 망신이나 시키고 다녀?" 아빠가 화가 나면 무섭다는 것은 녀석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한번 꺼낸 말은 좀처럼 잊지 않고 챙긴다는 것도 녀석은 알고 있다. 내가 교회에 가지 말라고 해도 녀석은 그저 약간 서운한 표정이나 짓고 말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 녀석이 갑자기 구슬같은 눈물 방울을 하염없이 떨어뜨리며 비통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로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빠에게 애원하는 것이었다. "다른 건 다 하지 말라고 해도 좋으니 교회에 가지 말란 말은 제발 하지 말어……." 이쯤 되면 사탄도 어이가 없어진다. "너 교회가 그렇게도 좋으냐?" 녀석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바쁜 일이 있어서 가타부타 답변을 않고 밖으로 나왔다. 저녁에 들어갔더니 아내가 말했다. "수동이가 아빠 나간 뒤에 마구 울면서 교회에 못 가면 자기는 지옥에 갈 텐데 어떡하냐고 걱정을 태산같이 하더라구요. 아이한테 그런 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나는 묵묵부답이었다. 역시 종교의 자유를 막는다는 건 간단하지 않다는 걸 나는 새삼 느꼈다. 다음날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교회 가지 말란 말은 취소다. 그러나 다음부터는 말썽을 피우지 않도록 해." 녀석은 금방 얼굴이 밝아졌고 다시 쾌활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아빠, 아빠도 교회에 나오면 안돼? 아빠 혼자만 지옥 가면 어쩔려고 그래?" 이게 바로 기독교인인 것이다. 32. 아내의 취미 50년대나 60년대에 비하면 물질적인 생활 형편이 많이 나아진 요즘에는 취미라는 게 우리 주변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사실 취미라는 건 생활의 여유에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지만 생활의 여유가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취미 생활을 즐기는 건 아니다. 거기에는 적성과 노력이 뒤따르고 아무곳에도 적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한가지 일에 꾸준한 정성을 쏟을 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물질적인 여유가 있더라도 취미 생활을 즐길 수가 없는 것이다. 김몽필 씨의 아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김몽필 씨는 조그만 무역상을 하는 사람인데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 가까스로 결혼을 했다. 그가 이토록 만혼을 하게 된 이유는 그가 그동안 자기 사업 기반을 닦는 데에만 전심전력을 기울여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흔이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사업 기반을 닦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이제는 어느 정도 물질적인 여유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결혼을 한 뒤부터 김몽필 씨에겐 그가 일찌기 상상조차 못했던 고민이 하나 생겼다. 그건 아내의 취미 문제였다. 결혼을 하기 전 그는 이런 문제가 부부 사이의 큰 갈등 문제로 대두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건 아마 김몽필 씨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남편들도 같은 처지일 것이다. 그 문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김몽필 씨는 결혼하자마자, 지금까지 미뤄왔던 자기 취미에 정성을 쏟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을 보다 일찍이 가꾸고 싶었지만 모든 여건이 갖추어지는 이날까지 꾸욱 참고 기다려온 것이다. 결혼을 하자, 이젠 가정도 안정되고 시간 여유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고급 오디오를 장만해서 저녁에는 일찍 집에 돌아와 음악 감상을 즐겼다. 그 다음에 그가 한 일은 낚시 도구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그는 정말 조용한 호숫가에 홀로 앉아 명상을 즐기는 시간을 고대하고 고대했었다. 김몽필 씨는 바둑에도 흥미가 있었다. 흥미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대학시절엔 학교 선수로 활약한 경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비자나무 바둑판을 사가지고 한가한 때는 이웃 사람을 불러다가 대국을 하곤 했다. 그는 바둑에는 단순히 기술 이상의 철학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유독 바둑에 심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처럼 뒤늦게나마 취미 생활을 만끽하는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아내는 음악이나 낚시나 바둑 이야기만 나오면 일부러 외면해버리고 못 들은척하기 일쑤였다. 남편이 저녁식사 후에 오디오 감상을 할 때도 아내는 커피를 끓여오거나 옆자리에 함께 앉아 음악을 들어주긴커녕 일찍 안방으로 들어가 잠자리에 누워버리는 것이었다. 낚시를 나갈 때도 그녀는 한번도 동행을 자청하지 않았다. 김몽필 씨가 어쩌다가 함께 가자고 말하면 아내는 말없이 남편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냥 돌아서버리곤 했다. 그러니 바둑에 이르면 사태가 더 난처해지는 건 당연했다. 그녀는 이웃과 바둑을 두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몹시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다가 휙 밖으로 나가버리곤 했다. 요컨대 보기 싫다는 게 분명했다. 한동안 김몽필 씨는 몹시 당황했다. 세상의 아내들은 남편의 취미 생활을 정성으로 거든다는데 자긴 그런 행복에서 제외된 것이었다. 그는 아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자기가 바람을 피우거나 도박으로 돈을 탕진한다면 몰라도 비교적 건전하게 취미 생활을 즐기는데 아내가 그토록 거부 반응을 보인다는 건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취미를 즐기는 데 많은 돈을 낭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김몽필 씨는 아내의 횡포를 참아왔다. 그는 침착하고 인내심 많은 사나이였다. 그는 아내가 태도를 바꾸기만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아내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결국 인내심 많은 김몽필 씨도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 어느날 밤 그는 정면으로 아내에게 항의했다. "여보. 당신은 내가 하는 일이 모두 그렇게 맘에 안 드오?" "맘에 안 들다뇨? 언제 그런 말을 내가 했던가요?" 아내는 딴청을 부렸다. "솔직하게 말해봐요. 당신이 그렇게 싫다면 나 당장 오디오도 팔아치우고 바둑도 안 두겠어. 물론 낚시질도 안 갈거야." "참, 당신도 눈치가 없긴. 누가 그런 걸 나쁘다고 말했어요? 그렇지만 당신 혼자서만 취미를 즐기는 게 문제라구요. 난 마치 당신 옆에 있으면 무식한 하인이나 다름없지 않아요. 주인은 고상한 취미를 즐기는데 하인은 옆에서 멍청하니 구경이나 하고." "하하, 그래서 내가 함께 음악도 듣고 낚시질도 같이 가자고 했지 않소." "그런 건 내 취미가 아니예요 자기 취미에 억지로 나를 끼워맞추려고 하지 마세요." "좋아, 그럼 당신 취미가 뭐요? 난 뭐든 당신 좋아하는 걸 밀어줄 용의가 있어. 가령 아무리 돈이 많이 드는 취미라도 뒤를 받쳐줄 테니 어서 말만 해봐요. 당신 그래서 여태 그렇게 불만이었구만, 난 그런 줄도 모르고 혼자 화만 내고 있었지." 김몽필 씨는 이제야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이제 아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내는 웬일인지 다시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입을 열지도 않았다. 김몽필 씨가 빨리 취미를 말하라고 다시 재촉했다. 그제서야 아내가 떠듬거리며 말했다. "저어 난 취미가 없다구요. 그래서 문제라구요. 당신은 그렇게 좋은 취미가 많은데 난 아무것도 없어요. 도대체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니, 영화 감상이라던가 서예라든가 화초 기르기 같은 것도 있지 않소?" "그런 데 흥미없어요. 영화 감상 같은 거야 취미랄 수도 없지요." "당신 처녀시절에 뭐라도 해봤을 거 아니오? 설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사진이라도 해볼려고 하다가 그만뒀죠. 공예도 해봤는데 어려워서 관뒀어요. 꽃꽃이는 너무 흔하고." "그럼 뭘 할거요?" "당신이 찾아줘여. 난 아무래도 자신 없어요." "아니, 취미를 남더러 찾아달란 말은 난 또 처음인데. 이거야 원 힘들어서 남편 노릇 하겠나? 내가 당신 취미를 찾아준다고 해도 당신이 또 그만두면 만사 수포가 되는 거 아니요? 당신은 자기가 취미가 없으면 그만이지 공연히 나까지 못마땅하게 생각했었군." "미안해요. 그건 지나간 얘기고 빨리 취미나 찾아주세요." "가만있자, 어디 가서 당신 취미를 찾아준다? 그것도 틀림없이 당신이 오래오래 붙잡고 있을 거로 말이오." 김몽필 씨는 그날부터 아내의 취미를 찾아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도 무리가 아닌 것이 아내가 자기 취미를 갖기 전에는 김몽필 씨 자신도 취미를 마음놓고 즐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33. 가엾은 남편들 제지 회사 서무과장으로 근무하는 김창오 씨는 일요일을 기다리는 맛으로 인생을 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일 주일 내내 일요일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이 직장 일은 건성건성으로 해치우고 오직 일요일 그날만을 위해 자기의 능력과 기지를 비축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또 김창오란 사람이 요즘 괄목할 정도로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했다는 저 세도당당한 중산층처럼, 일요일엔 무슨 남다른 근사하고 화려한 오락을 즐기고 있는 것도 아니다. 중산층의 신종 도락이라면 골프와 사우나와 교외 농장으로 드라이브 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테니스나 낚시질 정도는 이미 중산층의 도락 축에도 끼어들지 못할 정도로 세태는 빠르게 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김창오 씨는 아직 골프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사람이고 사우나란 말은 수 없이 들었지만 본래 목욕을 좋아하지 않는 성미라 집에다 목욕실을 두고 있는 처지에 사우나탕까지 찾아갈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농장이나 드라이브라면 이 사람과는 더더구나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그에겐 교외 농장 같은 것도 없고, 집은 없어도 자동차는 있어야 한다는 진취적 인물들도 많다고 하나 그렇게 진취적 인물이 못되는 김창오 씨는 아직 운전대 한번 잡아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창오 씨가 일요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가 뭘까? 그에게 어떤 굉장한 도락이 있기에 그다지도 일요일을 학수고대하는 것일까? 그의 도락이란 사실은 별것 아니다. 보기에 따라 이건 도락이라고 쳐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는 일주일에 딱 한번 기원으로 바둑을 두러 간다. 물론 그날이 바로 일요일이다. 그는 겨우 오 급 정도의 바둑 실력의 소유자다. 그런데 그가 가는 기원에는 그와 막상막하의 호적수가 한 사람 있으며 김창오 씨는 누구보다 바로 그 호적수와 바둑 두는 걸 가장 좋아한다. 그 호적수는 조그만 출판사의 경리 책임을 맡고 있는 이달수 씨인에 이 사람 역시 일요일에 기원에서 김창오 씨와 호적수의 대결을 벌이는 것을 생활의 가장 큰 낙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둘은 나이도 비슷한 사십대 초반이며 성격도 약간 소심하고 약간 답답한 것까지 닮았으며 모르긴 몰라도 아마 수입까지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바둑을 둘 때 언제나 술내기를 했는데 일요일 종일토록 바둑을 두고나서 둘은 기원 옆에 있는 대폿집으로 가서 알맞게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는 게 그들의 정해진 코스였다. 이 마지막 코스야말로 이 두 사람에겐 가장 즐겁고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둘은 함께 대폿잔을 기울이면서 일 주일 동안 직장과 가정에서 쌓이고 쌓였던 피곤과 구속감을 훌훌 털어버리고 마음껏 해방감을 구가하는 것이다. 김창오 씨의 도락이란 바로 이런 것이고 그가 일 주일 동안 일요일을 노심초사 기다리는 이유도 바로 이 하치않은 도락과 만나고 싶은 심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소시민의 하치않은 도락도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무풍지대로 남을 수만은 없었다. 바로 며칠 전 일요일 아침이었다. 김창오 씨는 늘 그래왔듯이 호적수 이달수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물론 한 시간쯤 뒤에 기원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기 위해서였다. 일요일 아침 이 전화를 할 때마다 김창오 씨는 마치 소풍을 가는 아이처럼 가슴이 설레었다. "이봐. 아침 먹었나? 그래. 난 벌써 준비 끝났다구. 이따 거기서 만나자구." 김창오 씨는 이 한마디를 전화고 전화를 끊을려고 했다. 그런데 저쪽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봐. 내 말 들었어?" 김창오 씨는 대수롭지 않게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제서야 이달수 씨의 몹시 맥풀린 목소리가 들렸다. "안되겠어. 오늘은 회사에서 하반기 결산을 한다고 사장이 나오라는군."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김창오 씨는 믿어지지 않아 다시 물었다. "뭐야? 하반기 결산이라고? 그까짓 일은 평일에도 할 수 있잖아. 꼭 나가야 하나?" "그렇다니까. 미안해." 이달수 씨의 목소리는 거의 죽어가는 소리였다. 할수없이 김창오 씨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옆에서 남편의 전화를 듣고 있던 아내가 기다렸다는 듯 끼어들었다. "여보, 못 나오신다고 그러죠? 당신도 바둑 두러 안 갈거죠?" "그런데 왜?" "잘 되었어요. 당신 모처럼 기원에 안 가는 날 나하고 같이 백화점에나 가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부부 동반으로 일요일에 백화점에 가서 식사도 하고 옷 구경도 하는데 당신은 한번도 그러지 않았어요. 오늘은 나랑 백화점에 갑시다." 그가 한번도 아내와 백화점에 동행하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김창오 씨는 마지못해 아내의 청을 받아들였다. 아내는 오늘 오래 벼르던 원피스를 사겠다고 말했고 남편과 함께 문밖으로 나설 때는 마치 소녀처럼 들떠서 콧노래까지 불렀다. 여자들은 원피스를 사는 데까지 꼭 남편을 끌고 다녀야 직성이 풀리나? 김창오 씨에게 이런 불평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모처럼 즐거워하는 아내 앞에서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택시를 타고 기세좋게 백화점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하느님은 역시 매사를 공평무사하게 처리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김창오 씨 내외가 백화점 이 층으로 올라가서 여자들 옷가게 시찰을 막 시작할 순간이었다. 그들 앞에서 낯이 익은 얼굴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 아닌 이달수 씨였다. 이달수 씨 역시 부부 동반이었다. 김창오 씨는 너무 놀라 달수 씨의 부인이 옆에 있다는 것도 잊고 불쑥 소리쳤다. "아니 이 사람아! 회사에 간다더니 여긴 웬일이야?" 이달수 씨는 마치 큰 죄나 저지른 사람처럼 친구 앞에서 쩔쩔매면서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그게 아니고 모처럼 아내가 구두를 사는 데 함께 오자고 하기에 거짓말을 했었지. 미안하네." 34. 아내의 친구 나이가 들수록 나는 세상이 좁다는 걸 점점 실감하고 있다. 사람들은 가끔 뜻밖의 우연과 마주치는데 그게 인간관계일 경우 세상이 좁다는 말을 흔히 사용한다. 며칠 전만 해도 나는 평소에 자주 나가던 기원의 주인과 함께 맥주 몇 잔을 마시다가 그 뜻밖의 우연과 마주쳤다. 주인은 사십대의 남자로 이미 나와 일 년 전부터 친밀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그는 오랫동안 회사에 나가다가 그만두고 지금은 소일삼아 동네 기원을 하나 차리고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바둑을 좋아하는 내가 거의 매일 기원에 나갔기 때문에 그와 내가 친해졌다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친하다고는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손님과 주인의 관계를 벗어난 건 아니었다. 그래서 가령 자기 집안이야기나 개인적인 경제 형편 같은 건 피차 묻지고 않았고 알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 술을 마시다가 그가 자기도 고등학교때는 문학반에 적을 두고 있었으며 사실은 작가 지망생이었노라고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그는 그 고등학교 출신의 문인 이름까지 들어가며 그들이 모두 자기와 같은 그룹의 맴버였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다면 곽 선생을 아느냐고 기원 주인에게 물었다. 그가 나더러 곽 선생을 어떻게 아느냐고 되물엇다. 곽 선생은 나의 장인이고 그가 다닌 고등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사로 근무했었다. 내가 사실대로 말하자, 기원 주인의 입은 하마처럼 크게 벌어졌다. "곽 선생님은 우리반 담임이셨고 특히 문학반 지도를 하셨기 때문에 나를 아주 귀여워해주셨는데." 그는 내가 자기 은사의 사위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연신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세상이 참 좁다고 말했고 그 바람에 두 병만 마시자던 술이 여섯 병으로 늘어버렸다. 이 정도의 이야기는 그다지 놀랄 이야기도 아니다. 사실은 바로 어젯밤에 정작 내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우리집에서 벌어졌다. 어제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정말 세상이 좁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함부로 거짓된 행동을 한다던가 파렴치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그런 행동을 서슴치 않고 하는 사람드은 세상이 넓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이곳에서 잘못을 저질러도 저곳에선 모른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넓지가 않다. 다음 이야기가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어제 아내는 미국에서 귀국한 자기 친구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박해영이란 그 친구는 뉴욕에서 거주하는데 남편이 의사라는 것이다. 이번에 그녀는 오랫만에 모국에 나들이를 나와서 열심히 옛 친구들을 찾아보는 중이었다. 그런데 박해영은 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왠지 입가에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잘못 보면 기분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는 그런 미소였다. 식사가 끝나고 소파로 와서 차를 마실 때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이 엄마로부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아내는 평소에 미국에 있는 박해영의 이야기를 자주 했다. 아마 가장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라는 의미에서 자주 입에 떠올렸을 것이다. 내가 그런 말을 하자, 박해영도 대뜸 말했다. "저도 말씀 많이 들었어요." 그런 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말씀을 듣다니, 대체 누구에게서 들었단 말일까? 미국에서 온 지 사흘밖에 안 된 처지에 벌써 아내로부터 내 이야기를 그처럼 많이 들었다는 걸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박해영이 넌지시 물어왔다. "이중빈이란 사람을 아시죠." "이중빈? 글쎄, 뭘 하는 사람입니까?" 너무 뜻밖의 질문이라 나는 그 이름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의사예요. 같은 하숙집에 있었다고 그러던데요." "아! 알고말고요. 결혼 전 같은 집에서 있었죠. 이제 생각납니다.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 사람, 우리 애기 아빠예요. 후훗!" 나는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랬었구나. 그래서 박해영은 처음 만날 때부터 미소를 짓고 있었구나. 마치 전부터 나를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정말 세상 좁군요. 그 사람이 박해영 씨 남편 되신다니. 나와는 정말 친했죠. 함께 이야기도 많이 했구요." "선생님이 내 친구하고 결혼했다니까 대뜸 그이가 선생님을 잘 아신다지 않아요. 그래서 저도 깜짝 놀랐죠. 저하고 가장 가까왔던 친구의 신랑이 또 그이와도 알던 분이라니까 맘ㄹ예요. 그런데 그이가 이런 말을 했어요. 그때 선생님은 애인이 있었는데 제 친구가 그때 그 애인일 거라구요. 그래서 제가 아닐 거라고 말했죠. 왜냐하면 두 분은 연애 결혼이 아니라고 들었거든요." 이때 얼굴이 붉어진 아내가 친구에게 말했다. "이 사람 애인 많았던 거 너 모르니? 하긴 너야 모르겠지. 한 명이 아니라 열 명도 넘는단다, 얘." 아내의 그 말에 머쓱해진 박해영이 말했다. "제가 공연한 이야기를 꺼내가지고 두 분 싸움 붙이는 것 아니예요?" "난 그까짓 이야길 벌써 옛날에 알았어. 아무렇지도 않아." 아내는 태연한 척했다. 그 바람에 나는 갑자기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박해영이 이중빈의 아내가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입장을 변호하듯 박행영이 말했다. "남자가 애인도 없었다면 얼마나 매력없니? 그렇잖아? 우리 그이는 공부만 하느라고 도대체 연애 한번 못했다지 뭐니? 그러니까 지금도 꽁생원이지." 박해영은 아내를 위한답시고 한 말이지만 내가 보기엔 그건 자기 남편 자랑으로밖엔 들리지 않았다. 아내도 그 말에 심사가 더 틀어진 듯 했다. 나는 어떻게든 아내의 따가운 눈총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했다. 그래서 손님에 대한 도리가 아닌 줄 알면서도 박해영에게 그 말을 해버렸다. "이중빈 씨가 꽁생원이란 건 잘못 보신 겁니다. 그 무렵 그 사람은 내게 와서 주로 자기 고민을 하소연했었는데 그건 어떤 아가씨와의 사랑이 잘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예요." 매력 운운하면서 여유를 보인던 박해영의 얼굴이 순간 파랗게 질렸다. "그 여자, 어떤 여자였어요?" "글쎄, 저도 본 건 아니지만 아마 간호사이였을 거예요. 꽤 미인이란 건 이중빈 씨가 내게 말해준 거구요. 옳지, 그 아가씨의 부친이 장군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청혼을 할 용기가 안 난다고 내게 말했었죠." 박해영의 얼굴은 납빛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이윽고 말했다. "이번에 돌아가면 따져봐야겠어요. 저한테는 시치미를 떼고 꽁생원 행세를 하면서 사실은 그런 일을 감추고 있었군요. 나쁜 사람 같으니." 박해영의 표정은 거의 울듯이 이그러졌다. "아니 난 그런 의도는 없었는데 이거 큰일났군요. 내가 그 이야기를 하면 그 친구를 더 매력있게 봐주실 줄 알고 했던 얘기인데." 나는 정말 실수한 것 같아 어쩔 줄 몰랐다. 박해영과는 반대로 아내의 기분은 이제야 좀 풀린 것 같았다. 아내가 친구에게 말했다. "얘, 넌 나에게 매력 있다고 해놓고 막상 네 남편 연애 이야기가 나오니까 그렇게 초죽음이 되니? 내가 듣기에도 네 남편 매력있다. 얘, 남자가 그 정도 정열도 없다면 무슨 맛으로 사니?" "그건 그래, 워낙 처음 듣는 얘기라 내가 좀 이상했나봐." 박해영도 그제서야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 우리는 그날 밤 즐겁게 지냈다. 그러나 그 일로 나는 정말 세상이 좁다는 걸 깨달았고 그리고 그보다 사람은 언제나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배웠다. 35. 연탄과 사과 (1) 그가 버스에서 내렸을 때 로타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년 만에 바라보는 로타리의 풍경은 비 때문에 더욱 정겨워 보였다. 라디오가게, 옷가게, 구두점, 빵집, 당구장 등 모든 게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렇지만 우산이 없는 평수는 그 자리에 더 오래 서서 오랜만에 바라보는 로타리의 풍경을 더이상 감상할 수 없었다. 빗줄기는 제법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평수는 아주 난감했다. 이대로 비를 맞고 집까지 걸어갈까? 아니면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갈까? 그런데 마음은 일 초라도 빨리 집으로 가서 가족들과 만나고 싶었다. 그는 비를 맞으며 포플러 나무 밑에 서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누가 우산으로 그의 머리를 비로부터 가려주었다. "아이, 비를 맞고 서 계시면 어떡해요?"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가 귓전에서 들렸을 때 평수는 너무나 놀랐다. 왜냐하면 그는 오랫동안 여자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지냈을뿐 아니라 방금 귓전에서 들린 목소리가 여자 목소리 중에서도 유난히 다정하고 부드러웠던 것이다. 그의 머리에 난데없이 우산을 받쳐준 사람은 뜻밖에도 아리따운 젊은 아가씨였다. 나이는 스물 한두 살쯤 될까? "아이구! 이거 고맙습니다." 평수는 너무 감격해서 그 아가씨에게 꾸뻑 절을 했다. 그 아가씨가 물었다. "댁은 어디까지 가세요? 방향이 비슷하면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저기 산동네 중턱까지 올라갑니다." "그럼 저와 비슷하네요. 마침 잘 되었군요. 자, 함께 가시죠." 운이 좋다고나 할까? 아니면 그가 제대복을 입었기 때문에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막 제대를 하고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어떻게 우산까지 휴대하고 올 것인가? 그렇긴 하지만 난데없이 우산을 받쳐준 사람이 하필이면 젊고 아리따운 아가씨라는 건 분명 운이 좋아도 보통으로 좋은 일이 아닌 것이다. "지금 제대하시고 집으로 오시는 길이세요?" 로타리를 벗어나 산동네로 가는 비탈길을 올라가면서 아가씨가 물었다. "네, 오늘 부대에서 출발했습니다. 일 년만에 집에 오는 거예요. 작년 휴가 때 다녀간 뒤 여태 휴가를 못 받았었죠." "정말 제대를 축하해야겠군요. 아주 기쁘시겠어요. 오랜만에 가족들과 만나시니까." "감사합니다. 사실 저도 몹시 홀가분하고 기뻐요. 그런데 이 옷이 제대복이란 걸 어떻게 아시죠?" "그야 저도 친척 오빠가 이런 옷을 입고 돌아온 걸 봤으니까 알고 있죠." 평수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그 아가씨의 용모나 태도에 놀라고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는 그녀를 관찰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저쪽은 너무 침착했고 태연했고 이쪽은 너무 당황해버렸던 것이다. 말을 주고 받으면서 그는 비로소 아가씨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볼 수 있었다. 그녀는 눈에 번쩍 뜨이는 화려한 미모는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귀염성이 있고 착하고 깨끗한 느낌을 주는 얼굴을 갖고 있었다. 말씨나 행동도 무척 침착하고 으젓했다. 그녀는 청바지와 밤색 재킷을 입고 있었고 그다지 비싸 보이지 않는 손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옷차림이 수수하고 단정했다. "실례지만 아가씨도 이 산동네에 사십니까?" "네. 그러니까 저도 이 길을 올라가고 있죠." 아가씨는 대답을 하고 피식 웃었다. "그럼 왜 제가 그동안 한번도 못 봤을까요? 언제부터 이곳에 사셨는데요?" "삼 년, 아니 삼 년이 아직 채 못 됐어요." "오, 그러니까 제가 군대에 들어간 뒤에 오셨군요. 그러면 그렇지. 그전부터 사셨다면 제가 얼굴을 모를 까닭이 없죠." 평수는 이 말을 하면서 아가씨처럼 예쁜 얼굴이라고 말하려다가 꾸욱 참았다. 불행히도 평수의 집은 비탈길을 얼마 올라가지 않아서 곧 나타났다. 평수는 자기 집이 눈앞에 보이자, 몹시 당황했다. 그는 아가씨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가능하다면 이 산동네 꼭대기까지 그는 아가씨와 함께 올라가고 싶었다. 그는 아가씨에게 아직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는 그녀의 집도 알아두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게 중요했다. 집을 모르면 다음에 어디 가서 아가씨를 찾는단 말인가? 그는 아가씨의 이름과 직업도 알고 싶었다. 직업이 없더라도 뭔가 하는 일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걸 그는 하나도 묻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 것이다. 그가 그런 걸 묻지 못한 건 용기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그의 마음을 너무 강하게 사로잡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초면의 그녀에게 조금도 무례하거나 이상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좀 더 이유를 말하자면 그는 오랫동안 영내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자신감이 약간 없기도 했다. "저는 다 왔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집앞까지 와서 평수는 정말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 그래요? 저는 더 올라가는데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녀는 조금도 슬프지 않은 표정으로 쾌활하게 말하고 비탈길을 올라가 버렸다. 혼자 남은 평수는 그녀가 가버린 길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평수의 아버지는 시장에서 싸전을 경영했다. 그 싸전은 시장에서는 제일 장사가 잘 되고 큰 싸전이었다. 가게의 한쪽 구석에는 연탄도 쌓아 놓고 판매를 했다. 어머니 역시 그 싸전에서 아버지를 돕는 일을 했다. 평수도 공업학교를 나온 뒤 잠시 집에 놀 때는 그 가게에 나가서 쌀과 연탄 배달을 했었다. 그러다가 그는 전기제품 공장에 취직을 했었다. 2년 동안 직장에 다니면서 겨우 견습 딱지를 떼고 이 새 직장 일이 손에 잡힌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영장을 받고 군에 입대했었다. 그는 자기가 다시 돌아갈 직장 일도 궁금했지만 그보다는 아버지의 가게 확장 문제가 더 궁금했다. 두 달 전에 그가 받은 동생의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형, 아빠 가게는 형이 있을 때보다 더 장사가 잘 되고 있어. 그래서 아빠는 우리 가게 옆에 있는 과일 가게까지 빌려서 그 자리에 연탄을 넣고 팔려고 해. 지금은 가게가 너무 좁아 손님은 많은데도 연탄을 조금밖에 갖다 놓지 못하거든. 아마 형이 올 때쯤 우리 가게는 훨씬 넓어졌을걸.' 편지를 보낸 녀석은 평수가 무척 사랑하는 중학 일 년생의 평진이였다. 평수는 전보다 훨씬 확장된 아버지의 가게를 빨리 보고 싶었다. 그래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우산을 쓰고 가게가 있는 시장으로 나가려고 대문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그때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와 그는 마주쳤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 딱 서버리더니 아들을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내일 올 줄 알았는데 빨리 왔구나. 편지에는 내일 온다고 했지?" 몸집이 당당한 어머니는 성격도 당당했다. 어머니가 겉으로 반가운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어도 어머니의 건강한 모습을 보니 평수는 기뻤다. "차편이 있어서 하루 빨리 나왔어요. 지금 저도 가게로 나가는 중인데요." "아버지 저녁식사 가지러 왔다. 쉬지 않고 가게는 뭣 하러 나와?" "가게가 넓어진 걸 보고 싶어서요. 평진이 편지에서 알았어요." "괜한 소리 썼구나. 쯧쯧 그 빌어먹을 여편네 때문에……." "아니, 왜요? 그 여자가 누군데요?" "들어가서 얘기하자. 너는 나올 것 없다." 어머니는 가게 얘기가 나오는 순간 얼굴이 빨개지면서 화나는 표정으로 변했다. 그래서 평수는 더욱 궁금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글쎄 내 말 좀 들어봐라. 집 주인하고 옆 가게를 얻기로 다 합의까지 해놨는데 그 빌어먹을 여편네가 훼방을 놓지 뭐냐? 그 말라깽이 여편네를 그냥……."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어머니가 다시 분통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이 문제로 어지간히 속을 끓인 모양이었다. "그 말라깽이 여편네가 누구예요?" "누군 누구냐? 옆 가게에서 사관지 개살군지 팔고 있는 여편네지. 장사도 지지리도 못하는 여편네가 계약 기간이 지났는데도 안나가겠다는 거야. 처음엔 건물주에게 나간다고 말해놓고선 우리가 그 가게를 얻어 넓힌다는 것을 알고 배가 아파 안 나가겠다는거야. 그것도 뭐 우리가 같은 업종이라면 또 몰라. 쌀하고 연탄이 과일하고 무슨 상관이냐? 배가 아플 게 따로 있지." "집 주인이 내보내면 나가는 거죠." "흥, 집 주인? 그 등신은 욕 먹기 싫다고 내버려둔다는구나. 하긴 등신만은 아니지. 곰보 주제에 그 과부년에게 딴맘이라도 있어 그러는지 모르지. 그렇지만 두고 봐라. 내가 그 말라깽이 여편네를 쫓아내나 못 쫓아내나." 36. 연탄과 사과(2) 오랜만에 아버지 가게가 크게 확장되는가 하고 기대를 걸었는데 평수는 실망이 컸다. 어머니가 말하는 그 사과장수 여인은 어떤 여자일까? 정말 고약하고 간사한 여인일까? 평수는 그 여인이 무척 궁금했다. 어머니는 저녁을 지은 뒤 아버지와 당신의 저녁밥을 소반에 따로 차려 들고 나가면서 평수에게 말했다. "나오지 말고 저녁이나 먹고 푹 쉬거라. 이제 너는 가게에 나올 필요없다. 푹 쉬다가 직장에나 나가야지." 어머니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들 성미가 잠시도 집에 앉아 쉬거나 놀지 못하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쉬는 날도 평수는 싸전으로 나가 아버지 일을 거드느라고 종일 땀을 흘리곤 했었다. 어머니가 나간 뒤 도서실에서 평진이가 돌아왔는데 평수는 동생을 통해서 자기네 가게와 이웃 가게와의 갈등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가 사과장수 여인을 그토록 증오하고 경멸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형을 보자마자 평진이도 가게 이야기부터 꺼냈다. "형 미안해. 공연한 말을 편지에 썼다구. 그때만 해도 난 틀림없이 옆 가게가 비는 줄 알았지. 형 무척 실망했지?" "그거야 네 잘못이 아니잖아? 그런데 그 사과가게 여자가 그렇게 나빠? 가게를 비울 가망이 없는 거야?" "가망 없어. 적어도 지금은. 그 여자가 어머니를 고발한 걸 형은 모르지?" "뭐야? 고발했다구? 어머니를 고발할 이유가 뭔데?" "어머니가 화가 나서 그 집 사과를 마구 동댕이질쳐버렸지. 그랬더니 파출소에 고발해버렸다구. 어머니는 파출소까지 갔다가 손해를 물어주고 간신히 풀려 나온 거야." "그거야 어머니가 조금 심하게 굴었군." "그게 아니야. 형은 몰라서 그래. 그 여자가 가게를 비운다고 했다가 주저앉고 또 비운다고 했다가 다시 주저앉고 세 번씩이나 어머니를 속였다구. 시장 사람들도 모두 그 여자가 나쁘다고 하는걸." 동생은 완전히 어머니 편이었다. 평수도 그러고 싶었지만 이쪽 사정을 잘 모르는 처지라 뭐라고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이틀 동안 평수는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 동안에 그는 비오는 날 우산을 씌워준 그 아가씨 생각에 줄곧 젖어 있었다. 그 아가씨의 기억은 세밀한 부분까지 그의 머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그 아가씨의 목소리와 얼굴과 옷차림, 그리고 그 아가씨가 자기에게 한 말들을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기억하고 있는 자신에게 놀랐다. 그는 자기 기억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에 관해 아무리 세밀하게 분명하게 기억만 하면 뭘 하나? 그는 그녀가 어디에 사는지조차 모르지 않는가? 바보 같으니라구. 그 아가씨가 사는 집 정도는 알아둘 수도 있었지 않은가. 그는 자신을 몹시 책망했다. 그러다가 그는 저녁 때쯤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는 산동네에서 그 아가씨의 집을 찾아내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는 저녁 나절 두 시간 가까이 산동네 골목길을 무작정 헤매고 다녔다. 하지만 밤하늘의 별처럼 촘촘히 박혀 있는 산동네 집들 속에서 이름도 모르는 아가씨의 집을 찾아낸다는 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그는 그녀를 만났던 그 시간쯤에 그녀를 기다려 보기도 했다. 역시 헛수고였다. 그는 그녀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한 나머지 신자도 아니면서 포플러 나무 밑에 서 있는 동안 마음으로 기도도 해봤다. '하나님, 다시 한번만 그날처럼 그 아가씨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그럼 다시 이런 부탁은 안하겠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제발 부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따위 엉터리 기도를 들어줄 리는 없었다. 그는 밤이 이슥해서 로타리로부터 무거운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얘 평수야, 너 그렇게도 집에 있는 게 답답하니? 그럼 내일 아버지가 농협 공판장에 가실 동안만 가게에 좀 나와 있거라." 밤늦게 우울한 얼굴로 들어오는 아들을 보고 속도 모르는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니라고 해도 아들의 마음 속에 갑자기, 그야말로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든 고뇌의 그늘까지 눈치 챌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아들이 가족들 앞에서는 한 치도 그 고뇌의 흔적을 내비치지도 않으니 말이다. 다음날은 토요일이었는데 아버지는 토요일 오후에 농협 공판장으로 나가셨고 그 시간에 평수는 가게로 나갔다. 그는 가게로 가서 아버지가 늘 앉아 있는 딱딱한 고물 의자에 앉아 가게를 지켰다. 그런데 토요일 오후에는 싸전에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탄을 사가는 주부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몹시 무료하고 심심했다. 그런 때 흔히 엉뚱한 생각이 찾아드는 것이다. 사실 그는 요즘 오직 한 가지 생각, 한 여인에 대한 생각 때문에 다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어머니를 파출소에 고발했다는 그 사과장수 여인을 한번쯤 만나고 싶었으나 요즘엔 그 여자 일도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바로 옆 가게에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살며시 그 여자가 어떻게 생긴 여잔지 보고 싶었다. 그가 직접 얼굴을 보면 그녀가 동생 말처럼 정말 악질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뜻밖에도 그렇게 나쁜 여인이 아니라면 좋은 방법으로 화해를 시도해볼 수도 있을 게 아닌가? 그리고 다시 가게 확장도 가능할 게 아닌가? 평수는 나무의자에서 일어서서 바로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옆집의 사과가게를 마치 몰래 담 너머로 남의 집을 기웃거리는 도둑처럼 목을 내밀고 들여다봤다. 가게 안에는 붉은 사과와 푸른 사과들이 잔뜩 쌓여 있고 또 진열되어 있었다. 그 사과들 속에 거의 묻히다시피 가게 복판에 앉아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와 평수의 눈길이 순간 마주쳤다. 그런데 거기 앉아 있는 여자는 인생의 갖은 풍상을 다 겪은 중년 여인이 아니고 뜻밖에도 새파란 아가씨였다. 평수가 더욱 놀란 건 그 아가씨가 바로 그가 하나님께 다시 한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던 그 아가씨였기 때문이다. 아니, 그 아가씨가 바로 어머니를 고발한 사과장수 여인의 딸이라니, 평수는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의 눈길은 그녀로부터 떠나지 못했다. 차츰 이쪽을 알아보는 눈치였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그건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는 기묘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뒤 곧 싸늘하고 냉담한 얼굴로 돌변해버렸다. 아가씨는 이쪽을 무시하겠다는 듯 그때부터 시선을 저쪽으로 돌려버렸다. 하는 수 없이 평수도 싸전의 고물 나무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마치 대포소리에 충격이라도 받은 듯 사정없이 마구 뛰고 있었다. 대체 이게 어찌된 노릇이냐? 하필이면 그 아가씨가 그 악질 사과장수 딸이라니. 아가씨와 첫번째 만났을 때가 신의 축복이라면 이번에는 분명 저주였다. 그는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녀를 다시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차라리 눈 앞에 영원히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 같았다. "형, 뭘 그렇게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는거야? 누가 쌀을 퍼 가도 모르겠는데." 평진이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며 핀잔을 줬다. 녀석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응, 너 지금 오니? 점심은 먹었어?" "먹었지. 그렇지만 또 배고픈데 형이 맛있는 것 사줄래? 형 제대비 아직 그대로 있지?" "요 얌체 같은 녀석, 제대비가 있는 걸 군대에도 안 가본 녀석이 어떻게 아니? 그건 그렇고 뭘 먹고 싶어?" "바나나 사주라. 바나나 먹어본 지가 삼 년은 된 것 같은데." "좋다. 바나나 사줄게. 그 대신 뭣 좀 물어보자. 너 이 옆 가게 아주머니 딸을 아니?" 평수는 목소리를 작게 했다. "은행에 다니는 딸 말야? 형이 그 여자를 어떻게 알지? 여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에 다닌대. 자기 엄마에게 효도한다고 그 아줌마가 맨날 자랑하고 다녀. 형은 그런데 왜 관심이 많지? 설마 좋아서 그러는 건 아니지?" "미쳤니? 처음 본 애를 좋아하게. 너 어머니 앞에서 그 따위 말하면 혼날 줄 알어. 그 여자 이름 너 알고 있어?" "효진이라고 부른던 걸. 맞았어. 토요일 오후하고 일요일에는 딸이 가게에 나와 있대. 어머니가 그랬어." "소리 좀 죽여 임마. 지금 저기 앉아 있다구. 난 방금 옆 가게를 기웃거리다가 처음 봤어. 그 아가씨 어머니를 보려다가 그 아가씨를 본 거야. 딸이 은행에 다니고 있어?" 37. 연탄과 사과(3) "그렇다니까. 은행에 다니는 게 뭐 대순가. 아이구 배고파. 바나나 언제 사줄 거야?" 평진이는 오직 바나나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지금 사줄게. 네가 잠시 가게를 지키고 있어. 내가 나가서 사오지." 평수는 아우에게 말하고 부리나케 가게에서 뛰어나왔다. 아우더러 바나나를 사오라고 시키지 않은 건 그 나름의 속셈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장 입구에 있는 큰 과일가게로 가서 바나나 두 개를 산 다음 자기네 가게 옆에 있는 과일가게 앞으로 갔다. 그 가게 앞에서 평수는 약간 망설였지만 기어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하기야 단순한 고객으로 들어가는 건 시비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평진이가 바나나를 먹고 싶다고 했을 때 평수는 벌써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 가게로 가서 사과를 사자. 사과를 사면서 그녀를 자연스럽게 만날 수가 있는 것이다. 설마 평수에게 사과를 팔지 않겠다고는 하지 않겠지. 그 아가씨는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다가 평수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마치 불에라도 데인 듯 보던 책을 던져버리고 발딱 일어섰다. 그녀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상대가 마치 도둑이라도 되는 듯 평수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안녕하십니까? 또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때 정말 고마왔어요." 평수는 마음은 몹시 떨렸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 아가씨는 조금도 긴장을 풀지 않은 자세로 쌀쌀하게 말했다. "나는 조금도 반갑지 않아요. 왜 여길 오셨죠?" 그녀의 말투로 보면 그녀 역시 자기가 우산을 씌어준 남자가 하필이면 쌀가게집 아들이라는 사실에 무척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오해하지 마십쇼. 저도 아우에게 대강 이야기는 들었어요. 아우녀석이 갑자기 과일이 먹고 싶다기에 사과를 사려고 왔을 뿐입니다. 이 사과 한 개에 얼마지요?" "사과 안 팔아요. 저쪽에도 과일가게가 있잖아요." "그러지 마십시요. 옆에다 가게를 놔두고 뭣 땜에 멀리 가서 삽니까? 이 사과 천 원어치만 주세요." 평수는 다짜고짜 지폐를 과일 위에 내놓았다. 그녀는 입술을 살며시 깨물면서 과일 위에 놓은 지폐를 노려봤다. 한동안 이상한 침묵이 둘 사이에 흘러갔다. 아가씨는 여전히 이쪽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녀가 지금 평수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평수가 자기 집을 찾아내려고 몇 시간이나 산동네를 헤매고 다녔다는 걸 그녀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과일 위의 돈을 노려보고만 있던 아가씨가 갑자기 당황스런 동작으로 과일 봉지를 가져다가 거기에 사과를 집어 넣기 시작했다. 그녀는 숫자를 세어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봉지 가득히 사과를 채워 넣고는 그걸 평수에게 던지듯 떠넘기며 몹시 다급하게 말했다. "빨리 나가세요. 우리 어머니가 오세요." 그 바람에 평수는 쫓겨나듯 사과가게에서 나왔다. 그가 나오는 것과 동시에 정말로 오십대의 호리호리한 여인이 과일가게로 들어갔다. 그녀는 그러니까 멀리서 자기 어머니가 걸어오는 걸 미리 봤던 모양이었다. 그는 그 여인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뒷모습만 보는 데 그쳤다. 그는 쌀가게로 돌아오며 아가씨의 행동에 약간의 의문을 느꼈다. 자기도 당당한 손님인데 어머니가 나타났다고 해서 자기를 무슨 도둑처럼 그렇게 황급하게 쫓아낼 수 있을까? 쌀집 아들에게 과일을 팔았다는 걸 그녀의 어머니가 알면 심한 꾸지람이라도 듣는 것일까? 그런데 평수는 쌀가게로 돌아와서 그의 어머니를 만났을 때 곧 그 아가씨의 행동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가 싸전으로 돌아오자, 뜻밖에도 어머니가 와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평수는 아우에게 바나나를 주고 어머니 앞에 사과봉지를 내밀었다. "이게 제가 제대비로 산 건데 잡수세요." "이게 뭐냐? 사과 아니냐? 너 이걸 어디서 샀지?" 어머니는 사과를 집을 생각은 않고 갑자기 표정이 살벌해져서 아들을 노려봤다. "어디서 샀으면 어때요? 어머니도 참 괜한 데 신경을 다 쓰시네." "이 녀석아. 이걸 어디서 샀느냐고 내가 묻지 않았어?" "저기 사장 입구에 있는 과일가게에서 사왔어요. 바나나도 그렇구요, 그럼 된 거죠?" 평진이가 바나나를 먹으면서 실실 웃고 있었다. 평수는 아우에게 눈을 흘겨 보였다. 쓸데 없는 수작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신호였다. 어머니는 그래도 의심을 풀지 않고 아들을 노려봤다. "너 이것 혹시 옆 가게에서 가져온 게 아니냐?" "정말 아니래두요. 하필 제가 그 가게엔 왜 갑니까?" 평수는 정말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쪽에는 얼씬도 마라. 난 사과만 봐도 치가 떨려. 네가 산거니까 먹긴 하겠지만 그 가게 물건 사줄 생각은 꿈에도 말라구. 내가 지금 뭘하고 다니는 줄이나 아니? 시장 사람들하고 우리 가게에 오는 손님들에게 그 여편네 물건 사주지 말라고 부탁하고 다닌다. 아무도 물건을 안 사주면 제년이 끝내는 물러나지 않고 배기겠니?" 어머니는 말을 끝내고 사과를 한입 크게 베어물었다. 그 모습이 마치 옆 가게 주인 여자를 베어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저토록 상대를 증오하고 있으니 서로 물건을 사고 판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제서야 평수는 그 아가씨가 자기를 황급히 쫓아낸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체 어머니는 뭣 때문에 옆집을 그토록 미워하고 있을까? 이웃 사촌이란 말도 있는데 아주 가깝게 지내지는 못할 망정 그토록 지독하게 증오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아가씨 어머니가 가게를 옮기지 않을 때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만약 두 가게가 그동안 서로 사이좋게 지냈다면 이런 때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두 가게 사이에는 지금 천리, 만리나 되는 먼 길이 가로놓여 있다. 그 거리를 좁힌다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가 옆 가게를 그토록 미워하고 싫어하는 한 평수는 드러내놓고 효진이란 아가씨와 사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한번도 부모의 뜻을 거역해본 일이 없었다. 또 아직은 이 지상에서 평수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의 양친들이었다. 평수는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어머니만 가게에 남겨두고 아우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오는 길에 평진이가 참지 못하고 형에게 불쑥 그 말을 또 꺼냈다. "형, 그 사과 옆 가게에서 사왔지?" "그래, 거기서 샀지. 너도 그 가게에서 과일을 사면 나쁘다고 생각하니?"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난 엄마나 아빠 편이니까 그 가게엔 절대로 안 가. 그런데 형은 왜 갔지? 형 그 아가씨에게 반했어? 여자도 많은데 하필 그 아가씨에게 반할 게 뭐야." "시끄러 임마. 누가 반했다고 그랬니? 이웃 가게에서 과일 좀 사온 게 뭐 그렇게 잘못이야? 나는 이유야 뭐든 이웃 사람을 미워하는 건 안 좋다고 생각해. 너도 괜히 그 사람들을 미워할 것까진 없잖아?" "그야 형 말이 옳지. 하지만 내가 뭐 부처님이나 공자님인가? 우리에게 못되게 구니까 미워할 수밖에 없는 거지." "아무튼 너 내가 그 가게에 갔다는 말 절대로 입밖에 꺼내면 안돼. 알겠어?" "알았어. 형이 바나나만 잘 사주면 난 약속은 지킬거야." 다음날도 평수는 아버지가 친척집 잔치에 가는 바람에 싸전으로 나가서 가게를 지키게 되었다. 그는 옆 가게에도 일요일이라 그녀가 나와 있는 걸 알았지만 그녀를 만날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또 사과를 사러 옆 가게에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만나자고 해도 그녀는 절대로 응해주지 않겠지. 그녀에게 그럴 마음이 있더라도 자기 어머니가 두려워서 그녀는 회피할 것이다. 그는 종일 그 아가씨 생각으로 마음이 우울했다. 그런데 세상에는 뜻밖의 일이 이따금씩 일어나는 법이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그 뜻밖의 일이 세상살이를 재미있게도 하고 복잡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정말 너무 예상 밖의 돌발사였다. 그 아가씨가 제 발로 쌀가게를 찾아오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저녁 때까지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던 평수는 가게로 누가 들어선 걸 알고 얼굴을 들고 손님을 쳐다봤다. 그는 손님을 보는 순간 이게 꿈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바로 눈 앞에 사과집 딸이 서 있었던 것이다. 어제처럼 이쪽을 그렇게 경계하는 표정은 간데없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녀는 쌀가게집 아들을 보고 있었다. 38. 연탄과 사과(4) 그녀를 본 순간 평수는 나무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가슴이 너무 뛰는 바람에 얼른 말이 나와주지 않았다. "어, 어서 오십쇼. 누굴 찾아오셨습니까?" '뭘 드릴까요?' 이렇게 말해야 하는건데 평수는 얼떨결에 엉뚱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니, 사실 그는 효진이가 자기를 만나러 왔다고 지레 짐작했기에 이런 말을 하고 만 것이다. 그녀는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어디까지나 침착하고 냉정했다. "아니오. 누굴 만나러 온 게 아니고 쌀을 사러 왔어요. 저 쌀 한말만 옆 가게로 보내 주세요. 빨리요. 제가 가지고 가고 싶지만 댁에서 가져다 주시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서요." 효진이는 몹시 급한 표정을 지었다. 평수가 너무 놀라 물었다. "우리집에서 쌀을 사면 어머님께서 야단치시지 않을까요?" "지금 마침 엄마가 안 계세요. 쌀을 사라고 돈을 주고 가셨는데 어제 빚을 갚고 싶어 엄마 몰래 살짝 건너온 거예요. 시간 없다구요. 곧 엄마가 돌아오실 거예요. 자, 여기 돈 있어요." 효진이는 쌀값을 나무의자 위에 놓고 이쪽에서 무슨 말을 더 꺼낼 틈도 안 주고 바람처럼 나가버렸다. 평수는 부리나케 쌀 한 말을 종이 봉투에 담아가지고 그걸 들고 옆 가게로 달려갔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이쪽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무슨 책을 읽고 있었다. 쌀을 가게 구석에 내려놓은 평수는 사과가게에서 그냥 물러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쪽을 외면하고 책을 읽고 있는 그녀에게 말을 걸기도 쉽지 않았다. 효진이는 언제 자기가 옆 가게를 방문했느냐는 듯 시치미를 떼고 책에만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 얄미운 모습을 평수는 한동안 지켜보고만 있었다. 삼 분쯤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가 그제서야 얼굴을 들고 평수에게 말했다. "쌀 가져다 주신 것 고마와요. 이젠 빨리 가게로 가보셔야죠." "우리 가게에서 쌀을 사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전 효진 씨가 제 생각에 공감을 해주신 게 뭣보다 기뻐요." 평수는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다. 효진이가 깜짝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아니, 내 이름을 어떻게 아셨어요? 알려드린 일이 없는데." "아우에게 들었어요. 사실은 그날……." 평수는 이때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그녀에게 그날 이후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되었다는 걸 솔직하게 고백하려고 하는데 그녀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이구, 엄마가 오실 시간이 됐어요. 엄마가 알면 큰일나요. 빨리 돌아가세요" 그 바람에 평수는 쫓겨나듯 다시 그 가게에서 황급히 뛰어나왔다. 그는 마치 뭘 훔치다가 쫓겨난 사람처럼 당황했고 수치심을 느꼈다. 하고 싶은 말을 미처 꺼내지 못한 아쉬움과 부끄러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렇지만 마음이 어두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자기네 가게로 쌀을 사러 왔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그는 큰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건 효진이가 적어도 자기 엄마와는 생각이 다르다는 증거이며 자기를 좋아한다고 단언은 못해도 적어도 미워하지는 않는다는 증거이다. 그는 옆 가게에서 쫓겨날 때와는 달리 기분이 좋아서 밝은 얼굴로 쌀가게로 들어왔다. 그런데 가게에는 그 사이에 아버지가 돌아와서 늘 앉아 있곤 하던 자리에 떠억 버티고 앉아 있었다. "너 가게를 비워놓고 어딜 갔다 오는 거야?" 잔칫집에서 한잔 거나하게 마셨는지 아버지는 혈색이 좋으셨다. 아버지는 오십대 중반의 나이보다 십 년은 젊어 보일 정도로 몸이 건강하고 성격도 활달한 편이었다. 그러나 한가지 흠이라면 누굴 일단 의심하거나 미워했다 하면 천지가 바뀌기 전에는 그 감정을 바꿀 줄 모르는 완고한 고집이다. 그래도 평수는 아버지를 매우 좋아했고 그 완고한 고집 때문에 도리어 아버지를 존경하기도 했었다. 왜냐하면 비록 시장의 싸전 주인에 지나지 않지만 아버지의 그 고집이야말로 자기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은 천금이 생겨도 하지 않는 강직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옆집에서 쌀을 배달해 달라기에 잠깐 갔다 오는 길인데요." "오, 그래. 옆집이라니, 어느 집이냐?" 평수는 아차 실수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과일가게 옆에 있는 라디오 가게요. 그 집에 한 말 배달하고 오는 길이예요. 돈 거기 있죠?" "그래. 알았다. 난 또 옆집이라기에 과일가게 여편네에게 쌀을 가져다 준 걸로 알고 깜짝 놀랬지. 너 그 여편네에게 가서 혹시 사과 같은 걸 사 먹은 일은 없는 거지?" 아버지는 아들을 빤히 쳐다봤다. "그런 일 없어요. 제가 뭐 어린앤가요. 사과를 다 사먹게." "임마, 사과를 어린애만 먹는 거냐? 어른들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매일 한 개씩 먹는 사람도 있는데. 나도 전에는 매일 사과를 먹었지. 건강에 좋다고 해서 말이야. 그렇지만 지금은 사과 꼴만 봐도 비위가 뒤틀린다. 너 그 집에는 얼씬도 하지 말어." "그 여자 그렇게 나쁜가요? 저는 아직 얼굴도 못 봤는데요." "독사 같은 여편네지. 그러게 과부가 됐겠지만. 난 그 여편네를 옆집에서 쫓아내야 해. 그래야만 내 장사를 맘놓고 할 수 있지. 나는 그럴 권리가 있다. 건물주하고 계약서까지 썼다가 그 여편네가 변덕을 부리는 바람에 허탕을 친거야. 그렇지만 그 계약서는 아직 효력이 있다구. 그게 제대로 풀렸다면 이 가게는 지금 시장에서 제일 큰 가게가 되었을 거야." 평수는 아버지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그는 감히 아버지를 설득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어버지는 누구에게도 설득당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문득 생각난듯 아들에게 물었다. "너 직장에는 언제부터 나가냐?" "일주일쯤 있다 나오라고 회사에서 그러더군요. 당장 나간다고 했더니 더 쉬라는 거예요." "그래 쉬어야지. 이제부턴 가게에도 나올 필요없다. 사실은 네가 제대하면 이젠 어른이니까 내가 장사하는 데 나오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너는 네 할 일이 있으니까 직장에만 나가면 되는 거야. 다신 여기 나오지 말어. 알겠냐?" "네, 그러죠." "ㄱ 집으로 들어가거라. 당장 직장에 나갈 때까지 집에서 푹 쉬어야지." "알겠어요.." 평수는 일어서서 가게에서 나왔다. 집으로 가는 비탈길을 오르면서 평수는 다시 어두운 기분에 빠졌다. 가게에 나오지 말라는 말이 그에게는 마치 무슨 형벌처럼 들렸다. 가게에 못 나가면 그녀를 만날 길도 없어진다. 아버지가 마치 그가 그녀를 가게에서 만날 걸 아시고 그런 말을 한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가게에 못 나가면 어디 가서 그녀를 만나랴? 또 다시 로타리를 헤매며 그녀를 기다려야 하는 걸까? 오늘에야 그는 그녀에게서 어떤 희망의 씨앗을 발견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 아버지는 그런 선고를 내리시다니 비탈을 오르는 평수의 발걸음은 천근처럼 무거웠다. "야, 제발 그 집이 어느 쪽에 있다는 것만 가르쳐줘. 넌 알고 있을 거야." "참, 형도. 난 모른다구." "그러지 말고 가르쳐줘. 이렇게 부탁이다. 바나나 사줄까?" "바나나도 싫다구. 난 형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형이 그러는 게 난 정말 싫어." "넌 알고 있는 게 분명해. 이렇게 형이 사정하는데 정말 그럴거야?" 평수는 울화통이 터져서 아우에게 화를 내고 말았다. 이틀 뒤면 그는 직장에 들어간다. 직장에는 시설이 훌륭한 숙소가 있어서 미혼자는 일주일 동안 그 숙소에서 생활하는 게 회사 규칙이었다. 평수는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몹시 조급했고 그래서 생각다 못해 평진이에게 매달린 것이다. 형이 화를 내도 아우는 요지부동이었다. 녀석은 철저히 엄마와 아버지 편이다. 아들로서는 좋은 아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평수는 그런 아우가 싫어졌다. 그는 방에서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마당에서는 바로 지척에 있는 산동네가 한눈에 바라다 보였다. 조개껍질이 바위에 붙어 있듯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브로크와 판잣집들이 황혼 속에 평화롭게 보였다. 저 집들 가운데 그녀가 숨어 있을 것이다. 아니 그녀는 아직 직장에서 돌아오지 않았는지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으로 불쑥 다가온 평진이가 말했다. "형, 내가 알려줬다고 누구에게 말하면 절대로 안되는 거야. 알겠어?" "그건 약속할게." "비탈을 백 미터쯤 올라가면 삼거리가 나와. 거기 구멍가게가 있지. 구멍가게에서 맞은편 길로 조금 가면 파란 대문이 있다구. 하늘색이야. 그게 그 집이야." "고맙다. 정말 고마워." 너무 마음이 급한 나머지 평수는 아우를 쳐다보지도 않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는 비탈길을 숨을 헐떡이며 마구 뛰어올라 갔다. 그는 그녀를 만나면 이젠 모든 걸 속시원하게 털어놓을 작정이었다. 39. 연탄과 사과(5) 삼거리 구멍가게까지 올라가서 맞은편 골목길을 바라보니 정말 하늘색 대문이 똑바로 보였다. 작은 판자문인데 제법 깨끗하게 페인트를 칠해서 산뜻하게 보였다. 그러나 판자 울타리 안쪽 집은 겨우 여남은 평 남짓한 보잘것 없는 블록 건물이었다. 지붕도 루핑이어서 비라도 많이 오면 비가 흘러내릴 것처럼 보였다. 그런 집이지만 평수의 눈에는 어떤 양옥보다 그 집이 아담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효진이가 사는 집이 바로 저 집이다. 그러자, 그는 가슴이 마구 뛰었다. 파란 문은 얌전히 닫혀 있었다. 그는 무작정 파란 문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문 앞까지 다가선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문을 두드릴까? 소리쳐서 그녀를 불러낼까? 만약 안에서 뜻밖에 사과장수 여인이 뛰어나오면 일이 크게 벌어진다. 그가 이럴까 저럴까 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누가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는 얼른 옆으로 비켜 섰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행히 꼬마녀석이 뜀박질로 와서 평수를 한번 흘낏 보고는 파란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국민학교 오륙 학년쯤 되어 보이는 사내녀석이었다. 그 사내녀석을 붙들 걸. 그는 후회했다. 그런데 그 꼬마녀석이 잠시 후에 문을 열고 다시 밖을 내다봤다. 평수가 뭐라고 말을 걸려고 하는데 꼬마는 평수를 잔뜩 경계하는 표정을 보이더니 재빨리 문을 닫아버렸다. 저 녀석이 내가 싸전집 아들인 걸 알아보면 어떡한다? 하지만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 평수는 우두커니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때 낮은 판자 울타리 안쪽의 창이 살며시 열렸다. 그리고 바로 그녀 얼굴이 거기 나타났다. 평수는 너무 놀라 뒷걸음질쳤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녀는 몹시 의아스런 눈길로 평수를 바라봤다. 아마 꼬마녀석이 누나에게 밖에 누가 서 있다고 알린 모양이었다. 평수는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에게 인사를 보냈다. "오랜만입니다. 여기 사시는군요." 그녀는 그러나 대꾸를 하지 않고 조용히 쳐다보기만 했다. 한참만에 효진이가 물었다. "여긴 웬일이세요?" "저어 사실은 효진 씨를 만나려고 왔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그 작은 창문이 차갑게 닫겨버렸다. 평수는 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착각을 하고 있을까? 처음부터 이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런데 잠시 후에 파란 문이 열리더니 옅은 연두색 쉐타를 입은 효진이가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녀는 평수 옆으로 오면서 평수에게 불평을 했다. "정말 댁은 겁도 없으시군요. 내 동생도 있는데 저를 이런 식으로 찾아오면 어떡하라는 거예요? 동생이 엄마에게 다 일러바칠 거예요." "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가게도 못 나가고 이런 식이 아니면 효진 씨를 만날 수 없어요." "여기 이렇게 서 있다간 엄마하고 마주치고 말아요. 무슨 얘길 하실 거예요? 이야기가 길어요?" "반 시간이면 됩니다." "그럼 우리 이렇게 해요. 내일 제가 퇴근할 때 로타리 빵집에서 만나요. 여섯 시에요.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나무 서 있는 곳 있죠? 바로 그 옆에 빵집이 있어요." "꼭 약속을 지키셔야 합니다. 난 시간이 없어요." "군대로 다시 돌아가나요?" "아뇨. 직장으로 가죠. 거기선 합숙 생활을 하니까 집에서는 일단 떠나는 거죠." "알았어요. 댁이나 시간을 잘 지키세요." 이 말을 한 뒤 그녀는 바람처럼 대문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하지만 평수는 나를 듯이 비탈을 내려왔다. 그녀와 약속을 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나무 서 있는 곳 있죠? 평수는 효진이가 했던 이 한마디를 몇번이나 속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그녀의 이 말이 그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그 장소를 기억하고 있다는 건 바로 그녀가 자기를 만난 일에 특별한 의미를 둔다는 말이 아닌가? 그는 멋대로 이런 해석을 내렸다. 다음날 오후 여섯 시에 평수는 그 빵집 구석자리에 앉아 있었다. 효진이는 오 분쯤 늦게 그곳에 나타났는데 밤색 스커트와 재킷을 산뜻하게 입고 있었다. "회사에서 결산이 있어서 조금 늦었어요." 평수 앞자리로 와서 사뿐히 앉으면서 그녀가 말했다. 평수는 오렌지 쥬스 두 잔을 주문했다. 효진이는 아주 침착했고 한편 천연덕스러웠다. 직장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런지도 몰랐다. 그녀가 먼저 또 입을 열었다. "그 회사 뭐 만드는 곳이죠?" "전기용품을 만들죠. 전기줄, 퓨즈, 변압기, 뭐 그런 물건들이에요." "월급 많이 받으세요?" 말을 물으면서 그녀도 우스운지 피식 웃었다. "아직은 조금. 경력이 많이 쌓여야죠." "그런데 큰일 났어요. 동생녀석이 어제 누가 집에 왔었다고 엄마에게 일러 바쳤어요.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요. 동생이 댁을 알아요. 쌀집 아들이란 걸 안다구요." "어머님도 내가 찾아온 걸 아십니까?"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심상치가 않아요. 동생은 그런 말까진 안했다고 잡아떼는데 알 수가 없죠. 그 녀석은 본래 믿지 못할 녀석이니까. 엄마가 살살 꼬시면 죄다 불어버릴 녀석이죠. 돈을 달라기에 천 원을 뺏겼어요. 아무 죄도 없으면서 댁 때문에 손해를 봤다구요. 할 말이란 뭐예요?" "난 내일 회사로 갑니다. 주말에는 올 수 있지만 그때 효진 씨를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죠. 그래서 가기 전 한번 만나려고 한겁니다. 효진 씨는 나를 어찌 생각하실지 몰라도 나는 효진 씨가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았어요. 옆 가게에서 마주치기 전까지 난 효진 씨를 만나려고 무척 찾아 헤맸어요." 여기까지 평수는 용기를 다 쏟아서 말을 해버렸다. 효진이는 여전히 침착했다. 그녀가 표정에 변화없이 말했다. "왜 저 같은 여자를 좋아하시죠? 가난뱅이 사과장수 딸인데." "내 눈에는 효진 씨가 공주님처럼 보이는데요. 이건 진심입니다." "저도 처음 봤을 때 좋은 인상을 받았어요. 하지만 싸전집 아들인 걸 알았을 땐 한편 실망했고 한편 반갑기도 하더군요." "왜 반가왔습니까?" "전부터 소문을 많이 들었으니까요. 댁의 어머님이 시장에서 늘 아들 자랑을 하고 다니시나 봐요. 효자이고 똑똑하고 성실하다고요. 그래서 싸전집 아들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하기도 했어요." "아 참, 내 이름은 평숩니다. 김평수라고 해요." "이름 같은 건 알 필요가 없어요. 우린 다시 못 만날 거니까요. 부모님께서 우리가 만난다는 걸 아셔봐요. 정말 불벼락이 떨어질 거예요. 난 댁의 아버님이 무서워요. 성질이 불 같으시더라구요. 어머님도 무서워요. 우리 엄마도 내가 댁하고 사귄다고 생각하면 자살이라도 하실지 몰라요. 생각만 해도 겁이 나요. 그러니까 우린 절대로 다시 만날 생각을 하면 안돼요." "그게 효진 씨 진심입니까?" "그럼 제가 거짓말 하고 있는 줄 아세요?" "안돼요. 난 효진 씨를 누가 뭐래도 만나고 말겠어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를 막지 못해요. 나는 어제 효진 씨 집을 찾아갔을 때 이미 모든 걸 각오했어요. 효진 씨만 좋다면 난 무슨 일이든 할 거라구요." "난 좋다고 한 적 없어요." "그건 진심이 아니예요. 난 알아요. 부모들이 싸운다고 우리까지 그럴 필요가 뭐 있어요? 난 우리들이 잘만 하면 부모님들도 화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어림없는 생각이에요. 아직 평수 씨가 여기 실정을 잘 모르셔서 그래요. 아니 그런데 지금 우리가 뭣 땜에 이러고 있죠? 누가 보면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겠어요. 이제 그만 나가요." 효진은 일어설 자세를 취했다. "이 다음 주말에 만나기로 약속해줄 수 있어요?" "그럴 필요 없어요. 난 약속 못해요." 효진은 벌떡 일어서더니 밖으로 먼저 나갔다. 평수는 그녀를 따라 나갈 수가 없었다. 잘못했다간 운 나쁘게 어머니나 아버지와 마주칠지도 몰랐다. 그는 일 분쯤 빵집에 머물다가 혼자 나왔다. 효진의 모습은 간 데 없었다. 그는 마음이 허전하고 슬펐다. 이제 그는 원인을 안 것이다. 부모들 때문에 그녀는 자기를 피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에게는 시간도 없었다. 그는 회사로 내일 떠날 준비도 해야 했다. 평수는 집으로 가서 짐을 꾸렸다. 그리고 쓸쓸한 마음으로 다음날 아침 일찍 안양에 있는 회사 공장으로 떠났다. 그는 마치 오랜 사랑 끝에 크게 실연을 당한 사람처럼 괴롭고 처량했다. 40. 연탄과 사과(6) 오랜만에 회사로 돌아온 평수는 모든 걸 잊고 작업에 열중했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 자기 일에 충실하고 열성적인 사원이었다. 입대 전에 그가 두 번이나 모범 사원 표창을 받은 것이 그 증거였다. 주말에는 합숙소를 나와서 시내 구경을 하거나 가까운 곳에 집이 있는 사람은 집에 다녀오는 게 이 회사 풍속이었으나 평수는 당분간 집에도 안 가고 시내 외출도 하지 않을 결심이었다. 그는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도 혼자 남아 책을 읽거나 조용히 생각에 잠기곤 했다. 물론 그렇다고 효진이란 아가씨의 모습이 기계적으로 기억에서 사라진 건 아니다. 그가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 선명하게 눈앞에 어른거렸다. 하지만 평수는 자기는 그녀를 곧 기억에서 지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긴 지우지 않을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가? 그녀와 자기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날 수가 없다는 그녀의 말이 옳았다. 회사로 와서 냉정하게 생각할수록 평수는 효진의 말이 옳다는 걸 깨달았다. 누구보다 자기 부모님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평수다. 그는 이순간까지 한번도 부모의 뜻을 거역해본 기억이 없다. 그러니 효진이 앞에서 그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단념하지 않겠다고 말한건 얼마나 엉터리 허풍이었는가? 평수는 이 주일이 지나도록 집에 가지 않았다. 집에서 걱정할 것 같아서 그는 회사 일에 익숙해지기 위해 공장에 당분간 남아 있겠다고 부모님에게 알렸다. 그런데 삼 주째 되었을 때 누가 공장으로 그를 찾아왔다. 토요일 오후였는데 그날도 평수는 합숙소 방구석에 혼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 수위실에서 전갈이 왔다. 그는 슬리퍼를 끌고 수위실로 나갔다. 뜻밖에도 거기에 평진이가 서 있었다. "형이 안 오니까 엄마가 가보라고 하셨어. 집에서 걱정하고 있다구. 무슨 화난 일 있어? 형." "화난 일은 무슨 화난 일이야? 너 내 방 구경 해볼래?" 평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수는 아우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근사한데. 옷장도 있고 책상도 있고 이 방에서 몇이 있지?" "두 사람, 그 친구는 영화구경 나갔어." "나 형이 왜 집에 안 오는지 알고 있어. 맞춰볼까?" "임마, 쓸데없는 소리 관둬. 너 집에서 그런 소리 했다간 큰일 날 줄 알어." "내가 뭐 어린앤 줄 알어? 형, 형이 정 그렇게 나오면 나 진짜 형에게 들려줄려고 했던 얘긴 접어두고 그냥 갈거야." 평진이는 장난꾸러기답게 싱글거리고 있었다. 그 말을 듣자, 평수는 갑자기 등에서 식은땀이 솟았다. 이 녀석이 뭘 가지고 이럴까? 그런데 사람에게는 이상한 예감이란 게 있는 것이다. 아우의 한마디로 평수가 벌써 잔득 긴장해버린 게 그 증거였다. "내게 들려주려고 한 얘기가 뭐야? 빨리 말해봐. 빨리." "공짜로는 곤란해. 나도 여기까지 교통비와 금싸라기 같은 시간을 허비하고 왔단 말야. 형 뭐 줄래?" "용돈을 주지. 빨리 말해봐." "좋았어. 사실은 나 야구 글러브 하나 사야 하는데 이달치 용돈 벌써 다 써버렸어. 아버지에게 말할 체면이 없었다구." "글러브를 사주마. 돈을 줄게, 네가 가서 사고 빨리 얘기나 해라." "알았어. 나 그 사과가게 딸 두 번이나 만났는 걸. 효진 씨 말이야. 한 번은 나 혼자 쌀가게에 있는데 사과를 가지고 왔어. 사과 두 개를 가지고 와서 나더러 먹으라는 거야. 다른 말은 없이 그냥 갔지만 난 정말 놀라자빠졌지. 다른 때는 거리에서 마주쳐도 흘겨보거나 외면하곤 하더니 아주 상냥한 말씨로 나더러 사과를 먹으라는 거야. 나는 또 어머니가 볼까봐 사과를 감춰 놓고 먹는라고 혼났지." "두 번째는 뭐야?" "그래. 이게 사실은 중요하지. 두 번째는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오는데 그 여자가 뒤쫓아와서 내게 물었어. 너의 형은 언제 집에 오느냐고. 그래 내가 모른다고 했더니 시무룩한 표정으로 가버리더군. 형, 그 여자에게 돈 꾼 것 있어?" "임마, 시끄러. 자 여기 돈 있다." 평수는 아우에게 만 원을 주었다. 그는 아우에게 자기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안 보이기 위해 일부러 아무 말도 안했다. 평진이는 돈을 받은 뒤 한 시간쯤 형과 함께 있다가 숙제가 있다며 곧 집으로 돌아갔다. 아우와 함게 있을 때만 해도 평수는 무척 냉정하고 침착하게 행동했다. 아니, 토요일과 일요일이 지날 때까지도 그는 자기를 억제하며 지냈다. 그까짓 이웃끼리 사과 몇 개 나눠준 걸 가지고 큰 의미를 붙일 수는 없지 않을까? 그리고 효진이가 자기가 언제 오느냐고 물은 것도 그렇다. 단순히 지나가는 인사로 물었을 수도 있다. 그는 토요일과 일요일이 지날 때까지도 애써 이렇게 해석했었다. 그러나 수요일에 작업을 끝내고 저녁을 먹고 나서 각자 방으로 돌아왔을 때 라디오에서 어느 여자 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왔는데 그 노래를 한동안 듣고 있던 평수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옷을 다시 주워 입었다. 그리고 밖으로 정신없이 뛰어나왔다. '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난 그녀를 다시 만나봐야 한다. 그녀가 나를 지금 찾고 있지 않은가?' '왜 너 자신의 순수한 욕망을 이유없이 억제하려고 하나? 그게 죄가 되나? 그건 결코 죄가 아니야.' 평수는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가면서 이런 말을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오늘은 물론 토요일도 일요일도 아니다. 따라서 공장 밖으로 나가는 건 일종의 풍속 위반이다. 하지만 그는 마음이 급해서 그런 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빨리 가서 효진이를 만나야지. 그는 오직 이 생각밖에 없었다. 평수가 산동네에 도착한 건 아홉 시가 지났을 때였다. 그는 집에도 들르지 않고 다짜고짜 효진이네 집으로 달려갔다. 그 집 파란대문 앞에 섰을 때 그의 온몸에 땀이 빗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방 창문은 불이 꺼져 있었다. 그러나 평수는 무작정 창 밑으로 가서 그 창을 손으로 두드렸다. 몇 번이나 두드렸을까? 그제서야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구야?" 그건 분명 효진의 놀란 목소리였다. "나, 김평수입니다." "기다리세요. 곧 나갈게요." 그녀가 낮은 소리로 빨리 말했다. 그런데 누군가 다른 여인의 목소리도 들렸다. 아마 누가 왔느냐고 효진에게 묻는 말 같았다. 그러나 그때 평수는 효진이를 만날 생각만 하느라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 같은 건 귀에 잘 들리지도 않았다. 한참만에 대문을 열고 효진이 나왔다. "빨리 저쪽으로 가세요. 엄마가 계셔요." 나오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들은 골목을 벗어나 비탈길 꼭대기쪽으로 올라갔다. 그곳에 넓은 빈터가 있었는데 거기서는 서울의 풍경이 잘 보였다. "엄마가 누구냐고 묻기에 급한 김에 은행 사람이 뭐 물을 게 있어서 왔다고 말했어요. 이 시간에 나를 찾아올 사람이란 아무도 없거든요. 그런데 엄마가 안 믿는 눈치였어요. 어떡하죠?" "미안합니다. 갑자기 효진 씨가 만나고 싶어 염치불구하고 왔어요. 사실 오늘은 나올 수 있는 날도 아닌데요." "미안할 거 없어요. 저도 만나고 싶었어요. 왜 그동안 주말에도 안 오셨죠?" "그건 효진 씨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나는 반 년쯤 집에 안 올 작정이었어요. 그런데……" "어머나!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네요. 그날 빵집에서 만난 뒤 전 우리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그리고 결론을 냈어요. 평수 씨가 좋다면 난 평수 씨를 만날래요. 물론 어려움은 있겠지만 우리 둘이 힘을 합하면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오늘 정말 잘 오셨어요. 사실은 아까 문을 두드릴 때 난 평수 씨를 생각하고 있었는 걸요." "난 꿈만 같습니다. 효진 씨 입에서 이런 말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난 모든 걸 단념하고 집에도 안 올 생각이었어요. 난 이제 아무것도 겁 안나요. 우리 부모님도 나쁜 분들은 아니니까 그렇게 걱정 안해도 좋을 거예요. 정말 난 내가 행운아란 걸 느껴요. 이런 기분은 태어나서 처음입니다. 효진 씨, 정말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은 싫어요. 그런 말은 안 쓰는 게 좋아요. 평수 씨는 너무 순수해요. 순진하고, 그래서 좋아졌나봐요.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이런 일은 처음인 걸요. 이렇게 엉뚱하게 갑작스럽게 누굴 좋아할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이번 주말에 나올 수 있나요." "나와야죠. 효진 씨가 나오라면 백 번이라도 나오죠." "우리 주말에는 차도 마시고 구경도 해요. 이야기도 많이 하구요. 지금은 시간이 없어요. 아마 엄마가 문 밖에서 기다리실 거예요. 엄마가 걱정돼요. 지금 공장으로 가셔야 하나요?" "걱정없습니다. 걸어서라도 갈 수 있어요." "그럼 빨리 가세요. 토요일 몇 시쯤 나올 수 있어요?" "세 시, 그 빵집에서 만날까요?" "그러죠, 틀림없이 나갈게요. 빨리 가세요." 말하면서 효진은 손바닥으로 남자의 등을 밀었다. 떠밀려서 평수는 몇 발짝 걸어가다 뒤돌아봤다. 그녀가 그를 보고 있었다. "잘 가세요. 그때 만나요." 그녀가 말하며 손을 흔들었다. 41. 연탄과 사과(7) 효진은 평수가 어둠 속으로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돌아섰다. 그런데 돌아선 순간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무겁고 왠지 불안했다. 그건 그녀의 예감이었다. 아니나다를까 효진이 파란 대문으로 다가갔을 때 어머니가 문 밖까지 나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먼저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 침묵이 효진은 더 겁이 났다. 효진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그제서야 어머니가 딸을 불러 세웠다. "너 지금 만난 사람이 누구지?"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 목소리는 어머니가 잔뜩 긴장했을 때 나오는 목소리다. "누군 누구예요? 은행 사람이라고 말했지 않아요." "뭐 은행 사람? 은행 사람이라고도 이름과 직책은 있을 것 아니니?" "어머니도 참 괜히 그러시네. 내가 뭐 나쁜 짓이라도 했다고 생각하세요?" "그 사람 이름하고 직책을 대봐. 그리고 무슨 일로 온 것까지 말해. 내가 내일 은행에 전화해서 확인해볼 거니까. 다 큰 계집애가 밤늦게 누가 불러낸다고 나가는 걸 난 좋아하지 않는다. 은행 사람이 그랬다면 내가 다음에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줄 테다." 효진은 어머니의 각오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어머니는 이미 뭔가 낌새를 알고 계신다. 하긴 우리 엄마가 어떤 여인인가? 서른에 혼자가 되어 눈치 하나로 자식들을 키우고 버텨온 여인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차피 들통날 일을 가지고 계속 거짓말을 이어가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효진은 사실 거짓말에 소질이 없었다. 그리고 만약 거짓 이름을 댔다가 엄마가 내일 정말 은행에 전화를 하는 날이면 이 무슨 망신일까? 효진은 등에서 식은땀이 솟았다. "왜 대답을 못하니? 빨리 말하면 될 것 아냐?" "엄마, 나 사실은……." "사실은 어쨌다는거냐?" "엄마가 너무 놀라지 않는다고 약속해. 그리고 화내지 않는다고 약속해요." "난 그런 약속 못한다. 지금 너하고 장난하고 있는 게 아냐." "좋아요. 사실대로 말할게요. 지금 만난 사람 싸전집 아들이었어요. 군대에서 얼마 전에 제대하고 공장에 근무하는 그 집 큰아들을 만났어요." "뭐, 뭐라고? 싸전집 아들이라구?" 어머니 목소리가 갑자기 하늘 모르고 올라갔다. 효진은 이왕 말을 꺼낸 김에 냉정하고 침착하게 평수를 처음 만난 때부터 지금까지 전말을 어머니에게 고백했다. 효진의 말이 끝나자, 예상대로 어머니는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 거기 앉아봐!" 어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효진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겁이 나지는 않았다. 그녀는 마루에 앉았다. "그 불량배가 내 딸을 꼬여내다니, 허 나 기가 맥혀 말이 안 나오네. 그놈은 그렇다 치고 내 딸이 그런 놈에게 넘어갈 정도로 형편없는 앤줄 난 몰랐다니까. 너 정말 이 에미를 죽일 셈이냐?" 어머니는 완전히 감정의 포로가 되었다. "너 이 에미가 땅바닥에 목을 박고 죽는 꼴을 봐야 속이 시원하겠냐? 어쩌자고 그런 놈을 만나느냐구. 글쎄 이 서울바닥에 사내 씨가 말랐다고 해도 그 집구석 종자들이 어떤 종잔지 너도 빤히 알면서 그놈을 만나?" "엄마, 그 사람 엄마가 생각하듯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에요. 죄없는 사람에게 불량배란 말은 너무해요. 엄마는 아직 그 집 아들 얼굴도 모르잖아요." "듣기 싫어. 그놈이 그놈이지, 그 쌍판대기 보면 뭘 하냐? 너 그놈 또 만나려거든 나하고 모녀간 인연 끊고 만나라. 그 늑대 같은 놈. 누구 딸을 넘봐? 내일 그 집에 가서 당장 요절을 내고 말 테다. 그 뻔뻔한 에미 낯짝에도 침을 뱉어주고 오겠어. 다신 시장에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게." "아이구, 엄마. 그 집 부모하곤 정말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 부모들도 모른다구요. 그 부모들은 제발 건드리지 말아요. 이렇게 사정하겠어요." 효진은 손바닥을 어머니 앞에서 싹싹 비볐다. "그 뚱뚱보 여편네 때문에 우리 가게가 지금 파리 날린다는 것 너도 알지? 어제도 순대국집 아줌마가 과일 사러 우리 가게 앞으로 오는데 그 뚱보가 어디서 바퀴벌레처럼 나타나서 순대국집 아줌마를 다른 데로 끌고 가버렸지 않니? 이 에미가 그 여편네 때문에 지금 홧병으로 죽게 생겼는데 너는 그놈하고 팔짱 끼고 다닐 마음이 나? 내가 내일 그 집에 가서 이놈의 여편네 얼굴에 침을 뱉아주나 안 주나 두고 봐라." "엄마, 제발 그 집에는 가지 말아요. 내가 그 사람 다시 안 만나면 될게 아니에요?" "너 그 약속 정말 지킬 수 있냐?" "엄마가 그 집에 안 간다면 나도 지킬게요." "좋다. 네가 그놈만 상대 않는다면 나도 그 집에 가고 싶지는 않아. 그 집 사람들은 악마야. 천하악질이구 놀부 심보를 지닌 종자들이라구. 너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나는 네가 제법 똑똑한 줄 알고 지금껏 내버려뒀는데 이제부터는 에미가 쌍심지를 켜고 지켜봐야겠다." 효진은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으나 문제는 정작 이제 시작이었다. 싸전집 아들을 만나지 않겠다고 한건 물론 효진이 우선 다급한 불을 끄기 위해 내뱉은 말이었다. 어떻게든 어머니가 싸전집으로 달려가는 것은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효진은 당장 토요일에 평수와 만나기로 약속한 것부터 걱정이었다. 어머니 성격상 이제부터 자기가 은행에 있는 시간만 빼 놓고 줄곧 자기를 감시하고 통제할 것이 빤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평수와의 약속을 간단히 저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효진이도 그만한 자기 고집은 갖고 있었다. 발없는 소문이 빠르다는 말이 있다. 세상에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그러니까 평수가 수요일에 느닷없이 산동네를 다녀간 뒤 이틀만에 싸전집 마나님 귀에도 이상한 이야기가 흘러들어갔다는 게 조금도 놀랄 일은 아니다. 싸전집 마나님은 시장의 푸줏간에 들렀다가 그 놀랄 만한 소문을 들었다. 푸줏간 아줌마는 싸전집 마나님과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라서 아주 고약한 이야기도 서로 전할 수 있었다. 푸줏간집 아줌마가 전한 말을 그대로 옮긴다면 이렇다. "형님, 나도 안 믿고 싶지만 그런 말이 있으니까 그런 사실이라도 아시라고 말하는 거예요. 글쎄 형님의 그 착한 아들이 사과집 그 여편네 딸을 좋아한다고 소문이 자자하다구요." "내 아들이라면 평수 말인가?" "그야 그렇겠죠." "평수가 그러니까 그 고양이 같은 여편네 딸에게 반해가지고 쫓아다닌다는 그 얘긴가?" "그렇대두요." "그런 얘기 임자는 어디서 들었어?" "순대국집 아줌마가 그러던데요." "미친 소리 작작하라구들 그래. 그 아이는 그 집 딸년 코빼기도 못 봤어. 그건 내가 잘 알아. 코빼기를 봤더라도 애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그런 잡종한테 반할 우리 아이도 아니고." 그때까지만 해도 싸전집 마나님은 태연자약했다. 이야기가 너무 터무니없었기 때문이다. 평수가 어떤 앤가? 부모 몰래, 그것도 부모가 자다가도 이빨을 가는 여편네의 딸을 쫓아다닐 그런 쓸개없는 놈인가? 세상에 계집애가 씨가 말랏다 해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마나님은 그래서 소문을 듣고도 마음이 한동안 편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나님도 심기가 편치 않았다. 누가 그런 말을 퍼뜨렸을까? 아니땐 굴뚝에 연기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고 보니 평수가 이 주일씩 집에 얼씬도 않는 것이 이상했다. 평수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 그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소문의 뿌리를 확인하러 시장바닥을 쓸고 다닐 수는 없었다. 우선 자기 망신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싸전에 들어앉아 끙끙 앓기만 했다. 물론 사실은 아닐게다. 하지만 아들 입으로 부인하는 말을 듣기 전에는 안심할 수 없었다. 푸줏간 아줌마는 순대국집 아줌마로부터 그 얘길 들었다고 했다. 순대국집 아줌마는 누구로부터 들었을까? 그 뿌리를 캐어보면 결국 사과집 여인이 나오게 마련이다. 딸에게 싸전집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입을 봉하고 있겠다는 약속을 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녀는 과일가게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붙잡고 자기 딸을 유혹한 싸전집 불량배에 관해 입에 거품을 물어가며 욕을 해댔다. 그러니 시장바닥에 소문이 파다하지 않겠는가? 불과 며칠 동안 일어난 사태의 변화를 평수는 알 까닭이 없었다. 토요일 오후가 되자, 평수는 효진을 만난다는 오직 한가지 기대를 안고 로타리의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42. 연탄과 사과(8) 평수는 효진과 약속했던 3시보다 정확하게 10분 전에 로타리 빵집으로 들어가서 효진을 기다렸다. 오늘은 함께 시내로 가서 영화도 한 편 보고 멋진 레스토랑으로 가서 효진이 좋아하는 요리도 사줘야지. 사실 평수는 이제까지 여자와 영화를 함께 구경하러 간 경험이 한번도 없었다. 멋진 레스토랑 출입은 더더구나 꿈도 꾸지 못했었다. 그렇다고 남들이 그런 데 드나드는 걸 보고 부러워하지 않은 건 아니다. 젊은 연인들이 활달하게 팔짱을 끼고 영화관이나 레스토랑에 드나드는 걸 볼 때마다 평수는 언젠가 자신에게도 그런 날이 올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만 품곤 했었다.오늘이 바로 그날이 아닌가? 평수는 회사 내 이발관에서 머리도 깨끗하게 손질했고, 옷도 특별히 세탁을 해서 입고 나왔다. 효진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불과 며칠만에 만나는 것이지만 마치 일 년만에 그녀와 재회를 기다리듯 평수는 효진의 얼굴이 눈앞에 가물거렸다. 그런데 3시에서 어느덧 10분이 지나갔다. 또 10분이 속절없이 지나갔다. 은행에서 사무 처리가 좀 늦는 거겠지. 평수는 시계를 되도록 안 보며 애써 태연하게 기다렸다. 그때 빵집 여자가 평수에게 물었다. "손님이 평수 씬가요?" "네." "전화 받아봐요." 평수는 벌떡 일어나 카운터로 가서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전화 바꿨습니다." "저 효진이에요. 미안해서 어쩌죠?" "지금 어디 계십니까?" "집 앞 구멍가게에서 전화하고 있어요. 로타리에서 엄마가 보낸 외삼촌에게 붙들려 꼼짝없이 집으로 끌려온 걸요. 외삼촌이 잠시 담배 사러 간 사이에 나와서 전화하는 거예요.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말할게요. 엄마가 사실을 알고 계세요. 그래서 저를 꼼짝 못하게 지키는 거예요. 우린 남들처럼 데이트는 못 할건가 봐요. 오늘 약속 어긴 걸 용서하세요. 하지만 효진은 울고 있다구요. 이담에 다시 만날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겠어요." "잠깐, 내 말 좀 들어봐요. 난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오늘 효진 씨를 못 만나면 죽을 것만 같은데요. 일 분이라도 시간을 내줘요. 얼굴만 보고 회사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약속할 수는 없다는 걸 아셔야 해요. 그렇지만 평수 씨가 정 고집하면 저녁에 산동네 꼭대기 그 공터로 나가볼게요. 여덟 시나 아홉 시쯤, 전화 이만 끊어요." 다시 자리로 돌아온 평수는 악몽을 꾼 것 같았다. 대체 이게 무슨 꼴인가? 나는 누구의 저주를 받아서 이런 괴로운 사랑을 해야 하는 것인가? 그는 부모님을 처음으로 원망했다. 왜 부모님은 남을 그렇게 미워하고 계실까? 세상에는 정말 미워해야 할 사람, 정말 나쁜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은데 말이다. 효진의 엄마가 정말 그렇게 나쁜 여잘까? 그럴 리가 없다. 다만 이해관계가 얽혀서 자기 이기심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헐뜯고 있을 것이다.그건 정말 사소한 일이고 잘못된 일이다. 그런 이유로 효진과의 관계를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현실은 자꾸 그쪽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아 몹시 괴로왔다. 평수가 오랜만에 어머니를 만났을 때 그 고통은 극도에 도달했다. 효진의 전화를 받고 나서 평수는 오랜만에 집에 들렀다. 마침 어머니가 집에 계셨다. 어머니는 왠지 평수를 쌀쌀하게 맞았다. "너 거기 좀 앉아봐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다 말고 어머니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듯 마루로 나와서 아들을 불러 앉혔다. "그럴 리가 없지만서도 하도 기가 막힌 소리를 내가 들어서 그런다. 단도집입적으로 묻는데 너 그 사과장수 여편네 딸을 알고 있는 거냐?" "네 알아요. 왜 그러시죠." "알다니? 네가 그 딸년을 어찌 안단 말이냐?" "사실은 그걸 미리 말슴드릴려구 생각했었죠. 전 그 아가씨를 좋아하고 있어요."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뭐라구? 너 에미 앞에서 못할 소리가 없구나. 하필이면 사과장수 딸년이냐? 세상에 쌔고쌘게 계집애들인데 나하고 불구대천인 그 여우 같은 여편네 딸년을 좋아하다니, 아이구 선조님들 우리 아이녀석 눈 좀 똑바로 뜨게 해주세요." 어머니는 무당처럼 손바닥을 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만큼 충격을 받았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시장바닥에 소문이 파다했구나. 네가 사과장수 딸년에게 미쳐돌아간다는 소문이 지금 시장바닥에 쫙 퍼졌다. 누가 그 소문을 퍼뜨린 것 같으냐? 뻔하지 뭘. 그건 그렇고 너 제정신 가지고 그런 말 하고 있냐?" "어머니. 그 아가씨를 좋아하는 게 왜 나쁘다고 생각하세요? 그 아가씨는 제가 알고 있는 한 착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아가씨라구요. 난 그 엄마도 나쁜 여자일거라고 생각 안해요. 가게 때문에 서로 미워하게 됐을 뿐이죠." "평수야. 제발 이 에미를 생각해서 그런 소리 다시는 입밖에 내지 말아라. 그 딸년도 만나지 말어. 이담에 내가 네 색시감은 어련히 알아서 골라줄 텐데 뭐가 급해서 그런 아이를 만난단 말이냐? 제발 이 에미 체면을 봐서라도 이 순간에 손을 끊겠다고 약속해라." 어머니는 사태가 간단치 않음을 알았는지 애원조로 나오셨다. 평수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왜 대답을 않는 거니? 만약 네 아버지라도 이 일을 아시는 날엔 집안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너 아버지 성미 잘 알지?" "난 아버지를 설득하겠어요. 어머니도 어머니 생각이 옳지 않다는 걸 아시게 될 거예요." "어림없는 소리 말어. 난 아버지 귀에 이 소문이 들어갈까봐 조마조마하며 감췄는데 겁도 없이 그런 말을 해? 너 정말 에미 말을 안 듣고 고집 피우려거든 이 집에 다시 얼씬도 말어. 난 아들 하나 잃은 셈 칠테다." 평수는 일어서서 집에서 나왔다. 그는 로타리로 나와서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거의 한 달만에 집에 온 셈인데 십 분도 채 안되어 집에서 쫓겨난 꼴이었다. 이런 일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마음이 슬프고 허전했다. "이봐요. 미남총각. 나 술 한잔 사주고 가시구려." 골목길을 정처없이 걷는데 길가 객주집에서 화장을 짙게 한 아가씨가 수작을 걸어온다. 술이나 진탕 마시고 고민을 잊어버릴까? 이런 충동이 불쑥 일어났다. 사실 이 고민을 혼자 안고 씨름하기에는 너무 괴로왔던 것이다. 하지만 효진을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신은 강해야 하고 효진을 위해서도 견뎌야 했다. 그는 어느 싸구려 영화관으로 들어가서 중국 무술 영화 한 편을 관람했다. 효진을 만날 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영화는 서로 원수가 된 두 집안의 남녀가 사랑을 하는 그런 영화였다. 두 집안은 무술의 명문으로 서로 피를 흘리며 패권을 겨룬다. 그러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고 끝에 가서 두 남녀는 그 비극을 뛰어넘어 사랑의 결실을 이룬다. 상식으로는 쉽게 납득이 안 갔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럴 듯한 결말처럼 느껴졌다. 그게 바로 중국인들의 융통성인지도 몰랐다. 한국인들은 그런 융통성은 없다. 그리고 평수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그런 한국인의 전형인 것이다. 영화를 보고 다시 로타리로 오는데 어디서 동생 평진이 불쑥 나타났다. "아이구, 난 또 형을 못 만날 줄 알았지. 엄마가 나더러 형을 찾아오라고 하셨다구. 집에서 십 분만에 나가버렸다며?" "그래. 난 집에 가고 싶지 않다. 너도 이유를 알 거야." "알고 있어. 난 그래도 형 편이야. 엄마가 무척 속상해하고 계셔. 그래도 형이 저녁 먹으러 안 오니까 나를 보낸 거야. 저녁은 먹어야지. 정말 안 갈 거야?" "그래, 저녁도 먹고 싶지 않아. 난 그냥 회사로 가려고 해. 나를 못 만났다고 말해. 넌 내 편이지?" "그렇다니까. 그럼 언제 또 올거야? 효진 씨하고 잘 되어가는 거야?" "그런 건 네가 알 거 없어. 당분간 집에 안 오는 게 좋겠다. 빨리 집에 가봐라. 또 만나자." 평진은 형의 기분이 무겁다는 걸 알고 말없이 돌아섰다. 집 쪽으로 걸어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보자 평수는 다시 마음이 우울해졌다. 그는 여덟 시가 되기 전에 비탈길의 꼭대기에 있는 공터로 올라갔다. 효진이 거기 나온다는 보장은 물론 없었다. 43. 연탄과 사과(9) 산동네 꼭대기 빈터에는 늘 그렇듯 사람이 전혀 없었다. 시원한 밤바람만 쉬지 않고 불어왔다. 그곳에서는 성안쪽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평수는 전에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이 꼭대기 빈터로 서울의 야경을 보기 위해 밤에 자주 올라오곤 했었다. 빈터에 혼자 서서 밤하늘의 별들처럼 무수히 빛을 발하고 있는 성안의 등불들을 보노라니 문득 고등학교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평수는 시계를 차고 있지만 깜깜해서 시간을 알 수 없었다. 그는 효진이 집쪽을 자꾸 쳐다봤다. 어둠 속에서 그녀가 불쑥 나타나면 얼마나 반가울까? 이런 상상을 그는 했다. 그런데 상상이 지나친건 벌써 좋지 않은 예감을 갖고 있다는 증거다. 과연 효진은 어둠 속에서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마 두 시간은 넉넉하게 빈터에서 기다렸을 것이다. 어둠 속은 여전히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을까? 밖으로 나오다가 외삼촌이란 사람에게 붙들린 것일까? 무작정 밤을 새울 수는 없었다. 평수는 비장한 마음이 들었다.좋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효진이네 집으로 가겠다. 방해를 하라면 하라지. 그는 효진이 집으로 내려갔다. 사람이 슬픔을 느끼면 없던 용기도 나오는 법이었다. 평수는 효진과 자기 처지가 슬펐고 그래서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는 효진의 집 앞까지 거침없이 다가갔다. 그런데 왠일인지 불이 켜 있지 않았다. 그는 전에 한번 했던 것처럼 효진의 불꺼진 창을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이번에는 대문 앞으로 가서 대담하게 대문을 손으로 두드렸다. 역시 반응이 없었다. 집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가족들이 이 밤에 모두 어디로 외출했단 말인가? 그는 두렵고 걱정이 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효진의 어린 동생조차 안 보일 까닭이 없었다. 그는 돌아서서 로타리로 내려왔다. 로타리에 서서 효진을 처음 만났던 나무 밑 자리를 물끄러미 보다가 그는 회사로 돌아갔다.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잠도 오지 않았다. 효진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자기는 그걸 알 수도 없다. 그는 가슴이 매일 조금씩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당장 공장을 뛰쳐나가서 효진이 다니는 은행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효진을 위해 참았다. 웬 사내가 효진의 직장까지 나타났을 때 그녀의 체면이 상할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결국 그가 효진의 직장에 가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어느날 오전 열한 시쯤 누가 공장으로 평수를 찾아왔다. 그가 수위실로 나가보니 뜻밖에도 모르는 중년부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이 파리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약해 보이는 부인이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평수는 금방 부인이 누군가를 알았다. 그러나 내색은 할 수 없었다. 그는 겁이 더럭 났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다. 부인이 평수에게 물었다. "총각이 싸전집 큰아들 맞아요?" 목소리도 표정도 싸늘했다. "그렇습니다. 웬일로?" "나 효진이 에미요. 그만하면 알겠지. 우리 효진이 어디 있소? 그것만 말해주면 난 갈거요." 평수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효진 씨가 어디로 갔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빨리 해요. 시치미 떼도 난 안 속을 거니까. 없으니까 찾지, 있으면 내가 미쳤다고 여기까지 왔겠어?" 부인은 시비조로 나왔다. "효진 씨가 저를 찾아왔다고 생각하셨군요." 평수는 침착할려고 애썼다. "효진 씨 있는 곳을 알면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저는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고 있는데요. 여기 계실 게 아니라 구내 식당에라도 가셔서 말씀하시지요." "일 없어요. 여기서 말해요." "효진 씨가 언제 나갔나요?" "닷새째 집에 안 들어와요. 은행에도 가봤는데 모른다고 하고, 총각에게 온게 틀림없어. 다른 데 갈 데가 없다구." "저를 믿어주십시오. 아니, 그보다 빨리 효진 씨를 찾는게 문젭니다. 아마 어머님께서 은행에 가셔도 소용없을 거예요. 제 생각인데 다른 친척이 없다면 은행의 친구 중 누가 효진 씨 있는 곳을 알 겁니다. 하지만 어머님 혼자 가셔야 말해줄 리 없지요. 괜찮으시다면 저랑 함께 지금 은행으로 가실까요?" 부인은 한동안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표정은 여전히 칼날 같았다. 부인은 그러나 칼날 같은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평수를 힐끗힐끗 관찰했다. 한참만에 부인이 말했다. "나는 좋지만 총각이 이 시간에 나와도 괜찮을까?" "제가 이야기를 하고 나오겠습니다." 평수는 부리나케 공장으로 돌아가 작업반장에게 사정을 말하고 허락을 받았다. 그는 택시를 잡아 부인과 함께 타고 서울로 달렸다. 택시 속에서는 부인과 평수 사이에 한마디 말도 오가지 않았다. 효진의 어머니는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흐트리지 않았다. 그녀는 평수를 마치 거리의 부랑배 보듯 했다. 은행 앞에 도착한 평수는 부인에게 말했다. "저 혼자 들어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저도 누가 친군지 모릅니다. 이곳이 처음이니까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저 다방에 가셔서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좋겠는데요." 딸을 찾을 생각 때문에 부인은 고분고분 평수의 말을 들었다. 그녀는 말없이 다방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은행으로 들어간 평수는 어리둥절했다. 여자 행원들이 열 명이나 있는데 누가 효진의 친군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다짜고짜 예금 담당 아가씨에게 가서 물었다. "효진 씨라고 아십니까?" "알죠, 오늘 안 나왔어요." "알고 있습니다. 실례지만 이 은행에서 효진 씨랑 제일 친한 분이 누군지 좀 가르쳐주시겠습니까?" 아가씨가 그를 노려봤다. "왜 그러세요? 어디서 왔죠?" "사실은 저는 효진 씨 친굽니다. 꼭 필요해서 그럽니다." "제가 제일 친해요. 이름이 뭐예요?" "김평수라고 합니다." "어머나." 아가씨가 실쭉 웃었다. 이름을 알고 있다는 눈치였다. "가만 계셔봐요." 그녀는 옆자리 동료에게 잠시 업무를 부탁하고 프론트를 떠났다. 아가씨가 밖으로 나가자고 손짓했다. 밖으로 나오자 골목 모퉁이로 평수를 끌고 갔다. "저는 박행숙인데요. 효진이가 지금 우리 집에 있어요. 은행에 휴가원을 내놓고 벌써 닷새째 쉬고 있죠. 여기 오실 생각은 어떻게 하셨죠?" 어머니가 딸을 찾는다고 말하려다가 그는 입을 닫았다. "만날 수가 없으니까 혹시 여기 오면 효진 씨 있는 곳을 알까 해서 왔습니다. 효진 씨와 전화 연락을 할 수 있을까요?" "안돼요. 누구도 효진이 허락없이 대드릴 수 없다구요. 요전에도 효진이 엄마가 오셨는데 제가 시치미를 떼로 모른다고 했죠. 제가 오늘 들어가서 효진이에게 말씀은 전할게요.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세요." "솔직히 말하지요. 사실은 어머님이 오늘 제게 오셨어요. 제가 효진 씨를 감춰놓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할 수 없이 제가 효진 씨 찾는 데 앞장을 섰지요. 또 저도 걱정이 되었구요. 어머님이 지금 저기 다방에서 기다리십니다. 전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고 할 줄도 몰라요. 효진 씨에게 가서 전하십시오. 제가 효진 씨 어머님의 신용을 얻는 데 도와달라구요." "알겠어요. 그럼 내일 제게 연락을 해주세요." 그녀와 헤어지고 평수는 다방으로 갔다. 효진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평수는 마음이 놓였다. 효진의 어머니는 그가 다방으로 들어가자, 차도 안 시키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걱정은 안 하셔됴 될 것 같습니다. 친한 친구 집에 효진 씨가 있다는군요. 저는 자세한 까닭은 모르지만 제 생각처럼 효진 씨가 누구에게도 자기 있는 곳을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나봐요. 그래도 어머님이랑 함께 왔다고 말했어요. 친구가 내일 다시 연락을 해달라는군요. 만약 어머님께서 그래도 지금 당장 효진 씨를 만나야겠다고 하신다면 제가 다시 친구에게 가보겠습니다." "참, 차를 드셔야죠. 뭘 시킬까요?" 평수가 물었다. 그런데 혼자 깊은 생각에 잠겼던 부인이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정말 너무 엉뚱한 질문이었다. "총각이 정말 우리 효진이를 그렇게 좋아하고 있어?" 44. 연탄과 사과(10) 너무 뜻밖의 일을 당하면 누구나 당황하기 마련이다. 평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놀라서 부인을 멍하니 쳐다봤다. 빨리 답변을 해야 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 그런 평수를 부인이 의심스런 눈초리로 빤히 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평수는 다급하게 대답했다. "말씀 드리기가 죄송스럽지만 정말 저는 효진 씨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효진 씨 어머님을 괴롭혀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일 효진 씨와 통화할 수 있다면 집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하겠습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부인의 얼음장 같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부인이 다시 말했다. "총각은 부모네들하고는 많이 다르군. 총각 부모들 때문에 내가 지금 얼마나 고통당하고 있는 줄 모를거야. 그 양반들은 자기 욕심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라구." "저도 대강은 알고 있어요." 자기 부모를 비난하니까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화를 낼 입장은 아니었다. "저희 부모님들도 본래 그렇게 나쁜 분들은 아니에요. 서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게 괴롭습니다. 오해를 만약 풀 수만 있다면 저는 무슨 짓이라도 하고 싶어요."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흥." 부인의 표정에 다시 얼음장이 덮였다. "남의 가게를 통째 삼킬려고 하는데 나쁜 사람이 아니라니 기가 막혀. 하긴 총각이 효자라고 소문났으니까 그렇게 말할 만도 하겠군."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해가지고 또 부인의 기분을 상하게 했군. 평수는 자기의 고지식한 성격이 원망스러웠다. "저도 지금은 부모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가게 문제에 관해서는 부모님 처사를 저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자식 입장에서는 대들 수도 없고 정말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해해주십시오." "총각더러 나쁘다는 말이 아니니 걱정 말아요. 이유야 뭐든 오늘 나 때문에 수고해줘서 고마워요. 그놈의 계집애가 무사하다는 걸 알았으니 이젠 들어오든말든 난 상관 않을거요." 부인은 차도 안 마시고 그만 일어섰다. 함께 일어서며 평수가 말했다. "내일 제가 꼭 설득해보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은행 앞에서 평수는 부인과 헤어졌다. 헤어지고 나서 이마를 만져보니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말 한바탕 시험을 치르고 난 기분이었다. 그는 버스를 타고 회사로 돌아갔다. 다음날 평수는 회사에서 은행으로 전화를 걸었다. 박행숙이란 아가씨는 이제 구면이라는 듯 무척 친절하게 응대를 해주었다. "마침 한가한 때 전화를 해주셨어요. 그렇지만 제게 고맙다고 하셔야 돼요. 한사코 혼자 당분간 숨어 있겠다고 하는 걸 제가 설득하느라고 애먹었어요. 전화번호를 가르쳐드릴테니 잘해보세요." 그리고 그녀는 번호를 가르쳐주었다. 그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곧 효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로 상대방을 확인만 하고 한동안 침묵이 흘러갔다. 평수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머님께서 공장까지 오시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은행엘 갔었죠. 미안해요." "그건 제가 할 말이에요. 미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 걸요. 그날 못 나가서 미안하고 어머니까지 평수 씨를 괴롭혀서 미안하고. 하지만 집에 더 있을 수가 없었어요. 마치 불량소녀 취급당하는게 죽기보다 싫었던 거에요. 제 어머니가 태도를 바꾸기 전엔 안 들어갈 작정을 하고 나왔어요." "만나서 얘기했으면 좋겠어요. 그보다는 우선 효진 씨가 집에 가는 게 나를 돕는 것 같습니다. 난 어머님께 약속해버렸거든요. 효진 씨를 꼭 들어가게 하겠다구요." "어머나, 자기 맘대로 그런 약속을 할 수 있는 거예요?" "난, 난 어머님께 잘 보일려고 그랬어요. 제발 나를 도와줘요." "내가 돌아가면 점수를 딸 것 같았어요? 어제 어찌되었어요? 싸우지는 않았나요? 워낙 엄마 성격이 날카로와서 난 싸울까봐 걱정했어요." "정말 무섭던데요. 진땀 뺐지요. 그런데 나더러 어머님이 그런 말을 물으셨어요. 정말 효진 씨를 좋아하느냐고. 난 그런 질문 하실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어요." "어머나, 평수 씨를 아주 잘 봤군요. 엄마 성격에 그런 말을 했다면 잘 본게 틀림없어요. 그게 사실이면 맘이 달라지는데요. 그래 뭐라고 하셨죠." "그걸 꼭 다시 말해야 하나요? 그러지 말고 오늘 꼭 들어가세요. 그리고 내일부터 직장에도 나가세요. 그래야 내가 체면도 서고 다음에 할말이 있지요." "좋아요. 이번엔 평수 씨 지시를 따를게요. 내일 직장에도 나가구요." 평수는 마치 그걸로 모든 게 해결된 듯 뛸듯이 기뻤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이 텅 비었다. 우리는 언제 만나지? 만나도 좋다는 허락은 받지 못한 것이다. 부인을 만났기 때문에 왠지 부인의 허락 없이 효진을 만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한동안 수화기를 붙들고 잠자코 있었다. 효진이 눈치를 채고 말했다. "집에 가서 형편을 살피겠어요. 그런 뒤 우리 만나요." 그래. 자꾸 만나기만 하면 뭘 하나? 그런 충동쯤 참는 게 어른이지. 우선 상황을 바꾸는 게 중요한 걸. 그는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평수는 이제 효진의 연락을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집에 가서 형편을 살핀 뒤에 만나자는 말은 자기 쪽에서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이었다. 평수는 일할 때나 잠자리에 들었을 때나 과연 효진의 어머니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하고 그 문제만 생각했다. 요즈음 일손이 잡히지 않고 집중력도 떨어져서 작업반장에게 몇 차례나 주의를 받기도 했다. 그는 그날 부인의 태도로 보거나 그리고 효진이 바로 다음날 귀가한 걸로 보거나 사태를 비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는 기분이 나를 듯 유쾌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모든 낙관적인 생각이 모두 착각이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자기는 부인의 성격을 조금도 모르지 않는가? 자기에게 부드럽게 말 한마디 했다고 부인이 자기를 좋게 보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더구나 가장 소중한 외동딸의 상대로까지 인정해준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는 전혀 자신이 없었다. 효진에게서는 일 주일째 연락도 오지 않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이 경우는 그게 아니었다. 그는 초조하고 우울하고 괴로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참다못해 어느날 작업시간 중에 말도 없이 회사를 빠져나왔다. 문책당할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는 효진이 퇴근 전에 은행으로 달려갔다. 은행에는 가고 싶지 않았으나 그녀 얼굴 구경이라도 하고 그 뒷소식을 알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었다. 만약 또 전화라도 한다면 고작해야 목소리밖에 더 듣겠는가? 생각해보면 거의 두 달 동안 효진의 얼굴 구경을 못하고 지낸 꼴이었다. 아무리 인내심이 많은 사람도 그건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런 고통이 과연 값어치 있는 고통인가도 의문이었다. 지금은 사람이 달나라를 가는 시대 아닌가? 은행 앞에 도착한 평수는 가슴이 몹시 떨렸다. 그는 두려웠다. 효진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는 것이다. 그는 한참 은행 문 밖에 서 있다가 용기를 내어 은행 안으로 들어갔다. 저쪽 자리에 효진이 감색 제복을 입고 앉아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제복 입은 효진은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는 효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금방 그의 출현을 알았다. 그리고 애써 놀라지 않은 척하면서 마치 사무적인 대화를 하듯 말했다. "곧 일과가 끝나요. 옷 갈아 입고 나갈게요." 그 말뿐 그녀는 다시 서류쪽으로 눈길을 돌려버렸다. 평수는 밖으로 나와서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우두커니 보고 서 있었다. 얼마동안 그렇게 서 있었을까. 효진이 뒤로 와서 말했다. "미안해요. 하루 결산하던 중이라 나올 수가 없었어요." 평수는 돌아서서 오랜만에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효진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마주 쳐다봤다. 그동안 그녀가 더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보고 싶어 달려왔어. 연락이 없으니까 불안하기도 하고." "걸으면서 얘기해요." 효진은 별로 유쾌한 얼굴이 아니었다. 둘은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만나는 건 쉬운데 우리는 바보 같죠?" 효진이 밝은 표정을 꾸미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평수는 자기가 바보란 생각이 들었다. 효진도 바보지만 자기는 더 지독한 바보였다. 45. 연탄과 사과(11) 왜냐하면 스스로 효진을 찾아올 생각을 여태 한번도 못했던 것이다. 우리가 바보라고 말하는 효진의 말 속에 자기의 소극적 성격을 은근히 탓하는 뜻이 들어 있다고 평수는 생각했다. 평수는 마음이 급했다. 빨리 어느 다방으로라도 들어가서 그동안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무엇보다 효진이 집으로 돌아간 뒤 그녀의 어머니가 어떻게 나왔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효진의 어머니만 마음을 바꿀 수 있다면 자기 쪽은 평수는 자신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아버지가 시장바닥에서 소문난 고집불통이라고 해도 그는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아버지가 자기를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효진은 별 말이 없이 묵묵히 걷기만 했다. "배고프지 않아? 우리 어디 가서 뭘 좀 먹을까?" "난 괜찮아요. 평수 씬 어때요?" "나도 괜찮아. 이따 뭘 먹지. 그럼 어디 가서 차나 마실까?" "돈 없는데 괜히 차만 마실 것 없잖아요? 난 우리 둘이 이렇게 길을 걷는 게 제일 좋아요. 남의 눈치 안 보고." "정말 이건 처음이야. 우린 숨어서 살아왔어. 죄인처럼." "그래요. 죄인처럼 서로 만나는 것조차 겁을 냈어요. 모두 부모님들 때문이죠 뭐." 마침 길가의 공원이 눈에 띄었다. 둘은 공원으로 들어가서 빈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잠시 또 말이 없었다. 효진은 애써 쾌활한 척했으나 평수는 벌써 예감이 좋지 않았다. 둘에게 기쁜 일이 있다면 효진은 만나자마자, 벌써 말을 했을 것이다. 십 분이나 지난 뒤에 효진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정말 그날 평수 씨에게 감동을 받았나봐요. 어머니 성격에 그렇게 누굴 빨리 인정하긴 힘든데 아무튼 어머니는 평수 씨만은 아주 좋게 생각하고 있어요." "어머님이 무슨 다른 말씀은 안하셨어?" "어머니는 가게를 포기하셨어요. 그게 누구 때문인지 아시죠?" "뭐라구? 정말이요? 그게." "집 주인에게 벌써 통고도 했는 걸요. 어머니는 고민하시다가 우리 둘을 위해 당신께서 양보하기로 한 거에요. 나도 거기까진 상상도 못했어요. 그런데 결과가 좋지 않아요." "결과가 뭔데?" "평수 씨 부모님들이 이쪽 생각을 순수하게 안 받아들이는거죠. 전 챙피해서 죽겠어요. 우린 어차피 가게도 내놓았으니 이사를 가겠지만 당분간 챙피해서 고개를 못 들고 다니겠어요. 우리 엄마가 싸전집과 사돈이 될려고 가게까지 내놓았단 소문이 시장에 쫙 깔렸대요. 그리고 싸전집에서는 사과장수 딸년에게 아들은 죽어도 못준다고 선언했대요. 그 소문도 시장에 쫙 퍼졌대요. 어머니와 딸이 함께 망신당한 거라구요. 난 엄마가 불쌍하고 엄마에게 미안하고 분해서 죽겠어요. 평수 씨를 원망하진 않겠어요." 너무 엄청난 사실에 평수는 할 말이 없었다. 자기 부모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이미 어머니는 평수 앞에서 그런 말을 했던 일도 있다. 효진이 사과장수 딸이라면 자긴 뭔가? 싸전집 자식 아닌가? 연탄장수 아들이 사과장수 딸보다 지체가 높다는 무슨 법이라도 있다는 것일까? 왜 어른들은 자기 자신을 과대포장하고 남을 업신여길까? 효진은 사과장수 딸이지만 어느 부잣집 딸보다 더 조신하고 품위있는 아가씨다. 효진에 비하면 평수는 자기가 부족하다는 걸 느낀다. 한참 말을 못하던 평수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그건 어찌보면 내 책임이야. 그렇지만 우리 부모님은 내가 설득할 자신이 있어. 오늘 저녁 당장 가서 만날 거야. 만약 부모님이 그런 말을 했다면 효진이 어머님께 사과라하고 말하겠어. 틀림없이 그렇게 할 거야." "그럴 필요는 없어요. 우린 그 동네를 떠나는데 이젠 서로 미워하고 욕할 건덕지도 없는 거죠. 안 그래요?" "효진은 그럼 나를 다시 안 만날 거야?" 평수가 놀라서 효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평수는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효진이 침착한 어조로 타이르듯 말했다. "평수 씨는 부모님을 설득하지 못해요. 그걸 바랐지만 안될 일은 빨리 단념하는 게 피차 편하지요. 평수 씨도 마음을 크고 넓게 가지세요. 그러지 못하는 게 평수 씨 단점이에요. 세상에는 좋은 아가씨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우린 며칠 뒤 그 동네를 떠나는 거예요. 그걸로 평수 씨와도 작별한다고 나는 작정했어요. 질질 끌어봤자, 득될 게 뭐가 있어요." "그게 효진이 진심인가?" "나도 이렇게 말하지만 괴롭긴 평수 씨보다 더하다구요. 평수 씨 혼자만 괴롭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건 그래. 나도 할 말은 없어. 더구나 효진이 어머님께는 너무 죄송하다구.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야. 일이 이렇게 꼬인 것도 따지고 보면 내가 못났기 때문이야. 하지만 한번만 나를 믿어봐. 오늘 가서 부모님과 담판을 할 테야. 아직 단념은 너무 빨라. 효진이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듣고 있어요." 슬픈 얼굴로 효진이 대답했다. "내일 나하고 어디서 만나. 내가 집으로 가도 되나?" "안돼요. 외삼촌이 와서 계시고 어머니도 지금 누굴 만날 기분은 아니에요." "외삼촌이 거기 와서 있나? 지금도 효진을 지키고 있는 거야?" 평수는 자기도 모르게 흥분이 되어 말투가 거칠어졌다. 그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외삼촌 얘기는 하실 것 없어요." 효진은 외삼촌 말을 꺼낸 걸 후회했다. 왜냐하면 봉제회사 경리로 있는 외삼촌은 자기 회사의 착실하고 유망한 직원 한 사람과 효진을 맺어주기 위해 퇴근만 하면 뻔질나게 효진의 집으로 달려오곤 했던 것이다. 그 청년은 조건도 좋았다. 효진의 어머니는 데릴 사위를 적극 권했다. 그 청년은 양친이 없어서 데릴 사위로 안성맞춤이라는 것이다. 사실은 이 얘기가 오래 전에 등장했었다. 다만 효진이 외삼촌의 말을 한 귀로 흘려버리곤 했던 것이다. 가게를 내놓고 싸전집에서 모욕까지 당한 뒤 어머니도 슬슬 그쪽에 관심을 보이는 눈치였다. 자기 때문에 가게까지 포기한 어머니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너무 커서 효진도 얼떨결에 그 청년을 만나보겠다고 외삼촌에게 말해버렸다. 그게 바로 어제 일이고 내일이 만나는 날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차마 평수에게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앉아 있는 것도 시간 낭비야. 난 빨리 가서 부모님을 만나야겠어." 평수가 견딜 수 없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효진이 말했다. "이젠 배고픈데 저녁 안 사주실래요?" "미안해. 다음에 살게. 오늘은 뭘 먹고 싶은 생각도 없어졌다구." 할 수 없이 효진도 일어섰다. 그녀는 배고픔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만남을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밥을 사달라고 했을 뿐이었다. 로터리에 도착한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곳에 포플러 나무가 잎새를 모두 떨구고 외롭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평수가 효진에게 말했다. "내일 오후 다섯 시에 저기 빵집에서 만나자구. 나올거지?" 효진은 평수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표정은 시원치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바로 그 시간이 그 청년을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내일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평수는 먼저 비탈길을 성급하게 올라갔다. 혼자 남은 효진은 그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슬픈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물론 내일 빵집에 나올 생각이 없었다. 약속도 있지만 다시 평수를 만나는 건 부질없이 서로를 학대하는 짓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한동안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효진은 문득 핸드백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눈에 고인 눈물을 훔쳐냈다. 그런 뒤 그녀는 힘없는 걸음으로 방금 평수가 올라간 비탈길을 올라갔다. 평수가 집에 들어갔을 때 집에는 평진이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형을 보자, 아우는 대뜸 가게 이야기부터 꺼냈다. "형, 우리 가게 확장한 것 모르지?" "뭐야, 언제 확장했어?" "지금 엄마랑 아빠랑 가게 수리 공사에 매달리고 있어. 과일가게까지 트느라고 목수를 불러다 일을 시키고 있는 걸. 끝날려면 이틀은 있어야 될 걸." "그래서 어머니도 거기 계시냐?" "응, 그런데 형은 기쁘지 않나 보지?" "시끄러. 난 벌써 알고 있었다. 난 지금 가게로 가봐야겠어." 그러자 평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형에게 말했다. "가는 건 좋지만 그 여자 얘긴 안 꺼내는 게 좋을 거야. 아빠는 지금 그 일로 잔뜩 화가 나 있다구." 46. 연탄과 사과(12) "가게를 양보했는데 아직도 과일가게 아주머니를 미워해?" "형이 그 집 딸을 좋아하니까 그렇지. 아버지는 그 얘길 듣고 노발대발하셨다구. 아마 형이 당분간 안 나타나는 게 좋을 거야. 아버지가 그 여자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형도 잘 알지 않아?" "지금은 사정이 달라. 넌 잔말 말고 가만 있어라." 평진의 말을 듣고 평수는 온몸의 힘이 쑥 빠졌다. 그러나 그 정도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집을 나와 시장으로 내려갔다. 사과가게는 정말 없어졌고 목수가 싸전과 사과가게 사이의 벽을 헐고 있었다. 공사는 아직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어머니는 싸전의 자리를 지키고 있고 아버지는 목수 옆에 서서 일을 독려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효진이네가 바로 이웃가게였을까? 그리고 하필이면 바로 이웃가게의 딸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헐리고 있는 벽을 보면서 평수는 한탄을 했다. 어머니는 평수가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네가 갑자기 웬일이니? 평생 집에 안 올 것 같더니." "말씀 드릴 일이 있어서 왔어요. 가게가 커졌군요." "그래, 사필귀정이지. 그 여편네가 버티다 버티다 안되니까 해괴망측한 구실을 내놓고 나간거야. 우린 잘 됐지 뭐. 안 그러냐?" "해괴망측한 구실이라니요. 그게 뭔데요?" "뭐긴 뭐겠냐? 너를 사위 삼겠다는 거지. 흥, 뻔뻔한 년. 제 주제를 알아야지." 평수는 어이가 없었다. 어머니를 상대로 무슨 말을 꺼낸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그는 깨달았다. "어머니, 이젠 가게도 찾았는데 그 집 사람들 미워할 것 없지 않아요?" "누가 미워한다던? 나도 바쁜 사람이야. 사돈을 맺자고 뻔뻔하게 나오니까 하는 소리 아니냐?" "제가 그 집 딸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어요. 어머닌 그 딸을 전혀 모르시잖아요." "그 에미 보면 그게 그거지 뭘. 끝난 얘길 얘가 왜 또 꺼내지?" 그때 아버지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평수는 꾸벅 절을 했는데 아버지는 대꾸도 않고 화난 얼굴로 아들을 노려봤다. "못난 자식. 남의 집 장남이 되었으면 느끼는 게 있어야지." 아버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평수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뭐냐? 이제 다 컸다고 독립하겠다 이말이냐? 네 멋대로 살겠다 이말이냐." 처음부터 아버지는 배타적으로 나왔다. "아버지 왜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세요? 왜 남은 다 나쁘다고 생각하십니까?" "뭐야? 나를 훈계하는 거냐?" 그 순간 평수의 오른쪽 뺨이 벼락을 맞았다. 아버지가 아들의 뺨을 갈긴 것이다. "나쁜 자식. 얻다 대고 훈계야. 훈계가. 그따위 시장바닥에서 굴러먹은 계집애를 누구더러 며느리를 삼으라는 거야. 그따위 소리 지껄이려거든 네 회사로 돌아가서 꼼짝말고 있어. 네 꼴 보기도 싫으니." "저도 시장바닥에서 자랐어요. 아버지는 자기 얼굴에 침 뱉지 마세요. 저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그애와 결혼하겠어요. 저는 성인이고 그럴 권리도 있으니까요." "절대로 안돼. 내가 안된다면 안되는 줄 알라구." "저는 그럴 권리가 있어요. 이제 부모의 허락 따위는 필요 없어요." 평수는 가게를 나와버렸다. 처음부터 부모를 설득할 자신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 결과는 너무 참담했다. 효진을 만나서 뭐라고 해야 하나? 평수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는 정처없이 길을 걸었다. 옛날 고등학교 다닐 때 혼자 자주 걷곤 하던 한강으로 나가는 길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죽음이란 말을 생각했다. 그밖에는 다른 길이 안 보였던 것이다. 한강 근처의 언덕 위에서 그는 자정이 넘을 때까지 혼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근처의 싸구려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동안 그는 여러가지를 골똘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두 가지의 결론을 얻어냈다. 이제 효진과 둘이서 독자적으로 장래를 결정하는 길이 있었다. 그게 평수가 가장 원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부모의 동의를 받아내지 못한 지금 효진이 과연 자기를 따를지는 의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나? 그 뒤의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되면 자기는 한강변의 이 언덕으로 다시 돌아와 스스로 죽음을 택해야겠다고 평수는 마음속으로 작정했다. 한강변의 여관에서 밤을 보낸 평수는 다음날 오후 다섯 시에 그 빵집으로 나갔다. 그러나 효진은 삼십 분이 지나도록 그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마음이 절박해진 평수는 비탈길을 올라가 효진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 집에도 효진은 없었다. 효진의 어머니도 보이지 않았고 꼬마 남동생만 집을 지키고 있었다. 이미 평수는 겁낼 것이 없었다. 그는 마당으로 들어가서 꼬마에게 물었다. "누나 어디 갔지?" 꼬마가 처음엔 좀처럼 입을 열려고 하지 않다가 평수가 친절한 얼굴로 자꾸 재촉하자,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누나는 금강 호텔에 약속이 있어서 나갔어요." "엄마도 함께 가셨니?" "아뇨. 외삼촌이랑 나갔어요." "엄마는 어디 계시니?" "몰라요." 꼬마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평수는 그 집에서 나왔다. 로터리로 내려와 그는 택시를 잡아 타고 금강 호텔로 달렸다. 그녀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를 만날 때까지 그는 달려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금강 호텔은 시내 복판에 있었다. 그는 택시에서 내려 일층 로비로 들어갔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송곳처럼 가슴을 찔렀다. 효진이 누구를 만나기 위해 여기 와 있든 그는 그런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로비를 지나 커피숍으로 들어가서 효진을 찾았다. 실내는 무척 넓었다. 그러나 평수는 금방 효진을 찾아냈다. 저쪽 창가 좌석에서 효진은 웬 남자와 마주 앉아서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남자는 곤색 양복을 말쑥하게 입고 있었고 나이는 자기 또래 같았다. 그 남자가 외삼촌인지 누군지 평수는 알 턱이 없었다. 그는 다짜고짜 효진의 좌석으로 다가갔다. 평수가 나타나자 효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웬일이세요? 여길 오시고." 효진이 기어드는 소리로 물었다. 곤색 양복 입은 남자가 평수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미안합니다." 평수는 먼저 그 남자에게 인사를 차리고 효진에게 말했다. "할 얘기가 있소.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다 오지 않으니까 찾아온 거요. 저기 밖에서 기다리겠소." 그 말을 남기고 평수는 로비로 다시 나왔다. 곧 뒤따라 효진이 로비로 나왔다. 평수는 화가 났지만 꾸욱 참았다. "미안해요. 오늘 이쪽에도 약속이 있었어요. 먼저 한 약속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효진이 울상을 하고 변명을 했다. "저 사람 누구요?" 효진이 말을 못했다. "누구건 내가 알 바 아니지. 자, 나랑 나갑시다." 평수는 다짜고짜 효진의 팔을 붙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저 분에게 말을 하고 나와야지. 그냥 가면 어떡해요? 이 팔 좀 놓으세요." 효진이 사정을 했지만 평수는 막무가내로 택시 속에 효진을 끌어넣었다. 택시가 움직이자. 효진은 체념한 듯 잠자코 있었다. 차가 번잡한 시내를 벗어날 때까지 평수도 입을 열지 않았다. 택시는 평수의 요구에 따라 남쪽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한참만에 효진이 물었다. "나도 모르는 곳이야. 나는 지구 끝까지라도 가고 싶어." "할 얘기란 뭐예요." "그 얘긴 우리 둘만 남을 때 하겠어."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효진이 다시 말했다. "난 평수 씨가 할 얘길 다 알고 있어요. 부모님을 만나 실패하신 거죠? 그렇죠?" "응, 실패했어. 그렇지만 이젠 허락 따위는 필요 없다구. 효진 씨만 나를 따라준다면 내 생각대로 결혼할 거야. 우린 성인이니까. 아니, 따라주지 않아도 좋아. 그렇게 되면 나 혼자 떠나버리겠어." "어디로요?" "지옥으로 가는 거지 뭐. 어젯밤 모든 결정을 내렸다구." "지금 그래서 나랑 같이 지옥엘 가는 거예요?" "지옥이 될지 천국이 될지 그건 효진에게 달렸지. 그렇지만 지옥이 되더라도 혼자 갈거니까 안심하라구." "나도 함께 가겠어요. 하지만 지옥은 싫고 기왕이면 천국으로 가고 싶은 걸요. 난 평수 씨가 더 일찍 이런 용기를 갖기를 기다렸던 거예요." 차는 어둠 속을 계속 달리고 있었다. 47. 결혼 작전(1) 번갯불에 콩궈 먹는다는 말이 이 경우에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더구나 인간대사라는 결혼 문제를 보름 안으로 결판내야 한다는 것이니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보름 안에 신부를 골라내고 결혼식은 못하더라도 약혼이라도 해야 한다. 정철이 미국서 건너올 때 다짐한 생각이었다. 혼자하는 결혼도 아닌데 남이 들으면 미쳤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정철의 입장에서는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그는 학기 중이었고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서는 잠시도 대학의 캠퍼스를 떠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고국에 계신 어머님의 성화만 아니었다면 정철은 결혼 문제 같은 건 잊어먹고 지냈을 것이다.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책벌레 노릇을 해도 앞으로 학위 받을 때까지는 이 년은 더 참아야 한다. 그에겐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이 년 뒤면 서른셋이다. 서른셋이 지나면 박사 아니라 박사 형님을 따도 한국에 가서 자리 얻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 김 여사 역시 그런 사정쯤 잘 알고 있다. 교수 부인인데 그런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김 여사는 하나뿐인 아들이 혼기를 놓치는 일이 박사 학위 놓치는 일보다 더 안타깝게 여겨졌다. 학위야 몇 달 늦어진다고 아주 못 따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김 여사는 거액의 통화료를 물어가며 아들에게 성화를 부렸다. "이 녀석아, 네 나이도 잊었어? 서른하나야. 남자 나이 상관없는 건 옛말이다. 지금은 처녀들이 서른 넘은 남자는 쳐다도 안봐. 박사 아니라 박사 형님이 와도 쳐다도 안 본다구. 고모랑 이모랑 나랑 네 결혼 때문에 지금 총동원된 거 아니? 아가씨는 셋이나 맞춰놨다. 모두 놓치기 아까운 애들이야. 넌 비행기 타고 훌쩍 건너와서 점만 찍으렴 돼. 뭐가 걱정이냐? 점만 찍어놓고 가면 된다는데." 이쯤 되면 왕자가 따로 없는 셈이다. 그러나 정철은 아리따운 신부감보다 박사 학위 생각밖에 없었다. 자나 깨나 경영학 박사 학위 따는 꿈만 꾸었다. 어머니에게 졸리다 못해 정철은 하는 수없이 백기를 들었다. "좋아요. 그럼 보름 동안에 결판을 내고 오겠어요. 더 이상은 시간이 없다구요. 보름 동안 결판이 안 나면 그땐 그냥 올 테니 그런 줄 아셔야 합니다." "알았다. 이 녀석아. 그쯤이면 시간은 충분해. 건너오기만 해다오." 정철은 드디어 왕비 아닌 신부를 간택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왔다. 경험이 없는 정철은 세 사람 신부감이 나란히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고국에 도착하자마자, 차례대로 그의 앞에 모습을 보여줄 걸로 생각하고 있었다. 마치 미스 코리아 후보들이 심사위원 앞을 차례로 통과하듯 말이다. 하긴 십 년쯤 전이라면 그럴 법도 했다. 미국 유학생, 혹은 예비 박사라고 하면 신부감들이 넋을 차리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박살ㄹ 따 가지고 대망의 금의환향을 한 사내들이 일자리를 못 구해 장기간 룸펜 생활을 하고 있는 광경을 도처에 보고 듣고 있으니 이젠 사정이 아주 달라진 것이다. 박사님 전성시대가 지나버린 것이다. 공부밖에 모르고 국내 사정에 어두운 정철이 그런 내막까지 속속들이 알 까닭이 없다. 그는 아리따운 신부감들이 줄줄이 그의 귀국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줄만 알았다. 하긴 김 여사도 그런 식으로 과장까지 하면서 아들을 불러들였으니 정철이 그렇게 믿는 것도 큰 잘못은 아니었다. 과연 시작부터 문제가 생겼다. 맨처음 수유리 고모가 소개하는 아가씨를 만나기로 했는데 그녀가 직장 여성이기 때문에 시간 약속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아가씨는 미대 응미과를 나온 스물다섯의 재원인데 광고회사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하고 있었다. 집안도 은행가 집안이고 아가씨 성격도 활달하다고 고모는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해댔다. 그런데 정철이 도착한 날은 금요일이었다. 김 여사는 바로 다음날 그녀를 만나도록 해달라고 수유리 고모에게 전화했다. 여자쪽과 연락을 취해본 고모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토요일 오후엔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는군. 선약이라 취소가 안된다는 거야." 고모 말을 들은 김 여사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따 고모도 답답하긴. 일요일이면 어때서 그래요. 요즘 애들 자기 일정 양보 안 할려고 하는 것 알지 않우? 우리 정철인 일요일도 상관없으니 일요일에 만나자고 그래봐요." "내가 벌써 그 말도 했다니까. 정말 중신쟁이 한번 서기 힘드네. 그애가 뭐라고 한줄 알어? 직장 다니는 사람이 일요일엔 쉬어야 한다는 거야. 집에서 쉬어야 하기 때문에 나올 수 없다지 뭐야." "그 아가씨 결혼할 맘은 있는 거유? 우리 정철이에게 관심은 있느냐 이거요?" "그야 생각 있으니까 정철이가 오면 빨리 연락해달라구 지 엄마가 내게 신신 당부했겠지. 요즘 애들 다 그렇다니까. 하는 수 없이 월요일 오후에 시간을 잡았다구. 퇴근하고 근처에서 만나겠대. 아가씨는 참한 애니까 그런 줄 알고 정철이를 그 시간에 맞춰 내보내. 나도 나갈 테니." "엄마, 관두지 그래. 다른 여자 또 있다면서? 시간 없는데 며칠씩 기다려야 하나?" 전화를 듣고 있던 아들이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김 여사는 정색하고 아들을 타일렀다. "얘, 나도 생각이 다 있어서 그런다. 고모가 누구냐? 여학교 교감까지 지낸 사람 아니냐. 고모가 추천하는 애가 그래도 네게 제일 맞을 것 같아서 우선 그쪽 먼저 보는 게 순서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급하다고 시장에서 소 한마리 사오는 것하고는 다르지 않냐. 좌우간 너는 아무 소리 말고 월요일 오후에 그 장소로 나가야 해. 인연이란 정말 모르는 거란다." 정철도 친구와의 약속과 일요일의 휴식을 고집하는 그 아가씨에게 흥미가 없지는 않았다. 어지간히 자기 주장이 강한 여성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그 아가씨 덕에 모처럼 이틀간 푹 쉬었다. 목욕도 하고 이발도 말끔하게 했다. 그리고 드디어 월요일 오후가 되어 김 여사랑 함께 차를 타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48. 결혼 작전(2) 약속 장소는 퇴계로에 있는 작은 호텔 레스토랑이었다. 아마 그 부근에 그 아가씨의 직장이 있는 모양이었다. 정철이 김 여사랑 호텔 레스토랑으로 들어가자, 구석에 혼자 앉아 있던 수유리 고모가 반색하며 달려왔다. 칠순이 낼 모레인 고모는 특별한 건강비결이라도 있는지 아직도 건강하고 피부가 팽팽했다. 정철은 오랜만에 뵙게 된 고모님께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나저나 처녀는 꽤 늦나 보네. 벌써 십 분이나 넘었는데." 자리에 앉자, 깐깐한 김 여사가 은근히 불평을 했다. 그러자 중신쟁이 고모가 서둘러 여자 쪽을 두둔했다. "미장원도 들르고 화장도 고치고 할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 뭘. 여자야 사내하고 같은가." 그 말이 막 떨어지자마자, 입구에서 키가 늘씬한 아가씨가 허둥지둥 들어왔다. 그녀는 금방 고모를 알아보고 활달한 표정으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체격도 좋지만 얼굴 윤곽도 아주 선명하고 시원했다. 우물쭈물하는 성격이 아닌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민정인 혼자 나왔어?" 고모가 아가씨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나오신다고 하는 걸 관두시라고 했어요. 제가 뭐 어린앤가요." 민정이 고모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 말은 맞는 말이라고 정철은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어머니랑 고모랑 줄래줄래 모시고 나온 자신이 어린애가 된 꼴이어서 정철은 조금 챙피했다. 대충 인사를 교환했는데 깐깐한 김 여사가 참지 못하고 잇달아 여러가지 질문을 했다. 부모님 연세는 몇이며 형제는 몇이냐는 둥 당장 결혼식을 올린다면 그럴 형편은 되느냐는 둥 옆에서 듣기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문을 잇달아 던졌다. 보다 못한 고모가 시계를 보더니 김 여사에게 눈짓을 하며 말했다. "우리들은 빨리 사라지는 게 요즘 예의라오. 애들에게 얘기할 시간을 많이 줘야 하지 않수?" 김 여사는 아직 묻고 싶은 게 더 많은 표정이었지만 하는 수 없이 고모를 따라 일어섰다. 어른들이 나가자. 그제서야 정철은 민정이란 아가씨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정철은 민정이 마음에 들었다. 시원한 성격도 그렇고 선이 뚜렷한 얼굴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고보니 자기는 바로 이런 여자를 신부감으로 꿈꿔 왔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자기 얼굴은 선이 분명하지 않고 전형적인 동양인 얼굴이다. 못생겼단 말을 듣지는 않았지만 미남이란 소리 역시 한번도 듣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성격도 다소 우물쭈물하는 편이었다. 남자는 자기와 다른 타입의 여자를 좋아한다던가. 아무튼 민정이란 아가씨는 용모도 성격도 자기와는 아주 다른 타입이었고 그래서 첫눈에 호감이 갔다. 정철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민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무 갑작스레 이루어진 일이라 전 그쪽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요. 지금 학위 공부를 하신다면서요?" "미주리 대학에서 경영학을 하고 있어요. 여기서 대학을 마치고 갔기 때문에 너무 늦은 편이죠. 머리도 신통치 못하고. 그래서 시간이 많이 걸려요." "어머나! 여기서 대학 다니셨다면 왜 그때 우린 만나지 못했을까요? 그랬더라면 더 좋았을 걸. 안 그래요?" 민정의 말에 정철은 얼굴을 붉혔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이 안 갔던 것이다. 정철은 지금까지 여자친구랑 사귄 경험이 없다. 그래서 이성과 대화하는데 익숙하지 못했다. 민정이 또 물었다. "학위 받아 갖고 귀국하시면 대학 교수 하시겠네요?" "계획은 그렇지만 잘 될지 모르겠어요. 그런 직업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철이 처음 물은 말이었다. "그야 교수님은 요즘 주가가 최고지요. 안정감 있고 존경받구요. 저도 그런 직업 좋아해요. 그렇지만 자기 학문 말고 취미생활 같은 건 따로 있어야 할 것 같아요. 학문만 한다면 너무 따분하지 않겠어요?" "그야 그렇죠. 저는 고전음악 감상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그쪽은 어떤 취미?" "어머나 저랑 같아요. 전 본래 팝송을 좋아했댔는데 나이들면서 고전음악 쪽이 역시 좋아지던데요. 취미가 같다는 건 아주 중요하죠? 그렇죠?" 정철은 머리를 크게 끄덕였다.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린다고 정철은 생각했다. 이 아가씨도 일단 자기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취미 얘기까지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민정이 무슨 생각을 하다가 불쑥 물었다. "참 언제 미국 가세요? 여기서 얼마나 계시죠?" 이 질문을 받는 순간 정철은 당혹감을 느꼈다. 이 아가씨는 왜 이런 질문을 벌써부터 던지는 걸까? "저는 여기 머물 시간이 열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학위 공부때문에 아쉽지만 곧 돌아가야 하거든요." 정철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 말을 할 때 몹시 괴로왔다. 아니나 다를까, 아가씨의 표정이 금방 싸늘해졌다. 민정이 말했다. "그럼 우린 오늘 만나고 어차피 헤어져야겠네요. 그쪽에 시간이 없으니까." "아닙니다. 앞으로 열흘은 있지 않습니까? 저는 매일 만날 수도 있어요." 정철이 당황해서 말했다. 민정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는 평소 일 년은 사귀어야 서로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열흘은 너무 짧아요. 그렇다고 우리 중의 누가 매일 바다를 건너다닐 수도 없지 않겠어요?" "그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 집에서는 열흘 정도 사귀고 약혼이라도 하라는데 저는 그게 무리인 줄 알면서도 어머니 성화 때문에 할 수 없이 나온겁니다." "무리도 이만저만 무리가 아니죠. 사람이 무슨 짐승도 아니고. 더구나 요즘이 어느 땐데요." 49. 결혼 작전(3) 잠실 롯데 호텔에서 있었던 일을 아들로부터 보고 받은 김 여사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 왕복 비행기 값까지 투자해가며 벼르고 별렀던 아들 결혼이 점점 가망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김 여사는 한참 궁리하더니 정철에게 말했다. "이제 딱 한 곳, 내가 봐둔 여자만 남았다. 사람 일은 모른다. 연분이 어디서 나타날지. 그러니 한번만 더 수고해다오." "저더러 또 그 연극을 하란 말씀이세요? 싫어요. 혼자 살았으면 살았지 그 짓은 못해요." 정철은 펄쩍 뛰었다. 그런다고 단념할 김 여사가 아니었다. "이번엔 다르다. 무작정 만나라는 게 아니라구. 너 길 건너 약국 하나 있는 거 봤니? '희망 약국'이라고. 거기 가서 감기약 하나 사올래?" 느닷없이 감기약을 사오라니까 정철이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감기 환자가 이 집에 없기 때문이었다. 김 여사가 웃으며 말했다. "녀석아, 내가 봐뒀단 처녀가 그 약국 약사로 있어. 그러니 암말 말고 가서 감기약 사는 척하고 처녀를 슬쩍 보고 오란 말이다." "그 처녀는 결혼 의사가 있대요?" "처녀가 그런 결혼 안하고 평생 혼자 사니? 내가 생각이 다 있으니까 너는 가서 감기약 한 봉지만 사오면 되는 거야. 내가 늘 그 약국에 약 사러 다니는데 어찌나 얌전하고 상냥하던지 저런 며느리 한번 얻어봤으면 하고 생각했지 뭐냐. 인물도 그만하면 어디 내놔도 안 빠지지. 좌우간 네 맘에 들어야 하니까 가봐, 엎드리면 코 닿는 거리 아니냐." 하는 수 없이 또 한번 행길로 나섰다. 하기야 감기약 한 봉지 사오라는데 그것마저 거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슬리퍼를 끌고 그야말로 동네 산책 나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큰길로 나서자, 길 건너편에 있는 '희망 약국' 간판이 보였다. 참 엄마 잘 둔 덕분에 별 체험을 다 겪는다고 생각하며 행길을 건너갔다. 약국 앞에서는 그래도 가슴이 뛰고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큰맘 먹고 그는 약국 안으로 들어갔다. 처녀 약사는 안락의자에 앉아 한가롭게 책을 읽고 있다가 벌떡 일어서서 다가왔다. "감기약 주세요." 정철은 다짜고짜 말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대요?" 처녀 약사가 상냥하게 물었다. 표정은 여자답다고 정철은 생각했다. 굉장한 미인은 아니라도 귀염성스럽게 생긴 얼굴이고 체격도 그런대로 잘 빠진 편이었다. 그런데 약사의 질문에 정철은 대답을 못하고 한참이나 머뭇거렸다. 거기까지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기침이 나고 목이 붓고 열이 아주 높아요." 그는 아무렇게나 말해버렸다. 약사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게 많이 아파요? 환자가 몇 살이나 먹었는데요?" "세 살이요. 아직 어린앱니다." 처녀 약사가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친절하게 말했다. "그렇게 어리다면 약을 먹는 건 무리예요. 일단 병원에 한번 데리고 가보세요. 그런 다음 약을 먹여도 늦지 않아요." 하는 수 없이 정철은 그냥 나왔다. 하긴 약을 사도 그만, 안 사도 그만이었다. 약사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눴고 가까이서 그녀를 본 걸로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것이다. 그는 처녀 약사가 일단 마음에 들었다. 무작정 약을 팔 생각을 하지 않고 병원에 데려가 보라고 말하는 태도도 호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이 왠지 찜찜했다. 그 약사가 처녀가 아니고 남의 부인일지 모른다는 느낌이 강했던 것이다. 그건 정철이 받은 인상이었다. 엄마는 그런것도 모르고 약사를 내게 추천했을까. 돌아와서 정철이 대충 그런 얘길 하자, 김 여사는 부리나케 약국으로 뛰어갔다. 약국에서 돌아온 김 여사는 아들 앞에서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했다. "내가 미쳤지. 너무 급하다 보니 남의 여편넨지 처년지도 분간 못하고 욕심을 내다니, 남편이 지금 군의관으로 군대에 가 있다는구나.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처녀 같지. 요즘 젊은것들은 구분이 통 안된다니까. 그건 그렇고 네 문제는 어쩌면 좋으냐? 이제 갈날도 며칠 안 남았는데." 정철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자, 김 여사가 말했다. "너 전에 봤던 민정이란 그 애 맘에 뒀었지? 그 앨 다시 한번 만나자고 해볼까? 고모가 잘 말하면 한번쯤 다시 나와 줄지 누가 아니." "상황이 바뀐 것도 아닌데 만나서 뭘 하게요? 그 여자는 적어도 일 년은 사귀어야 한대요. 내게 그런 시간이 어딨어요. 미국에 안 간다면 모를까." 정철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누워버렸다. 그러자 첨에 만났던 민정의 얼굴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는 마음을 정리하려고 혼자 밖으로 나왔는데 아무래도 이대로 돌아가기는 너무 억울했다. 그래서 술이라도 한잔 마실 생각으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갔다. 시내로 들어간 정철은 생각이 바뀌었다. 민정의 직장이 있는 건물이 가까이에 있다는 걸 깨달았고 그렇다면 한번 찾아가보자는 생각이 났던 것이다. 그 건물은 충무로에 있는 유명한 건물이었고 그래서 정철은 그 건물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침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때라 그는 서둘러 그 빌딩으로 찾아갔다. 그가 빌딩 정문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아가씨들이 현관에서 나왔는데 그 중 하나가 정철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정철도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가 바로 민정이었다. 민정은 퇴근하는 참이었다. 그러니까 하마터면 정철은 민정을 놓칠 뻔한 것이다. "안녕하세요? 여기 누구 아시는 분 있으세요?" 민정은 여전히 활달하게 물었다. 정철은 대꾸를 못하고 뒤통수만 손으로 만졌다. 민정이 옆의 친구더러 먼저 가라고 말한 뒤 옆으로 다가왔다. "여기까지 오셨으니 제가 차 한잔 살까요? 요전엔 너무 실례가 많았어요." 민정을 따라 다방으로 가면서 정철은 떠듬떠듬 말했다. "사실은 이 부근에 왔다가 어쩌면 민정 씨를 한번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어슬렁거리며 왔던 겁니다. 오늘도 제가 운이 아주 좋군요." "어머나! 그게 정말이세요?" "물론 정말이죠. 제가 그 건물 앞에 뭣 땜에 가겠습니까?" 민정은 뜻밖에도 감동한 것 같았다. 그녀는 표정이 약간 심각해졌다. 다방에서 커피 한잔을 앞에 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끝에 정철은 드디어 벼르던 말을 했다. "저는 결심했습니다. 며칠 사귀고 결혼할 수 없다는 민정 씨 말은 옳아요. 저는 당분간 미국에 안 가고 민정 씨와 사귀어볼 작정입니다. 물론 민정 씨가 만나주신다면 말입니다." "박사 학위를 포기하고요?" "당분간 포기해야죠.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한다는 건 불가능해요. 만나주시겠습니까? 단순한 친구로 말입니다." 민정이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말했다. "저는 사실 첨에 자존심이 상했어요. 며칠 만나고 사람을 판단하겠다는 말이 저를 무시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이제 그쪽을 이해할 것 같아요. 학위를 포기하진 마세요. 예정대로 미국도 가시구요. 이제 며칠 남았죠?" "이틀 뿐입니다." "그럼 이틀 동안이라도 우린 부지런히 만나야겠네요." "그 다음엔 어떡하구요?" "그건 그때 가서 또 궁리해보는 거죠. 안 그래요?" 민정이 해맑게 웃어 보였다. 정철은 오늘은 정말 운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50. 백마를 탄 기사 나는 아직 수진이라는 여자를 본 일도 없고 목소리조차 들은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은 내가 마치 그녀에 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나는 그녀, 즉 수진이란 아가씨가 못생겼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는데 그녀가 대체 얼마나 못생겼기에 친구들로부터 그렇게 비웃음을 사고, 못생긴 것도 분할 텐데 돋 못생겼다는 말까지 귀가 따갑도록 매일같이 들어야 하는 건지 모르고 있다. 수진이란 내 아내의 친구이며 고등학교 동창이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누구 때문에 그녀에 관해 잘 알고 있는 듯이 착각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내 한 사람뿐만은 아니다. 수진이란 못생겼다는 여자만 빼놓고 우리집에 많은 아내의 동창생들이 매일같이 놀러온다. 우리집은 마치 아내와 아내 친구들이 매일 만나서 화투 치고 남의 험담을 늘어놓는 유흥장처럼 되어버렸다. 그 많은 입들로부터 매일처럼 수진이가 못생겼다는 이야기를 갖가지 색다른 방법으로 듣고 있으니 내가 수진이란 여자를 잘 알고 있는 듯이 착각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집에 놀러오는 모든 아내의 친구들은 모두 기혼녀이다. 시셋말로 얼굴이 못나지 않아서 팔려간 몸들인 것이다. 팔려갔다는 말이 지나치다면 모셔간 몸들이라고 해두자. 나 자신도 행여나 아내가 내게로 오지 않을까봐서 석 달 닷새를 꼬박 아내네집 문 앞에서 기도를 봤으니까 모셔갔다는 말이 한결 적절하기는 한 것 같다. 그건 그렇다 해두구 수진이가 어떤가? 해답은 자명하다. 그 못생긴 여자를 누가 데려갈 것인가? 어떤 저주받은 남정네가 그 소문난 추녀를 데려갈 것인가? 수진이는 서른하고도 다섯 살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노처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자, 이제 아내의 친구들의 자기들의 불쌍하고 가엾은 노처녀 친구, 하나밖에 남지 않은 낙오자를 어떻게 가차없이 무참하게 비웃고 비아냥거렸던가를 전해줄 차례다. 나는 물론 아내의 친구들의 그런 험담을 하거나 화투를 칠 때는 내 방 밖으로 얼씬도 않는다. 아내의 친구들은 주로 거실이나 안방에서 노는데 우리집이 불과 열여덟 평의 소형 아파트인 관계로 내 방에 숨어 있어도 거실에서 하는 말, 안방에서 하는 말이 바로 귓가에서 하는 말처럼 똑똑하게 들리는 것이다. "얘, 너 그 애 소식 들었어?" "그 애라니, 누구 말인데?" "누군 누구야? 수진이지." "오, 원숭이 털. 못 들었는데." 원숭이 털이란 수진이의 머리칼이 원숭이 머리털처럼 짧고 붉은 색이라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 애의 화장이 아주 변했대. 전에는 입술을 칠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다녔는데 이젠 노골적으로 빨갛게 칠한다는 거야. 걔는 원래 입술이 까맣지 않니? 얼굴도 까맣지만. 그런데 그 까만 입술을 빨갛게 칠하고 다니면 어떻게 보일 것 같니?" "그야 물론 니그로지." "맞아. 그 애 어떻게 된 것 아냐?" "그럴 만도 하지. 그 나이에 임자가 없으니 속으론 오죽하겠어?" "얘, 그런 말 하지도 말어." 제 삼자가 사이에 끼어들었다. "너희들 그 유명한 백마 탄 기사도 몰라?"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수진이 말이지, 무슨 말은 무슨 말이니? 그 앤 전부터 친구들 만나면 큰소리 탕탕 쳤잖니. 이젠 기가 죽을 줄 알았는데 서른다섯이 되어서도 기만 살아 있더라. 자긴 시집 못 갔어도 조금도 초조하지 않다는 거야. 언젠가 백마를 탄 기사가 자기 앞에 나타나서 무릎 꿇고 애원할 날이 반드시 올 거래. 그 앤 스물세 살때부터 백마 탄 기사 이야기를 했잖니. 그런데 며칠 전에도 거리에서 만났는데 아직도 기사를 기다린다는 거야." "호호호." "꺄르르." "백마 탄 기사가 왔다가 수진이 얼굴 한번 보고 나면 놀라서 말에서 떨어지는 거 아니니?" "얘, 그래도 그 넙적한 코만 어떻게 고치면 그런대로 귀염성스런 얼굴이야." "눈도 좀 손을 대는 게 나을 걸. 수진이가 걸어올 때 보면 꼭 눈을 감고 있는 것 같지 않어? 눈이 작다작다 해도 그렇게 딱 붙어버린 눈은 아마 없을 걸." "얘, 그런 소리들 하지 마. 그래도 본인이 백마를 탄 기사를 기다린다는 게 가상하지 않니? 물론 백마가 아니고 흑마라도 탄 기사가 와주면 좋겠지만." 아내와 아내의 친구들의 이런 투와 대화를 수없이 듣다보니 나도 이젠 수진이란 여자의 얼굴을 어렴풋이 그려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물론 가상의 얼굴에 지나지 않지만 나는 내가 그려본 그 얼굴이 실물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거란 자신감까지 갖고 있었다. 그런데 몇 달 전 내 친구의 동생이 미국에서 귀국했다. 귀국 후 며칠만에 친구의 집에서 저녁 초대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나는 친구의 동생을 처음 만났다. 그는 서른다섯인데 박사 학위를 따느라고 여태 여자 친구조차 사귄 경험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는 온통 그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화제가 될 수밖에 없는게 친구 동생이란 남자는 영화배우가 무색할 만큼 얼굴이 매끈하게 빠졌으며 더구나 미국에서도 일류라는 대학의 박사인 것이다. 또 그 집안은 어떤가? 말이 나왔으니 얘기지만 나는 늘 그 친구의 집안이 나에 비해 지나치게 호화멤버라는 것 때문에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 아버지는 이름난 의학박사이고, 어머니는 이름이야 그다지 알려지진 않았으나 어쨌든 소프라노이고, 누나는 너무 미인이란 이유 때문인지 어떤 재벌의 맏며느리로 들어간 몸이고, 내 친구 역시 판사를 거친 개업 변호사이다. 이처럼 호화멤버인 가정적 배경을 가지고 있고 더구나 그 자신이 미국 일류 대학의 공학박사라는 남자가 여태까지 여자 친구 하나 사귀지 못했다고 하니 그게 화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날 집에 돌아와서까지 자연히 그 화제를 연장했다. 그런데 아내가 그 이야기를 듣더니 무심코 농담처럼 내게 한마디를 던졌다. "그 남자에게 수진이 소개시켜줘요." 나는 물론 아내가 농담하는 줄은 알았지만 이건 농담도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담도 남이 들으면 곤란한 농담이 있는데 이게 바로 그런 농담이었다. 만약 친구나 그 동생이 이런 농담을 들으면 얼마나 화를 낼 것인가? "당신 미쳤어? 그런 말을 다하게.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건 좀 지나쳐." 나는 아내에게 정색을 하고 질책을 했다. 그런데 아내는 뜻밖에도 반발을 하고 나섰다. 그 이유가 나의 지나친 질책 때문인지 혹은 지금까지 수진이란 친구를 두고 온갖 험담과 비양거림을 일삼아온 자기들의 행동을 속죄하고 싶은 충동을 갑자기 느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여보! 내가 뭐 총각에게 과부라도 소개하자고 그랬나요? 수진이는 엄연한 처녀예요. 총각에게 처녀 좀 소개하자는 게 뭐가 그리 이상해요?" "그야 그렇지. 하지만 그렇더라도 어지간히 어울려야 말이지. 미국 박사에다 미남인데 어떻게 그런 못생긴 처녀를 만나라고 하겠어? 그렇지 않어." "당신 이제 봤더니 사고방식이 아주 속물인데요. 난 남들은 다 그래도 당신은 좀 다른 줄 알았어요. 남녀가 꼭 그런 조건으로 만나는 줄 아세요? 우리만 해도 그렇지. 결혼할 때 당신 알거지였고 학력은 대학 중퇴에다 집안은 엉망 부르스였죠. 조건만 봤다면 내가 뭣 때문에 당신에게 왔겠어요?" "그만해둬. 알았으니까. 당신 그 친구에게 속죄하고 싶은 모양인데 일이 잘못되면 자칫 장난친 꼴이 되어버린다구요." "그럼 소개를 해볼래요?" 아내는 내게 바짝 다가앉았다. 그 바람에 나는 엉겹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실은 내게도 세상의 상식을 한번쯤 무시하고 깨부수자는 짓궂은 생각이 있었다. 소개는 다음날로 이루어졌다. 호텔 커피숍에 나가서 두 남녀를 소개시킨 건 아내였다. 아내는 그 일만 끝내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두 사람이 죽을 쒔는지 된장국을 끓였는지 모른 채 거의 한 달이나 세월을 보냈다. 결과가 무척 궁금했을 텐데 어떻게 한 달씩 참고 견뎠을까? 하긴 하루에도 몇 번씩 미국 박사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만약 무슨 좋은 징조나 소식이 있다면 이쪽에서 바위처럼 꼼짝않고 있어도 낭보가 저절로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는 처음부터 낭보 따위는 기다리지도 않았으니까 이쪽에서 전화를 걸고 무슨 수선을 떨고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한 달이나 소식이 감감하다면 그거야 물어보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래도 아내는 약간의 기대를 가졌던 모양이었다. "당신 그 친구 동생에게 전화 한번 해 보면 안되우?" "궁금하면 당신이 수진인가 하는 친구에게 전화해보지 그래. 미국 박사는 지금쯤 나한테 농간당했다고 화를 내고 있을 거야. 그런데 내가 어떻게 전화를 하나?" 아내와 나는 서로 전화하는 걸 미루기만 하다가 한 달을 보낸 것이다. 우리가 그 뒷소식을 알게 된 건 우리집으로 화투를 치러 온 아내의 친구들을 통해서였다. "얘, 너 그 애 소식 알고 있어?" "그 애라니, 누군데?" "수진이 말야. 너 내 말 들으면 아마 기절할거다. 진정제라도 준비해두렴." "무슨 일인데 그러니? 빨리 말해봐." 다급해하는 아내의 말소리였다. 이 부분에서는 엿듣는 내 가슴도 마구 뛰었다. "글쎄 그 백마를 탄 기사가 기어코 나타났다지 뭐니?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거라더구. 미국에서 박사 따가지고 온 동갑나기 남잔데 얼굴은 타이론 파워 뺨치게 미남인 데다 또 그 집안은 장안에서 알아주는 명문이라지 않니? 그 남자와 수진이가 글쎄 약혼을 했대. 다음달에 결혼할 거라더군. 그런데 정말 기가 막힌 이야기가 있다구. 그 남자가 수진이를 한번 보고 나서 그날부터 매일 하루도 안 거르고 장미꽃 한다발씩 수진이에게 보냈다는구나." "너 그 말 사실이니? 직접 들었어?" "아이구, 얘좀 봐. 내가 어제 수진이가 불러서 걔네 집에 가서 저녁 먹고 왔다니까. 난 그 남자 사진도 봤고 그가 보낸 꽃다발도 봤다구. 우리 억울해서 어쩌지?" "뭐가 억울해?" "나도 그래. 그러니까 억울하다는 거 아니니? 우린 새파란 이십대에 결혼을 했어도 너무 싸구려로 팔린 거야. 서른다섯 노처녀도 저렇게 비싸게 팔리는데." 그뒤부터는 빤한 이야기였다. 수진이를 비양거리는 입들은 이제는 자신들 입장을 한탄하는 논조로 방향을 바꿨던 것이다. 51. 맞선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가 미국으로 망명했을 때 이야기다. 어느 친지 집에 초대받았는데 그 자리에 인도계 미국 남자 한 사람이 역시 초대를 받고 나타났다. 그 남자를 보는 순간 스베틀라나는 그 남자에게 그만 끌리고 말았다. 결국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이 이야기를 읽었을 때 나는 서양 사람과 동양 사람 사이에는 이성을 만나는 방식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서양 소설에는 순간적으로 매혹당해 결혼 혹은 사랑에 이르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소설만 그런 게 아니라 스베틀라나처럼 현대 여성들도 이성을 순간에 판별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반 년 혹은 이삼 년쯤 사귀어 봐야 상대방을 비로소 알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맞선을 봐도 결국 몇 달 정도는 사귀고 결혼을 한다. 이른바 연애 반 중매 반이란 말이 그래서 생겨났다. 어찌 보면 우리가 합리적이고, 자칭 합리적이라고 하는 서양사람들이 매우 감성적인 것 같다. 적어도 사랑이나 결혼에 관해서는 우리 쪽이 더 합리적이라고 자랑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런데 내 생각은 다르다. 이성을 알기 위해 여섯 달이나 삼사 년 씩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을 나는 바보라고 생각한다. 나는 서양 쪽에 가까운 셈이며 지나치게 감성적이라고 스스로 자인하고 있다. 결혼 전에 나는 몇 번 맞선을 봤는데 맘에 드는 아가씨를 만나면 즉석에서 결혼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런데 보수적이고 합리적인 상대방은 나의 그런 태도를 장난이나 혹은 불성실한 태도로 여기기 일쑤였다. 그래서 첫날로 산통이 깨지고 말았다. 나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할 일이 없어서 비싼 밥 먹고 비싼 커피 마시고 다니면서 남의 집 귀한 딸에게 농담이나 하겠는가? 남은 필생의 정성을 모아 구혼을 하는데 상대는 불성실한 태도로 간주하니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는 것이다. 물론 내가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서양식인 데서 오는 부작용인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운명이란 말을 나는 좋아하지 않지만 맞선 장면을 떠올리면 이 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 내가 아내를 처음 만난 이야기할 차례가 되었다. 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결혼이 늦어져 마흔이 다 된 총각으로 어느 찌그러진 기와집 한 채를 빌어 혼자 살고 있었다. 일요일에 나는 늦잠에서 깨어났다. 전날 이사를 했기 때문에 몸이 유난히 고되고 나른했다. 그런데 눈을 뜬 순간 내가 그날 오전 열한 시에 맞선을 보기로 며칠 전 약속을 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몹시 짜증이 나고 심란했다. 그날은 종일 집에서 쉬고 싶었다. 맞선을 또 본들 무슨 뾰족한 수가 나겠는가? 좀 미안한 말이지만 또 그렇고 그런 여자가 여태 임자를 구하지 못하고 애태우고 있다가 요행을 바라고 나올 게 아닌가? 다 그렇다는 건 아니나 맞선 장소까지 끌려나오는 여자라면 대체로 점수를 주기가 어려운 처지의 아가씨들일 경우가 십상이다. 점수를 많이 받을 만한 아가씨라면 점포에 나오기 전에 이미 팔려버린 것이다. 그게 이 도시의 이치 아닌가? 마흔 살의 내가 맞선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니까 그 정도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마음에 들지도 않는 상대방을 앞에 놓고 점잔을 빼고 어디까지나 인격적으로 행동을 해야하는 고역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는 약속한 걸 후회했으며 정말 그날은 나가기가 싫었다. 오죽했으면 면도도 하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고 꼭 감옥에서 방금 출옥한 사람 몰골을 하고 맞선 장소에 나갔겠는가? 이건 상대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만사 너무 귀찮고 또 그 결과가 지난날 경험에 비추어 너무 빤했기 때문이었다. 도리어 그날은 내가 나가준 것만도 상대는 고마와해야 할판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최후의 순간까지 나가지 않을 궁리를 하다가 바람 맞을 상대방의 처지를 감안해서 나갔던 것이다. 오전 열한 시, 어느 고층건물 라운지에 나는 앉아 있었다. 중매장이가 먼저 나와서 쓸데없는 잡담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장본인이 자기 언니를 대동하고 드디어 입장을 했다. 나는 입장을 하건 퇴장을 하건 별반 관심도 두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다고 눈을 뜨고 있는데 들어오는 사람을 쳐다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아가씨가 라운지 입구로 막 들어서는 찰나에 나는 그녀를 보았다. 거리가 이십여 미터, 아니 십여 미터는 족히 되었을 것이다. 처음 그녀를 흘낏 본 순간 나와 그 아가씨의 운명이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빨리 속으로 생각했다. 인상은 좋구나. 큰 결점만 안 나타나면 저 아가씨와 결혼을 해야겠다. 상대는 물론 이런 사정을 까맣게 모르고 조심스럽게 내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나는 별로 할 얘기가 없었다. 이미 마음은 작정을 했는데 새삼스럽게 형사처럼 이것저것 캐물은들 무엇하랴? 그리고 하나마나한 허드레 인사말은 또 해서 무엇하나? 중매인과 언니는 내가 말을 않고 담배만 피우고 있으니까 일이 깨졌다고 생각한 듯했다. 본인도 내 몰골을 보고는 한심스러웠을 것이다. 중매인과 언니가 관례상 일단 자리를 피해줬다. 내가 아가씨에게 물었다. "혹시 제가 쓴 글을 한 줄이라도 읽어보셨나요?" 이건 물론 무슨 뜻이 있어서 한 말이 아니라 할 말이 없어서 그저 물어본 것이다. 아가씨가 조금 당황하는 듯하더니 자신있게 대답했다. "네, 읽었어요. '황구의 비명'을 읽었어요." 아뿔사! '황구의 비명'은 내 작품이 아니고 선배 작가 천승세 씨 작품이다. 아가씨가 좀 미심쩍었던지 내게 물었다. "맞죠? 그 작품을 쓰셨죠?" "네. 맞습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만약 틀리다고 했다면 상대방은 얼마나 무안하고 창피해할 것인가? 사실은 틀리게 말한 것이 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책을 별로 안 읽는 여자를 좋아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이럭저럭 몇 시간을 보내고 헤어질 때 내가 말했다. "전화를 해도 좋을까요?" 좋다고 아가씨가 말했다. 사흘 뒤에 나는 전화를 걸었다. 그날은 면도도 하고 세수도 깨끗하게 하고 넥타이까지 매고 나갔다. 못생긴 얼굴은 아니니까 그 정도 모양을 냈으면 저쪽에서도 첫날의 실망을 어느 정도 잊을 만했을 것이다. 두 번째 만나서 구혼을 했고 승낙을 받았다. 아가씨가 내 말을 불성실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도 다행한 일이었다. 순간에 나는 내 운명을 결정한 것이다. 그렇다고 아내가 굉장한 미인이라거나 무슨 다른 매력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때 그 순간에 내 마음을 움직였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지금도 석 달, 여섯 달, 아니 일 년 이 년 사귀어봐야 이성을 안다고 말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성은 감성으로 느낀다. 52. 노총각 이야기 자선사업이란 물론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남이 그런 일 하는 걸 보면 무척 쉽게 보이고 자기도 맘만 먹으면 어느 때라도 자선 사업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뜻밖에도 많다. 나도 그런 과대망상증 환자의 한 사람이었다. 하기야 환자로 말한다면 이런 환자가 많다는 건 세상에 하등의 해독이 될 것도 없다. 기왕이면 이런 과대망상증 환자가 넘치고 흘러서 이 세상이 그야말로 훈훈한 낙원이 된다면 좋지 않겠는가? 진짜 자선사업가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과대망상증 환자들 속에서 배출되기 마련인 것이다. 우리집 앞 골목에는 조그만 화장품 할인 코너가 있다. 그리고 키가 매우 작고 별로 미인이라고 할 수 없는 아가씨 하나가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남자가 그런 집의 아가씨에게 신경을 쓰고 있나 하고 색안경을 쓰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 할인 코너에 들어가게 된 건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그날 내가 출근하는데 아내가 현관으로 나와서 특별한 부탁을 했다. "여보, 당신 회사 부근에 동양 화장품 회사 직영점이 있죠? 오실 때 거기서 로숀 하나 사오세요. 그 회사 것이 아주 좋더라구요." 나는 알았다고 대답하고 집에서 나왔다. 이런 경우 만약 내가 아내의 부탁을 까먹거나 잊는 날에는 나는 며칠 동안 편한 밥 얻어먹기는 글른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살이나 특히 나 같은 놀기 좋아하는 중년의 남자가 아내의 부탁을 곧이곧대로 간직하고 있을 만큼 한가로운가? 퇴근할 때 나는 친구들과 술판 약속을 하느라고 아내의 그 지엄한 부탁을 까먹고 말았다. 그 생각이 뒤늦게 떠오른건 거나하게 취해가지고 집 앞에서 택시를 내렸을 때였다. 아무리 취중이지만 나는 술이 다 깨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걸 어떡한다? 그렇다고 지금 다시 회사 쪽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맞은편 할인 코너, 그야말로 코딱지만한 할인 코너가 그때 눈앞에 보였다. 키가 작은 아가씨가 그만 문을 닫으려고 밖으로 나와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아가씨, 잠깐. 문 좀 이따 닫고 내 말좀 들어봅시다." 그 품질 좋다는 동양 회사 로숀을 그렇게 해서 나는 구할 수 있었다. 할인까지 받아가지고. 내가 그 코딱지만한 할인 코너 주인 아가씨를 알게 된 건 이런 사연이 있기 때문이었다. 로숀을 사고나자, 안심이 되어 나는 슬그머니 아가씨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몇 살이요?" 물론 취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거침없이 할 수가 있었다. "어머나, 남의 나이 알아서 뭐하시게요?" "혹시 누가 아오? 내가 중매라도 서게 될지. 아직 미혼이라면 말이오." "제가 기혼처럼 보여요?" "아니, 미혼이시겠지." "중매하신다면 나이를 말씀드리죠. 스물여덟이에요. 꼭 중매하셔야 해요." 그녀도 물론 반은 농담으로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약속으로 받아들였다. 자선사업가라면 이런 경우 허튼소리를 하고 다녀서는 곤란하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허튼소리를 하고 다니는건 사기꾼이나 하는 짓 아닌가? 그래서 나는 그 순간에 이 아가씨를 어느 참한 총각에게 묶어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기야 단순한 자선사업가적 기질만으로 그런 생각을 한건 아니다. 그녀를 나는 좋게 보았다. 키는 작고 미인도 아니지만 야무지고 깔끔하고 친절했다. 이런 아가씨가 서른이 가깝도록 임자도 없이 지내는건 안타까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그 뒤에도 이따금 그 할인 코너를 들러 커피를 대접받기도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녀를 시집보내야겠다는 게 점점 내 책임처럼 느껴졌다. 아내는 그런 나를 두고 말했다. "당신 어지간히 심심한가 보군요. 당신이 무슨 자선사업가라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처녀 일에까지 그렇게 열을 쏟아요?" 아내 말에 어폐가 있었다. 자선사업가가 잘 아는 사람만 돕고 다니나? 그리고 이 세상에는 자선사업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허다한 이웃들이 있지만 따지고 보면 노총각 노처녀만큼 딱한 사람들도 없는 것이다. 자칫하면 일생을 홀로 살아야 할 판 아닌가? 뚜렷한 결함도 없는 멀쩡한 선남선녀가 말이다. 그러니 남의 일이라고 일소에 부치는 태도는 어느 모로 봐도 옳지 않은 것이다. 자, 그런데 이 키도 작고 그다지 미인도 아닌 아가씨를 어디에 천거한단 말인가? 십 년 전만 해도 거리에는 노총각들이 우글우글 했었다. 멀끔하고 쓸 만한 노총각들이 장가를 못 가고 거리를 배회하고 다녔기 때문에 어지간한 조건만 갖춘 아가씨라면 그야말로 공주님 배필 고르듯 마음대로 골라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태가 역전되었다. 이젠 거리에 시집 못 간 노처녀들이 우글우글하다. 내 말이 허풍인지 아닌지 당장 거리로 나가서 확인해도 좋다. 하루에도 나는 그런 딱한 노처녀를 적어도 셋은 만난다. 남자들은 어떤가? 좀 괜찮다고 생각되어서 혹시 임자없는 몸이냐고 물어보면 웬걸, 아직 이십오 세 이전인데도 벌써 짝들이 있다. 직업 있고 코만 안 삐뚤어졌으면 누구나 짝을 일찍이 마련하고 있다. 그러니 어디 가서 그 아가씨 천생연분을 찾아줄 것인가? 나는 정말 고민이었다. 그 키다리가 내 앞에 나타난건 내 고민이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그는 어느 출판사 사원인데 서른여섯의 그야말로 보기드문 노총각이었다. 그는 서른에 대학에 들어갔고 서른다섯 나이에 사회에 첫발을 내놓았다고 수줍게 말했다. 그는 사람 하나는 고지식하고 믿을 만한데 융통성이 상당히 모자랐다. 지금도 학교 다닐 때 있던 자취방에서 자취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그가 융통성은 빵점이란 걸 알았다. 내가 물었다. "연애는 좀 해보았소?" "아이구. 그럴 시간이 있으면 공부를 해야죠. 지금 읽고 싶은 책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럼 결혼을 안할 셈인가요?" "글쎄요. 돈도 없고 아직 할일이 너무 많아서요. 누가 저 같은 사람 좋아하겠어요." 나는 이 남자를 붙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키가 지나치게 크고 좀 답답하고 그리고 나이에 비해 경력도 너무 짧다. 결코 세상풍속으로 치면 일등 신랑감이 아니다. 잘 봐 줘도 삼등, 아니 사등쯤 될게다. 하지만 그나마 임자없는 남자라곤 이 친구뿐이니 어떡하랴? 또 할인 코너 아가씨도 일등 신부감은 아니니까 피차 맞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의외로 키다리가 결혼에 회의적이었다. 자기는 뭔가 더 성취해놓고 결혼한다는 것이다. 내가 말했다. "이거봐, 장형. 거지가 되고 싶으면 더 늦게 결혼해도 무방하지. 내가 마흔에 결혼한 거 알지? 그래서 나는 아직도 거지 아닌가? 당신 지금 결혼해도 거지 면할려면 십 년은 식은땀깨나 흘려야 할걸. 이래도 내 말을 못 알아듣겠나?" "그나저나 아가씨가 있어야 결혼을 할 게 아닙니까? 나 원 참." "한번 만나볼 텐가? 참한 아가씨가 있는데." 나는 이때라고 생각하고 살며시 제안했다. 키다리가 눈을 꿈벅꿈벅하더니 말했다. "좋습니다. 그런데 전 여자를 어떻게 만나는지 그걸 몰라요. 좀 가르쳐주십쇼." "아니, 다방에서 커피 한잔 마시며 이야기하는 게 뭐가 어렵나?" "그런 때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자기가 전공한 학문 이야기를 합니까?" "에끼. 이 사람아. 세미나도 아닌데 학문은 무슨 학문 이야기를 해? 그냥 취미나 영화나 뭐 그런 이야기가 좋겠지." "그 다음 다방에서 나오면 어디로 갑니까? 영화관이 역시 좋겠죠?" "자네 정말 여자와 한번도 사귀지 못한 거여?" "네, 아직 한번도. 그게 뭐 결함이 될까요?" "아냐, 아냐. 결함이 될 수가 없지. 다만 자네를 결혼시키자면 내가 고생깨나 해야 될 것 같아 묻는 거네. 다방에서 나오면 저녁식사를 하러 가야지. 그런 때는 반드시 여자의 의향을 묻는 거라네. 뭘 좋아하십니까? 하고." "잠깐요. 좀 적어야겠어요." 키다리는 수첩을 꺼내 들고 나를 쳐다봤다. 그 순간 나는 자선사업이란 정말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일이란 걸 너무 뼈저리게 깨달았다. 53. 노처녀 "여보 경애가 내일 집에 놀러온대요." 퇴근해서 집에 돌아가자, 아내가 대뜸 말했다. "경애가 온다고? 무슨 일이 있나?" "아니, 당신은 마치 달갑지 않은 것 같은 얼굴인데 경애가 뭐 못올 데라도 온다는 거예요?" "아냐. 그게 아니라구. 하두 오랜만에 우리집엘 오니까 내가 좀 놀란 모양이야. 전에는 이틀이 멀다 하고 찾아왔는데 최근 이삼 년 동안에는 통 얼굴도 비치지 않았잖아? 하여튼 반갑군." "그거야 그 동안에 그 애가 뜨개질 학원에도 다녔고 가게도 내느라고 바빴잖아요? 바쁜 사람이 할 일 없이 놀러나 다닐 수가 있어요?" 내일이 마침 일요일이라 나는 오랜만에 사촌 처제를 만나게 된 셈이다. 경애가 온다고 했을 때 나는 그런데 왜 놀랐을까?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나는 막상 오랜만에 경애와 마주칠 일을 생각하니 약간은 난처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자신이 그녀에게 큰 죄악을 저지른 것 같은 자책감을 느끼곤 했다. 비록 고의적인 건 아니더라도 경애의 인생에 나는 중대한 훼방꾼 노릇을 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경애가 그동안 자기 직업을 갖느라고 바빴다고는 해도 이태씩이나 우리집에 얼씬도 하지 않은 건 그녀쪽에서도 형부에게 얼마간 불만과 서운한 감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적어도 나는 이렇게 생각해왔다. 경애는 금년 서른다섯인데 아직도 결혼을 못한 노처녀다. 그녀는 아내와 불과 두 살 터울로 내가 아내와 결혼했을 때 경애는 이미 여자 나이로 적다고 할 수 없는 스물여덟의 나이였다. 아내는 나와 결혼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여보, 경애 남편감 좀 구해줘요. 당신은 남자고 사람도 많이 아니까 당신이 구할려고만 하면 적당한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정말 경애가 급하다구요." "어떤 사람을 원하는데?" "그거야 직업 확실하고 인간성만 괜찮으면 좋겠지요. 경애가 뭐 갑부나 천하미남을 바라고 있겠어요." "그야 그렇지만 요즘에는 웬일인지 남자가 귀하더군. 직업 확실하고 인간성이 좋은 남자는 벌써 임자가 다 정해져 있다구. 직업이 불확실하더라도 장래성이 있다면 그런 남자도 내 생각엔 좋을것 같은데." "직업이 불확실한데 어떻게 장래성이 있다고 하겠어요?" "여자들은 그걸 모르지. 가끔 그런 사람이 있어. 나도 지금 당장 어떤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긴 곤란하지만 말이야." "그럼 그런 남자라도 구해보구려. 당신은 경험도 많으니까 사람을 잘 보겠지요." 이쯤 되면 나는 결혼과 동시에 큰 짐 하나를 지게 된 것이다. 당사자인 경애도 새 형부에게 은근히 큰 기대를 품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결혼 이후 이삼 년 동안은 이틀이 멀다 하고 우리집엘 들렀던 것이다. 경애 입장에서는 우선 새 형부가 자기 주변에서는 몇 안 되는 직장인이고 그리고 활동가라고 믿었기 때문에 내게 기대를 갖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경애네 집엔 홀어머니와 그리고 일찍 홀로된 언니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여자들만 사는 집인 셈이다. 경애는 어떤 아가씬가? 결혼을 앞둔 여자는 백화점의 진열장에 놓은 상품이나 매일반이다. 물론 남자라고 전혀 상품의 성격이 없다는 건 아니지만 여자는 좀 더 피동적이어서 더욱 그런 느낌을 준다. 경애는 그럼 어떤 아가씬가? 경애는 남 앞에 추켜세우고 떠들기가 그렇게 수월한 조건의 신부감은 아니다. 그녀는 우선 키가 평균치를 훨씬 밑돌고 얼굴도 그저 그런 정도의 평범한 얼굴이다. 학력은 어렵게 고등학교를 간신히 나왔고 따로 특기 같은 것도 없다. 가정 형편도 그녀가 머리가 남달리 영특함에도 불구하고 대학구경을 못 했을 정도로 어려운 상태다. 다만 경애에게 장점이 있다면 그건 경애가 앞서 말했듯 머리가 영특하고 사리분별이 확실하다는 점이다. 내가 알기로는 경애가 결혼 생활을 한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모범적인 알뜰주부가 될 것이다. 알뜰주부가 얼마나 남자를 편하게 해준다는 건 결혼생활을 해보지 않은 건달들은 알 길이 없다. 그렇다면 경애는 신부으 조건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장점을 지닌 아가씨가 아닌가?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는 이런 말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영특한 머리보다도 사려깊은 분별력보다도 훤칠하고 날씬한 몸매와 곱상한 얼굴을 더 좋아하는 남정네들이 몇백 곱절이나 더 많은 걸 어찌하랴? 그렇다고 내가 처음부터 경애의 장래를 암담하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세상에는 작달만한 키에 못생긴 얼굴로도 부잣집 마나님 행세를 하는 여인들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런 여인일수록 또 남편들은 배우처럼 허여멀쑥한 사람을 거느리고 있다. 여인의 운명을 겉모습만 가지고 판단하는 건 위험천만한 노릇인 것이다. 나는 경애에겐 경애의 임자가 있을 걸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키가 작고 얼굴이 보잘것 없다는 내 말을 듣고 경애를 만나보려고 하는 놈팽이는 하나도 없었다. 나는 젊은 사내만 만나면 마치 보험 외무 사원처럼 그를 설득하려고 열심히 매달렸다. "이봐. 키가 좀 작고 미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추물도 아니라구. 생활이란 그런 게 아니야. 마음과 정신이 중요해. 남자들은 결혼 뒤에야 그걸 깨닫게 되지. 내 처제를 한번 만나보지 않겠나?" "난 아직 결혼 같은 건 생각 없는데요." 직업 좋고 외모가 좀 뺀질뺀질한 녀석들은 으레 이렇게 딴청을 피웠다. 물론 내 처제가 미인이라고 내가 으시댔더라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이쪽에서 왠지 저자세로 나가니까 행여나 중대한 결함있는 아가씨를 떠맡길까봐 미리 겁을 집어먹고 꽁무니를 빼는 것이다. 그 정도의 사내들의 마음이야 나도 환히 들여다볼 수 있는 일이다. 오랫동안 보험 외무 사원 노릇 한 결과로 나는 드디어 한 놈팽이를 우리 집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그렇다고 당장 결혼 성사가 된 건 물론 아니다. 다만 내 처제와 우리집에서 맞선을 보겠다고 그 놈팽이가 동의를 한 것이다. 그 녀석이 맞선을 보겠다고 나선 것도 사실은 이유가 있었다. 그 녀석은 처제가 미인도 아니고 체격도 볼품 없다는 나의 말을 어디까지나 겸양의 말로 새겨들은 것이다. 그러니까 녀석은 내 말 따위는 따로 접어두고 자기는 자기대로 큰 기대를 품고 맞선을 보겠노라고 나선 셈이었다. 그 뱃심좋은 놈팽이는 대체 어떤 녀석인가? 그 녀석은 내가 나가는 출판사에서 영업부 일을 거들고 있는 김만수란 녀석이었다. 영업부는 정식 직원이 둘 있고 김만수는 잠시 보조격으로 영업 일을 거들고 있는 임시 고용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걸 가지고 무슨 직업이라고 쳐줄 형편도 아닌 것이다. 아무리 노처녀라고 하필이면 그런 날건달을 처제의 신랑감으로 천거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아내도 처음 말이 나왔을 때 당연히 이런 반응을 보였다. 김만수가 날건달이란 건 적어도 당시 시점에선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녀석처럼 날건달이란 말이 어울리는 놈도 없었다. 그러나 김만수는 데모하다 대학에서 제적된 신분으로 아직 복학의 가능성은 있었다. 그뿐 아니라 녀석은 똑똑하고 사내다왔으며 외모 또한 걸출한 호남아였다. 이런 녀석은 장차 어느 바닥에서 뒹굴 망정 처자식 입에 거미줄 칠 리는 만무하다고 나는 판단되었다. 말하자면 직업은 확실치 않아도 장래가 좋아보이는 그런 녀석이었다. 어느날 나는 처제를 미리 집으로 오게 해놓고 그야말로 원님 모셔오듯 이 건달을 우리집으로 데리고 왔다. 아내는 없는 솜씨에 점심식사를 준비하느라고 한바탕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둘은 거실에서 자연스럽게 대면시키고 우리는 분위기 좋게 점심도 함께 먹었다. 그렇지만 점심만 먹으면 뭘하나? 결과부터 말해서 나와 아내는 완전히 헛수고만 한 셈이었다. 이 날건달은 점심만 맛있게 먹어치운 뒤 처제와는 쓰다달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바쁘다는 핑계로 달아나고 만 것이다. 제놈 속셈이야 물론 빤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은근히 기대를 했는데 처제의 체격하며 용모가 자기 기준과는 천리밖인지라 우물쭈물할 필요없이 줄행랑을 놓아버린 것이다. 이 일로 나는 그만 자신감을 잃고 말았다. 결혼이야 어디 우정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인가? 또 자비심으로 결혼을 하는 멍청이도 없는 것이다. 결혼이야말로 에누리가 없는 각박한 흥정이란 걸 나는 새로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또 누구를 처제에게 소개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 일 뿐이라면 내가 경애에게 그렇게 미안한 마음을 갖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뒤로 더 크고 치명적인 사건이 있었다. 경애에게는 그건 분명 사건이었고 아마 인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사건일 것이다. 김만수에게 낭패를 본 뒤 반 년쯤 지났을 때였다. 캐나다에서 경애를 찾아온 남자가 있었다. 캐나다에서 뭣 때문에 경애를 찾아왔느냐고? 그는 캐나다 교민으로 경애를 아는 이웃의 소개를 받아 고국의 아가씨를 신부로 맞기 위해 머나먼 길을 날아온 것이다. 표적이 다만 경애 한 사람만은 아니겠으나 적어도 경애가 제일의 후보임엔 틀림없었다. "여보, 그 청년이 경애를 맘에 들어하나 봐요. 시간이 금쪽 같을 텐데 경애하고 덕수궁에도 가고 영화관에도 가고 벌써 일 주일 씩이나 경애하고 붙어다닌다나 봐요. 제발 잘 되었으면 좋겠는데." 아내가 이 말을 했을 때 나도 기분이 좋아서 말했다. "임자는 캐나다에 있었는데 괜히 이 좁은 땅에서 사람을 찾느라고 고생만 했지 뭐야?" 이틀 뒤에 아내가 또 말했다. "그 남자하고 경애가 오늘 저녁 우리집엘 온대요. 당신과 이야기도 하고 싶고 인사도 하고 싶다고 그런대요." "좋지. 그럼 방문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야." 나는 이제 경애의 결혼이, 그리고 캐나다로의 이주가 결정적 단계에 와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날 저녁에 경애와 그 남자가 우리집에 나타났다. 그 사람은 키도 작고 그다지 호감을 주는 인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냐? 영화배우를 할 것도 아닌데. 아내가 또 없는 솜씨를 발휘해서 그럴싸하게 저녁식사를 마련했고 그 남자와 나는 맥주를 권커니 받거니 하며 그야말로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진행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캐나다의 기후 문제, 교민들의 생활상 등을 얘기했는데 그때까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유지되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외국에서 반체제 활동을 하는 걸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좀 뜻밖이고 묘한 질문이었다. 아마 그는 나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 정작 나를 만나겠다고 한 듯싶었다. 맥주 몇 잔만 안 마셨던들 나는 눈치를 봐가며 적당히 대답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의 주제가 그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평소에 직설적으로 말하는 버릇이 있고 또 술기운까지 겹쳐서 더욱 말이 솔직담백하게 나오고 말았다. "그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요. 그러나 그런 정신이라면 역시 조국에 남아서 버티어야 하지 않을까요?" 평소에 이민 가는 걸 별로 안 좋게 생각한 게 엉뚱한 데서 표출되어버린 것이다. 그 남자는 그만 발끈 화를 내버렸다. "그러니까 교민들의 반체제 활동을 감성적인 행동으로 몰아부치는 겁니까?" "아니, 반드시 그런 뜻만은 아니고……." "말이 안 통하는 군요. 지성인이라고 해서 통할 줄 알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도 정말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버렸다. 그가 질문을 잘못했는지 내가 대답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교민이란 말을 뺐더라면 대화가 잘 풀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왜 그런 중요한 자리에서 실언을 한단 말인가? 교민의 입장을 좀 너그럽게 봐준다고 해서 내 코가 떨어져나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말하면 뭐 체면이라도 깎이는가? '그건 정말 의미심장합니다. 역시 밖에서 조국을 보면 비애가 한층 크겠지요. 큰 시야로 볼 때 우리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이니까요.' 이렇게라도 말했다면 경애는 지금쯤 토론토의 어느 가정 주부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그 남자는 내 말에 비위가 상해서 일어서서 나갔다. 물론 경애도 뒤따라 나갔다. 그러나 그 남자는 나로부터만 떠난 게 아니라 그날 경애로부터도 떠났다. 오해의 대가 치고는 정말 큰 대가였다. "경애, 미안해. 나는 그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구." 남자와 헤어진 후 경애가 우리 집에 왔을 때 나는 정말 할말을 몰랐다. 경애는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 사람 경솔해서 그래요. 이쪽 얘길 더 듣지도 않고 그런 법이 어딨어요. 그렇게 경솔한 사람이란 걸 형부가 알려준 거예요. 하마터면 모르고 넘어갈 뻔 했잖아요." 경애는 도리어 나를 위로했다. 그럴수록 단 한번의 기회를, 두번 다시 오기 힘든 기회를 망쳐버린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그렇게 기회를 놓쳐버린 경애는 이제 서른다섯의 노처녀가 되었다. 그 경애가 이태만에 우리 집에 오는 것이다. 나는 혼자 경애에 대한 갖가지 안타까운 상념에 빠졌다. 경애는 지금 얼마나 낙심하고 있을까? 그리고 또 얼굴은 얼마나 그늘졌을까? 나는 그런 경애를 만나 이번엔 또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런데 다음날 우리 집에 나타난 경애는 내 생각을 완전히 배반해버렸다. 그녀는 전보다 활달했고 옷차림도 더 세련미를 풍겼으며 얼굴도 분명 약간은 예뻐진 듯 보였다. 누가 봐도 경애는 이십 대의 풋풋한 아가씨였다. "저 뜨개질 가게로 돈 잘 벌고 있어요. 너무 바빠서 영화구경 한번 갈 짬이 없다구요. 형부 제가 한 턱 낼세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실래요?" "뭔데 그래. 가능한 일이면 들어주지." "어떤 남자 한번 만나줘요. 마흔다섯이 넘은 남잔데 상처하고 애 하나하고 산대요. 지물포를 크게 하나 봐요. 아는 아줌마가 소개해서 한번 만났는데 그 뒤로 저렇게 귀찮게 찾아다니지 뭐예요. 날마다 가게로 와서 결혼만 하자고 졸라대요." "그 남자를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라구?" "이야기할 것도 없어요. 다시 또 귀찮게 굴면 혼낸다고 말하세요. 아이 창피해." "아니, 사람만 좋으면 한번 고려해 볼 수도 있지 않어? 왜 싫다는 거지?" "몰라서 그러세요? 다 늙은 홀애비하고 누가 결혼하겠어요? 저쪽은 세상을 다 살아봤고 이쪽은 처음인데 어떻게 상대가 되나요? 난 그런 결혼 안 해요." 아내가 한마디 끼어들었다. "얘, 그렇지만 네 나이도 있지 않니?" "내 나이가 어떻다고 언니는 그래? 내가 뭐 할머니라도 되었다는 거야? 참 사람들 생각을 난 이해 못하겠어. 마흔 살 쉰 살이 되어도 난 스무살 때나 꼭같애. 난 나처럼 결혼이란 걸 아직 모르는 남자가 아니면 갑부 후계자라도 싫어. 난 아직 그런 남자를 기다리고 있단 말야." "언제까지 기다릴 거야?" 아내가 물었다. "그럼.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러다가 정말 꼬부랑 할머니가 되면 어떡할려구?"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결혼한다면 그거 참 멋있겠지? 언니, 난 요즘 가끔 그런 상상을 하면 즐거워." 책 뒤에 여기 모아 놓은 얘기들은 생황에서 묻어 나온 것들이다. 짧은 형식이 심각미가 덜 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심각한 것이 반드시 진실을 보증하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긴장에서 벗어나서 쓰여진 이 얘기들이 더욱 솔직한 우리들의 자화상은 아닐는지. 때로는 희극적인 장면들도 여러 군데에서 발견될 것이다. 사실 비극은 말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여기에 비해 희극은 언어가 생략되는 경향이 있다. 이같은 이점 말고도 우리 모습에는 비극보다 희극적인 요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나는 때로는 비극을 보면서도 거기에서 희극을 발견하곤 한다. 이런 관점들을 참고삼고 여기 모아 놓은 얘기들을 읽어 가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왕이면 여러 가지 얘기들이 하나의 체계로, 바꿔 말하면 하나의 세계로 독자들에게 일목요연하게 인식되어 줬으면 좋겠다. 유난히도 무덥고 지루한 여름을 보냈다. 그 여름이 끝나가는 때에 이 책이 나오게 되어 반갑다. 작은 의미를 담은 작은 얘기들로 엮어진 이 작은 책이 더위를 이겨내고 이제 새롭게 생활의 리듬을 되찾고 자기 삶의 지표를 점검하려는 이들에게 작은 보탬이 되어 준다면 더없이 기쁘겠다. 1994년 8월 송 영